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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총력전(Total war)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국가는 전쟁 수행을 위해 공장과 철도, 식량과 연료, 노동력과 과학기술까지 전쟁의 자원으로 이용했고, 후방의 민간 생활공간은 전쟁 수행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전선과 후방의 구분은 크게 약화하였다.
후방 민간사회 자원은 통제되고 대부분 공장이 무기와 군수품 생산에 동원되었다. 식량, 연료, 생필품의 배급제가 시행되었고, 남성들의 징집으로 여성들이 공장과 전선 후방을 책임져야 했다.
유럽의 주요 도시는 전쟁의 직접적인 파괴와 장기간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런던, 베를린, 함부르크, 드레스덴, 바르샤바, 레닌그라드와 같은 유럽의 도시들은 대규모 공습과 지상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당하였다.
아시아에서도 도쿄, 오사카, 고베, 나고야를 비롯한 일본의 주요 도시들이 대규모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중국의 여러 도시 역시 중일전쟁의 장기화 속에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공습으로 파괴된 도시는 단순히 군수·산업시설의 파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주거지와 학교, 병원과 진료소, 도로와 교통망 등 도시가 일상적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생활 기반 자체를 붕괴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도시 공습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올해 이란 미나브의 샤자레 타이이베 초등학교 공습은 그 참혹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학교가 수업 중 공격을 받아 수많은 어린이와 교직원이 희생되었고, 인근 의료시설 역시 피해를 보았다. 학교와 의료시설이라는 민간 생활공간이 전쟁의 파괴 속으로 들어갔고, 공습은 더는 군사시설만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 한 사회의 일상과 미래를 파괴하는 행위가 되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항공전술의 등장: 죽음과 파괴의 공포
현대적 공중폭격의 중요한 출발점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비롯됐다. 독일은 1915년부터 체펠린(Zeppelin) 비행선을 이용하여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도시들을 공격했다. 비행선의 폭격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전쟁의 공간을 전선에서 후방의 도시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당시 체펠린의 속도와 폭탄 적재량, 명중률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정도의 군사적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항공기를 새로운 군사적 무기로 급속하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항공기의 속도와 항속거리가 크게 향상되면서 항공전력은 지상군을 지원하는 보조적인 수단을 넘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독립적인 전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제 하늘은 지상군과 해군을 지원하는 보조적 공간이 아니라,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수 있는 독립적인 전장이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비행사 출신 줄리오 두에(Giulio Douhet, 1868~1930)는 저서 『제공권(制空權) Il dominio dell'aria』(1921)에서 적의 전쟁 도발을 무력화시키고 근절시키는 데 있어 ‘전략폭격’이 중요하다는 전술 공군 이론을 창시했다. 두에는 적의 전선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적국의 산업시설과 교통망, 도시와 사회시설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과 국민의 전쟁 의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폭격이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이루어질 때 주민들의 공포가 사회 전체로 확산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두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La vita normale non può svolgersi sotto l'incubo perenne della morte e della distruzione imminente. 임박한 죽음과 파괴라는 끊임없는 악몽 아래에서는 정상적인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줄리오 두에, 『제공권(Il dominio dell’aria)』, 1921)
두에와 함께 미국의 윌리엄 미첼(William Mitchell, 1879~1936) 장군 또한 공군력의 중요성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미첼 역시 장거리 폭격기가 적의 산업시설과 해군기지 등 핵심 목표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독립적인 공군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실제 전쟁에서 그대로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전략폭격’은 산업생산과 교통망에 상당한 피해를 주었지만, 폭격만으로 적국의 항복을 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었다.
또한 대규모 폭격은 현대전에서 전선뿐만 아니라 후방의 피해를 전례 없이 확대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부상을 초래했다. 특히 전쟁 이후에도 도시의 주거·의료·교통·위생 체계에 장기적인 피해를 남겼다.
그뿐 아니라 대규모 전략폭격은 현대전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민간인 보호와 전쟁의 도덕적·법적 한계를 둘러싼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초전 스페인 내전과 무차별 공중전에 대한 혐오
흔히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고 불리는 반파시스트 전쟁인 스페인 내전은 1936년 2월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공화주의 좌파와 지역주의 정당이 선거연합으로 스페인 총선거에 승리하면서,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인민전선(Frente Popular)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후 인민전선이 토지 개혁과 교회 재산 몰수 등 혁명적 정책을 펴자, 기득권인 가톨릭교회·지주·자본가·군부세력은 반발하였다.
