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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들어가며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과 변혁운동은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겉으로는 양적으로 성장한 듯 보이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후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한국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의 사례를 보자.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민주노총은 2000년대 들어 그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매번 총파업을 선언하지만, 대부분 ‘뻥파업’으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다. 변혁적 활동가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얼마 전 1월 25일 열린 소위 ‘정치대회’는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언가를 할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민주노총은 2월 11일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민중 대선’ 의제를 안건으로 상정조차 하지 못했다. 이는 한국 변혁진영이 처한 무기력함과 말과 행동의 괴리를 여실히 드러낸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대중운동이든 진보정당 운동이든 심각한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023년에 발생한 양규서-함계남 사건은 이러한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 변혁운동이 이처럼 무기력하고 사실상 후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운동의 원칙을 상실하고, 이론과 실천이 괴리된 데 있다. 잘못된 이론이 판을 치면서 실천의 나침반 역할을 하지 못하자, 현실 운동은 마치 고인 물처럼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된 이론과 노선을 되돌아보기는커녕, 이를 고수하며 변명에 급급한 정치세력들은 어느덧 생존을 위한 집단 패거리로 전락했다. 이들은 자기 식구 감싸기와 외부 배척에 몰두하며 분파주의와 패권주의, 음모론만을 양산하고 있다. 애초에 내걸었던 깃발은 이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 운동이 발전할 리 만무하다.
쇄신의 방향: 이론과 실천의 재정립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날로 타락하는 운동을 쇄신할 수 있을까? 여기서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 없다”는 고전적 명제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잘못된 이론과 노선이 망친 현실 운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이를 교정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정통 맑스주의에 대한 올바른 학습만큼 효과적인 처방은 없다.
우리 운동의 많은 오류는 정통 맑스주의를 이유 없이 폐기하거나 수정하면서 발생했다. 소련 붕괴를 핑계로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부당한 비판이 만연했고, ‘일국 사회주의 건설’을 부정하는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득세했다. 이들은 2000년대 들어 한국 좌파의 주류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들의 잘못된 지도 아래 한국 변혁운동은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4차 산업혁명의 진전과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져올 거대한 변혁적 의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둔감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생산력이야말로 인류 역사를 발전시키는 가장 강력한 ‘기관차’라고 강조했지만, 이 말은 그들의 기억에서 오래전에 잊혀졌다. 이들은 사회주의의 제1의 임무가 공산주의 사회의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있음을 애써 모른 체 하며, 성숙한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실현될 수 있는 ‘자유인의 연합체’를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부정하는 잣대로 사용하고 있다.
주변에는 이러한 신트로츠키 교의를 따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는 그들이 명백히 정통 맑스주의와 사적유물론의 교리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기껏해야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전락했으며, 이 같은 트로츠키주의와 타락한 세력들이 한국 변혁운동을 대표하는 한, 우리 운동의 진정한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처방은 과학적 이론을 다시 부활시키고, 이를 재학습하면서 한국 변혁운동의 기본 원칙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먼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소개한다. 철학은 세계관이며 방법론이기 때문에 모든 이론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정통 맑스주의를 이해하고 이를 현실 운동에 적용하려는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변혁운동이 새로운 도약을 위해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론과 실천의 균형을 되찾아야 할 때다.
제1장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과학적 세계관과 방법론이다

세계 각국은 철학 교육의 중요성을 오래전부터 인식해왔다. 특히 서구에서는 철학이 모든 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택 과목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서구 교육계와 지식인 사회의 선견지명 있는 이들이 철학이 학생들의 인문적 소양과 사고력 향상에 미치는 영향이 대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또한 철학 교육을 중요시해왔다. 조선 시대 가장 보편적인 초등 교육기관인 서당에서는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통해 한자 학습과 유교적 인성 교육을 병행하였으며, “하늘 천 따 지(天地)”와 같은 우주론적 개념을 조기 교육에 도입하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학문의 본질을 “마음의 밝음을 깨우치는 것”으로 정의하며 철학적 사유를 강조하였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단순한 행정 매뉴얼을 넘어 ‘민본주의 철학’을 체계화하며 “백성은 하늘이다[民者君之天也]”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198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한국변혁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 변혁운동의 실천에서 나침반과 같은 지침을 제공하였다. 마르크스는 젊은 대학생 시절 “철학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진리로 남아있다.