특히 군부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는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다. 스페인 내전은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을 인민전선 공화파 편에,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와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프랑코를 지원하는 파시스트(Fascist) 파로 뭉쳐, 20세기 이념의 격전장이 된다.
당시 여러 나라의 진보적 작가와 지식인들은 스페인 내전을 국내 분쟁이 아니라 파시즘의 확산과 인민전선의 혁명이 충돌하는 국제적 투쟁으로 인식하고 국제여단을 결성해 각자의 방식으로 공화파를 지원했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직접 공화파 민병대에 입대해 전선에서 싸웠으며,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는 종군기자로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프랑스에서는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가 공화파를 지원하는 비행대대를 조직해 참전했고,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 역시 공화파 진영에 참여했다. 러시아 출신의 작가 일리야 에렌부르크(Ilya Grigoryevich Ehrenbu, 1891~1967)는 소련 측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스페인 내전은 공군력을 이용한 대규모 폭격이 전쟁에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1937년 4월 26일 독일 콘도르 군단(Legion Condor) 등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Guernica)를 장시간의 공습과 소이탄 투하로 시가지 대부분이 불타고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단순히 한 도시가 파괴된 사건을 넘어, 공군력이 전쟁의 양상을 바꾸고 민간인의 일상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훗날 게르니카는 ‘총력전’과 민간인에 대한 공중폭격의 상징이 되었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언론을 통해 조국 스페인의 게르니카 폭격과 참혹한 사진들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고 대형 벽화 「게르니카」(1937년 작)를 제작하여 전 세계에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다.
이때 소위 ‘문명국’인 미국·영국·프랑스 등은 일본의 중국 도시폭격과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공습, 독일·이탈리아의 스페인 마드리드와 게르니카 공중전을 새로운 형태의 전쟁으로 간주하고 도시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도서출판 이후, 2002)에서 독일·이탈리아와 미국·프랑스·영국의 무차별 폭격에 관해 이야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우리 – 미국, 프랑스, 영국, 즉 ‘문명 세계’ - 는 현대 공중전이라는 새로운 현상, 도시 민간인들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혐오한다고 선언했다. 일본의 상하이 폭격, 에디오피아의 비무장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이탈리아의 폭격, 스페인 내전 중에 마드리드에 투하된 폭탄들, 코번트리와 로테르담에 대한 독일의 폭격 등등에 대해. 물론 파시스트들에게서 기대한 그대로였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에 들어섰고 똑같은 일을, 단지 그 규모가 훨씬 크다는 것만 빼고는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일을 저질렀다. 르와양은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 영국과 미국 비행기들의 드레스덴 폭격(커트 보니것은 그의 잊을 수 없는 소설 『제5도살장』에서 자신만의 기묘한 방식으로 이를 다루고 있다)은 적어도 3만 5천, 실제로는 1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소이탄이 도시에서 산소를 빨아들여 허리케인 같은 폭풍을 가져왔으며, 거리 곳곳을 가로질러 화염이 뻗쳐 나가는 현상에는 ‘열폭풍’이란 이름이 붙었다.””
독일과 연합군의 상호 ‘전략 폭격’과 민간인 희생
제2차 세계대전은 줄리오 두에의 ‘전략폭격’ 이론이 실제 전쟁에서 대규모로 시험 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독일 공군은 1940년 11월, 영국의 산업도시와 군수산업 시설을 겨냥한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그 가운데 11월 14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진 영국 중부의 산업도시 코번트리(Coventry) 공습은 특히 파괴적이었다. 코번트리는 항공기와 군수품 생산 등 전쟁산업과 관련된 시설이 밀집해 있었고, 독일군은 이곳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대규모 폭격으로 도시의 주거지역과 상업시설, 공공시설 등이 광범위하게 파괴되었으며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특히 당시 약 500년의 역사를 지닌 코번트리의 성 미카엘 대성당(St Michael’s Cathedral)도 폭격을 피하지 못했다. 대성당은 1940년 11월 공습으로 지붕과 내부가 불타고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56년부터 성 미카엘 대성당 복구공사를 하면서 파괴되었던 벽체는 그대로 보존하고, 그 옆에 전쟁의 참상을 상징하는 장소로 재건축하여 1962년에 완공했다.
코번트리의 사례는 전략폭격이 단순히 군수공장만을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시설이 위치한 도시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의 생활공간까지 폭격의 직접적인 파괴 대상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43년 1월 연합국 합동참모본부는 카사블랑카 회의의 결과인 ‘카사블랑카 지침(Casablanca Directive)’을 연합공군 작전 목표로 승인한다.
“독일의 군사, 산업 및 경제 체계를 점진적으로 파괴하고 혼란에 빠뜨리며, 무장 저항 능력이 치명적으로 약해질 때까지 독일국민의 사기를 꺾는다.(『세계사를 바꾼 50가지 전쟁기술』)”
이 지침은 영국 왕립공군(RAF)과 미국 육군항공대(USAAF)의 전략폭격 사령부에 하달되었으며, 이후 전개된 연합 폭격 작전(Combined Bomber Offensive)의 법적·전략적 근거가 된다.
이후 연합군의 전략폭격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1943년이었다. 그 정점 중 하나는 1943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실시된 ‘고모라 작전(Operation Gomorrah)’이었다.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야간에 대규모 폭격을 했고, 미 육군항공대 제8공군은 주간 폭격을 수행하면서 독일의 주요 산업도시를 공격했다. 특히 함부르크에서는 반복된 공습으로 도시의 광범위한 지역이 파괴되었으며, 대규모 화재와 화염 폭풍까지 발생해 막대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함부르크에 이어 연합군 폭격의 주요 표적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옮겨갔다.
저널리스트인 로빈 크로스의 『세계사를 바꾼 50가지 전쟁기술』(2024)에 나오는 미국과 영국의 독일 전략폭격 내용이다.
“지역 폭격의 첫 단계는 1943년 7~8월에 절정에 달했다. 이 기간에 수행된 고모라 작전(Operation Gomorrah)에서 폭격기 사령부는 함부르크에 잇달아 파괴적인 폭격을 단행했다.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의 폭격기들이 야간폭격을 하는 동안 미 육군항공대(USAAF) 제8공군은 낮에 독일 도시들을 타격했다. 그다음으로는 아서 해리스 대장의 말을 빌리자면 ‘베를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1943년 11월부터 1944년 3월까지 계속된 베를린 폭격은 거의 500대의 폭격기를 잃은 끝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방공망은 점점 전투력이 떨어져 가던 반면, 폭격기 사령부의 경로 탐색과 목포물 지정 기법은 날로 발전해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대한 많은 폭격기로 목포물 상공에 집결시킬수 있게 되었다. 1944년 연말에는 독일 도시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다.”
전략폭격의 숨은 의도: 전쟁 수행 의지와 사기 약화
1944년에 들어서면서 전황은 연합군에게 더욱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독일의 전투기 전력과 방공망이 점차 약화하면서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이 더 효율적으로 독일의 도시와 군수·산업시설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됐다. 결국 1944년 말에 이르러 독일의 주요 도시 상당수는 연합군의 지속적인 폭격으로 심각한 파괴를 입었다.
전략폭격의 목적은 단순히 적의 군사력과 산업시설을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폭격으로 도시의 생활환경을 무너뜨리고 주민들의 심리와 전쟁 수행 의지, 그리고 사기(morale)를 약화시켰다. 특히 야간 폭격에서는 특정 공장 하나를 정밀하게 파괴하기보다 넓은 지역을 폭격하는 방식이 사용되면서 민간인의 피해가 더욱 커졌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42년 3월 처칠의 과학고문이었던 프레더릭 린데만(Frederick Lindemann, 처웰 경)의 “조사에 따르면, 가옥 파괴가 사기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다고 한다. 사람들은 친구나 친척이 죽는 것보다 여기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하다.(1942년 3월)” 발언이다.