1.1. 철학은 체계화되고 이론화된 세계관이다
철학은 철학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은 고집이 세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 어떤 사람은 원칙 없이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이들은 유심론이나 실용주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 기울어져 있다. 엥겔스는 철학을 부정하려는 일부 자연과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자연 연구자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지 간에, 그들은 여전히 철학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철학자들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사람들이 바로 가장 형편없는 철학자들의 속물적 잔재의 노예가 된다”고 지적했다. 즉 모든 사람이 철학자는 아니지만, 누구도 철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뜻이다. 다만 철학에 대한 태도가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 체계적인가 단편적인가, 이론적인가 경험적인가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철학은 매우 오래된 학문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철학을 연구해왔고, 사람들의 인식과 실천은 철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가장 어려운 철학적 문제 중 하나로 꼽힌다. 이는 철학이 자연, 사회, 사유의 영역을 다루며 다양한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각 시대와 민족의 철학자들이 다루는 문제와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철학에 대한 정의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는 자연철학이 지배적이었기에 철학을 ‘존재’에 관한 학설로 보았다. 반면, 고대 중국에서는 인생과 도덕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며 철학을 인생과 윤리에 관한 학설로 간주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철학을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에 관한 학설로 여겼고, 근대 철학자 로크와 칸트는 철학을 인간의 인식 활동과 인식 능력에 관한 학설로 정의했다. 현대 서양 철학에서는 유럽 대륙의 인본주의가 철학을 인간에 관한 학설로 보았으며, 영·미의 분석철학은 철학의 임무를 명제의 언어적·논리적 분석으로 한정했다. 이처럼 철학에 대한 정의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며, 통일된 견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의 본질을 명확히 이해하려면 철학이 다루는 문제와 철학 자체의 본질을 구분해야 한다. 철학적 문제는 자연, 사회, 사유 등 모든 영역에 존재하지만, 철학은 단순히 문제를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 학문과의 관계 속에서 본질을 탐구한다. 철학은 구체적 과학과는 다르다. 각 과학이 특정 영역의 구체적 문제를 다루는 반면, 철학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며,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거시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철학은 세계관의 이론적 형태, 즉 체계화되고 이론화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의 '지혜'와 과학적 '지식'의 차이
철학은 구체적인 과학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각 구체적인 과학은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특정한 자연이나 사회 영역을 대상으로 하지만, 철학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며,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거시적이고 총체적으로 탐구한다. 어떤 구체적인 과학도, 심지어 모든 구체적인 과학의 총합조차 철학을 대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증 과학이 제공하는 지식은 여전히 세계에 대한 실증적 이해에 머물지만, 철학은 이러한 지식을 개괄하고 종합하며 재사고하여 세계의 일반적 본질과 법칙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세계관의 이론적 형태, 즉 체계화되고 이론화된 세계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관을 단순히 "세계를 관찰하는 것"으로 축소하거나, 철학을 단지 세계에 대한 묘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인간이 세계 밖에 서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는 문제로 귀결시키며, 인간을 세계 밖으로 배제해서도 안 된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우리가 말하는 세계는 인간과 인류 사회를 포함하는 세계이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 사유와 존재의 관계, 주체와 객체의 관계 등은 모두 세계 자체가 포함하는 현실적 관계이다. 따라서 철학은 세계의 객관적 본성과 보편적 법칙을 탐구할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과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하며, 인류가 세계를 인식하고 변화시키는 가능성과 경로, 그리고 보편적 방법을 논의한다.
철학이 구체적인 과학과 다른 이유는, 철학이 특정 영역의 구체적 지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생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거시적 이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지혜로 표현되며, 철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철학’은 그리스어 philosophia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추구(philem)”와 “지혜(sophia)”를 의미한다. 19세기 일본의 초기 서양 철학 전파자인 니시 아마네는 중국어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 사상을 표현했다. 이후 중국 청나라 말기의 학자 황준헌이 일본에서 유행하던 이 번역어를 중국에 도입했고, 이는 학술계에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철학을 “애지(愛智)”, 즉 지혜에 대한 추구로 정의하는 것은 철학과 구체적 과학 간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철학적 지혜는 실증적 지식과 다르다. 예를 들어, 1+1이 2라는 것을 아는 것은 지식이다. 1이 두 개의 0.5를 포함한다는 것도 지식이며, 사과 하나를 반으로 자를 수 있다는 것은 생활 속의 지식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속에 둘이 있다”거나 “모든 사물은 대립을 포함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지혜이다. 이는 하나가 둘을 포함하고, 하나가 둘로 나뉠 수 있다는 철학적 통찰을 드러낸다. 또 다른 예로, 흰 말도 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지식이나 상식으로 볼 수 있지만, “흰 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는 것은 지혜이다. 왜냐하면 이는 개별과 일반의 관계라는 철학적 문제를 궤변적 방식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7m가 1.6m보다 크다는 것은 지식이며, 1.8m가 1.7m보다 크다는 것도 지식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사물의 높낮이와 길이가 상대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단순한 양적 지식이 아니다. 이는 사물 간 차이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변증법적 통일을 다루는 철학적 지혜이다. 물론 철학은 과학적 지식과 분리될 수 없다. 철학은 지식에서 비롯되지만, 지식을 넘어선다. 철학은 지식 속에 내재된 보편적 법칙과 의미를 드러낸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지식의 총결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철학이 오래전부터 발달해왔다. 예를 들어 노자의 《도덕경》은 우주, 사회, 인생에 관한 깊은 지혜를 담은 철학적 대전이라 할 수 있다. 중국 고대 철학은 서구 자본주의 시기의 철학과 달리 자연과학에 직접적으로 기반하지는 않았지만, 순수한 사변이나 허구의 산물은 아니었다. 《도덕경》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적 지혜는 도(道), 즉 객관적 법칙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천도(天道)는 우주의 법칙이며, 인도(人道)는 사회와 인생의 법칙이다.
한국 전통문화에서도 철학은 빛나는 유산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은 《성학십도》에서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체계화하며 “이(理)는 기의 주재자”라는 주리론(主理論)을 정립하여 인간 본성의 선악 문제를 ‘4단7정론(四端七情論)’으로 설명하였다. 한국 불교 철학도 심오하다. 신라의 원효(617~686)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일심(一心)’ 개념을 제시하며 “모든 차별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통합적 세계관을 정립하였다. 이는 노자의 ‘도’와 유사하게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실천적 깨달음을 강조한 특징을 지닌다.
인간이 도달한 지혜의 수준은 천도와 인도에 대한 이해와 상호 의존적이다. 천도와 인도에 대한 이해는 자연에 대한 관찰과 인간의 생활 경험에서 비롯된 철학적 승화의 결과이다. 따라서 철학은 자연과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인간의 실천적 경험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과학과 인간의 생활 실천을 떠난 철학적 지혜는 단지 거짓말과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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