그러나 전략폭격이 엄청난 파괴와 인명피해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폭격만으로 상대 국가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예측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2차 세계대전은 공군력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전선과 후방의 구분은 더욱 희미해졌고, 산업시설과 도시 자체가 군사적 목표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드레스덴 폭격(Bombing of Dresden)’과 르와양(Royan)의 대규모 공습이다.
‘드레스덴 폭격’은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가 주도했다. 독일 작센주의 고도(古都) 드레스덴에 수천 톤의 고폭탄과 소이탄을 투하했다. 이로 인해 거대한 화염 폭풍이 발생하여 아름다운 도시 도심이 잿더미로 변하고 대규모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군사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고 피난민이 몰려있던 문화 도시에 가해진 대규모 폭격은 인도적 정당성에 대한 엄중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또 하나의 무차별 공습은 프랑스 해방 직전 고립된 잔존 독일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945년 4월 대서양 연안의 항구도시 르와양(Royan)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다. 대서양 연안의 아름다운 도시인 르와양은 수백 년간 유지되어 온 역사적 유물과 건축물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며 인류 공동의 문화적 자산이 소실되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은 『전쟁에 반대한다』(2003)에서 르와양 폭격에 참전한 사실을 고백한다.
“공식 역사에 따르면 이 폭탄들은 ‘끈질긴 독일 수비대’에 투하됐다. 이것은 사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폭탄이 투하된 곳은 르와양 주변 전역이었으며 이곳에는 독일군 수비대도 있었지만(대부분 시 외곽에 있었다) 주민들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르와양 폭격에 관해 조사하게 된 것은 나 자신이 제490폭격비행대대의 폭격수로 이 작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약간 다른 종류의 폭탄을 적재하고 약간 다른 목표물을 공격하는 또 다른 폭격 임무인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새벽 이른 시간에 기상해 브리핑실로 가서는, 우리의 임무는 르와양 시내 및 외곽에 잔존해 있는 독일군 점령하의 고립지대를 폭격하는 것이며, 우리 폭격기의 폭탄투하실에는 신물질인 ‘젤리형 가솔린’(지금은 네이팜이라 불린다)을 채운 백 파운드짜리 폭탄을 싣고 가게 될 것이라고 들었다.
폭탄은 독일군 시설에 정밀하게 조준된 것이 아니라 단지 르와양 지역 상공에서 선두 폭격기의 폭탄투하실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마자 상하식 스위치로 투하한 것이었다. 이것은 목표물을 정밀조준하지 않고 집중 폭격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었다(2만5천 피트 상공에서는 우리가 작동법을 배운 폭격조준기로도 인근의 민간인들을 피해서 적 시설물만 명중시킬 수는 없었다.)”
폭격에 참여한 하워드 진의 증언에는 전략폭격에서 중요한 문제는 목표물을 정밀조준하지 않고 집중 폭격, 즉 ‘군사시설 폭격’과 ‘민간인 주거지’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폭격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코번트리, 함부르크, 베를린, 드레스덴, 르와양의 전략폭격의 사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영 연합군은 야간 비행과 대공포화, 악천후, 항법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독일의 도시와 산업지역을 대상으로 한 지역폭격(Area Bombing)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폭격의 목표는 개별 군사시설에 국한되지 않고 일정한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폭격은 군사적 목표와 민간인 피해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참상은 1949년 제4차 제네바 협약을 통해 전시 민간인 보호 규정을 대폭 강화하고, 무차별 폭격을 전쟁범죄로 규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25전쟁, 군사적 목표를 넘어 민간인 학살과 주민 일상의 파괴
공중폭격의 민간인 희생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에서도 미군은 압도적인 공중전력을 이용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도시와 산업시설, 철도와 항만, 발전시설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특히 평양과 원산은 대규모 폭격의 대상이 되었고, 도시의 군사·산업시설뿐 아니라 민간인의 주거지와 도시 기반시설 역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평양에 대한 폭격은 도시의 군사적 목표를 넘어 민간인 학살과 도시 기능 자체를 마비시키면서 주민의 일상을 파괴하였다.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2010)에 실린 김태우의 「무제한전쟁을 향하여: 한국전쟁기 미 공군 공중폭격작전의 성격 변화」 연구 논문에는 맥아더의 평양 폭격 지시 과정이 소상하게 나온다.
“한국 시간으로 1950년 6월 29일 오전 6시, 맥아더는 수원 비행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우연히 북한 야크기와 미국 무스탕기의 공중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공중전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후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미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George E. Stratemeyer)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맥아더에게 제공권 장악을 위한 북한 지역 즉시공격을 요청했다. 맥아더는 현장에서 이를 승인했고, 이 지시는 즉각 실행으로 옮겨져 6월 29일 오후 제3폭격전대의 평양비행장 폭격으로 이어졌다.
이날 맥아더는 작전구역을 북한 지역까지 확대하라는 트루먼의 명령 하달 전에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북한 지역을 폭격을 명령했다. 이는 미 공군의 북한 지역에 대한 최초 공습이었다. 아무리 전쟁의 적대국이라고 할지라도, 적대국 수도의 비행장을 폭격하는 결단이 대통령의 허가 없이 전구 사령관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다.”
미 공군은 조선의 5개 주요 도시(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전쟁 초기 6개월간 미 극동군 공군사령관을 지낸 에멋 오도넬은 1951년 1월 중순 미 상원 청문회에서 “한국에는 더 이상의 폭격 목표가 없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전 한반도는 단지 끔찍한 잿더미일 뿐이다”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인민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김진계는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조국(상)』(1990)에서 미군의 조선 지역 무차별 폭격에 대해 폭로한다.
“미군이 참전한 이래 가장 무서운 공격은 비행기 폭격이었다. 미군 비행기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밤낮으로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폭격하기 시작하면서, 인민군 점령지역에도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미군기는 밤이 되면 공중에 내내 떠있다가, 불빚이 조금이라도 흘러나오는 곳은 번개처럼 무차별 기총소사하고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흡사 들판에서 놀고있는 햇병아리 한 마리를 보고 수십 마리의 독수리가 벌떼처럼 달겨드는 꼴이었다.”
원산 역시 항구와 철도 등 군사적·전략적 가치가 있는 시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도시 전체가 폭격의 영향권에 놓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번트리와 함부르크, 베를린 등의 사례에서 나타났던 ‘군사적 목표와 민간 생활공간’이라는 문제를 6·25전쟁에서도 되풀이된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2권』에서 종전 시간 1분 전까지 진행된 미국의 원산폭격에 대해 브루스 커밍스의 기록을 재인용 했다.
“공식 미 해군사에 따르면, 원산 폭격은 ‘현대 미 해군 역사상 최장의 것’이었다. 그 공격은 861일간이나 계속되었고, 종전 시간인 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휴전 1분 전에야 끝이 났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원산은 그때 완전 폐허가 되었으며 멀쩡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고, 공장들도 땅에 파묻혀 버렸다.”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미 해군 소장 스미스의 증언도 수록했다.
미 함정은 원산을 밤낮없이 폭격했다. (중략) 그것은 아마도 한 도시에 이루어진 함포 공격이나 공중 폭격으로는 역사상 최장시간일 것이다. (중략)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
6·25전쟁의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략폭격 전술을 뛰어넘은 사례
6·25전쟁의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발전한 전략폭격의 논리와 전술이 한반도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전개과정』(1989)에서 “사실상, 공군의 임무란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한반도를 가르는 것이었으며, 또한 반도를 도려내면서 해상봉쇄와 함께 적의 보급선을 파괴하고 후퇴를 촉진시켜 그들을 패배시키고자 실시하였던 계속적인 폭격의 장으로 주민들을 몰아넣으려 한 것이었다”라고 공중폭격의 임무에 대해 말했다.
6·25전쟁 초기, 1950년 8월 초 유엔군과 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형성했고, 대구는 부산과 함께 이 방어선의 핵심 거점이었다. 특히 대구로 통하는 철도와 도로망을 장악하고 있던 지역은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에서는 지상군의 전투와 함께 대규모 항공폭격과 기총소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대구는 당시 단순한 후방도시가 아니었다. 1950년 7월 14일 대한민국 정부가 대구로 이동했고 미 제8군 사령부도 대구에 설치되면서 대구는 전쟁 수행의 중요한 지휘·군사 거점이었다.
이런 낙동강 전선의 지상군 전투와 대공습 속에 신동숙 여사의 피난 증언이다.
“저희 가족은 포항에서 8남매로 살다가, 아버지가 사변 나던 4월에 포항으로 전근 오셔서 은행에 계셨기 때문에 정보를 알아서 피난을 서두를 수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영덕쪽으로 온다고 모두 피난들 가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임신 중이어서 아버지가 걱정되어서 다른 사람보다 일찍 구룡포 기장 방향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집에 라디오가 있어서 방송을 듣고 사변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섯 살짜리 동생 업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우리 가족은 험하게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기장에 몇 달 있다가 그해 음력으로 추석 전날(1950년 9월 25일) 포항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이후 포항에 2년 정도 있다가 아버지가 대구은행에 전근 가는 바람에 저도 대구국민학교로 발령받아 1952년에 옵니다. 이때 도예종 선생을 만났습니다.
부군 도예종 선생의 피난 시기 이야기는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차 인혁관련자이자 도예종 선생이 5촌 당숙(堂叔)인 도혁택(1932~2011) 선생은 당시 교원인 관계로 6·25전쟁 당시 학교 실상을 알 수 있는 증언이 있다. 물론 신동숙 여사와 도예종 선생도 교원이었기에 실상은 거의 비슷하리라 생각든다.
“제가 전촌국민학교가 교원을 하였는데 학교는 군인들 훈련소가 되고 또 공병대가 북에서 내려오는 인민군들 저지선을 만든다고 공병대도 학교에 주둔했어요, 그때 학교가 대부분 다 휴교 됐고, 한편으로는 전국에 기독교 목사들과 가족들이 더 급해지면 일본으로 피난 가기로 하는 임시 대피소로도 쓰였어요.
또 어디서 붙들려 왔는지 훈련병들, 다니는 사람 붙들어 오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또 우리 학교 직원들이 감포 읍내 가서 쌀 배급을 받아다가 이제 나눠주고 했는데 배급을 타러 나가려면 완장을 차야 해요. 그것도 영어로 네시서리티처(Necessary Teacher), 필요 교원이라고 완장을 차고 나가야 붙들려 가지 않습니다.
도예종 종숙 어른과 형제분들은 2차대전 말엽에 피난을 강원도로 가서 2차대전이 끝나고 일제가 패망하고 난 뒤 영주로 왔습니다. 6·25 동족전쟁이 터지면서 그분들은 경주로 피난을 갔습니다. 둘째 종숙 어른이 면장도 하시고 그러면서 피학살자 유족들의 구명운동도 하고 그랬습니다.”
아마 이때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도예종 선생은 형님과 함께 피학살자 유족들의 구명운동에 참가하면서 의식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필자가 도예종 선생의 활동을 추정할 수 있는 김민희의 『쓰여지지 않은 역사: 인물로 본 사회운동사』(대동, 1993)이다.
“그는 14살 때 당시 계림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경주 화신연쇄점 점원, 보생위원 사환으로 잠시 일하다가 다음 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 영수학원에 입학하여 1년을 수료한 후 동경 서성중학에 진학하여 5년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평범하던 그의 생활은 해방과 함께 격랑에 휩쓸린다. 그는 1946년 8월 초등학교 교사시험에 합격한 후 경북 봉월, 영주, 서부 등의 초등학교 교원으로 지냈다.”
6·25전쟁 당시 도예종 선생이 교원으로 지냈던 경북 영주·봉화 일대는 미군의 폭격과 포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2024년 2월 21일자 『경북도민일보』 기사 미군 폭격에 의한 「경북지역 6·25 민간인 희생 진실규명 결정」 내용이다.
“6·25 발발 직후 미군이 경북지역에 가한 총격과 폭격으로 민간인을 희생시킨 사건과 관련해 국가의 공식사과와 피해회복을 권고하는 결정이 나왔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발생한 미군 관련 신청사건 중 첫 결정으로,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포항을 비롯해 영덕, 울진, 예천, 성주, 안동, 고령, 김천 등에서 피해가 컸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20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열린 제73차 위원회에서 ‘경북지역 미군 관련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으로 결정했다.”
신동숙 여사와 도예종 선생의 직접적 증언은 없지만, 당시 대구 경북지역에 살았던 분으로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으로 볼 때 미군의 공습으로 민간인이 희생된 참상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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