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창영 (시인)
등록일 : 20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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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독자의 마음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느냐는 작품에 깃든 작가의 마음이 얼마나 깊으냐에 따라 달라진다. 

 

얕은 물은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만큼 그 깊이를 헤아릴 일이 없지만 우물은 깊을수록 그 바닥을 가늠하기 어렵다.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물을 길으면 얕은 물을 뜨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와 전통을 생각하게 되고 무게를 느끼게 되며 때로는 성스러운 분위기까지 맛보게 된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이 대학 시절 쓴 시를 음미하다 보면 그 깊은 울림에 공명하게 된다.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속에
어둠은 빛이 되고
부셔 눈 못 뜰 빛이 되고
흉몽처럼 눈 멀어 서리치던 새벽
동 트는 창문빛까지 아팠었지요.

 

   ··· ··· ···어째서··· 마지막 희망은 잘리지 않는 건가 지리멸렬한 믿음 지리멸렬한 희망 계속되는 호흡 무기력한, 무기력한 구토와 삶, 오오, 젠장할 삶

 

악물린 입술
푸른 인광 뿜던 눈에 지금쯤은
달디 단 물들이 고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쯤은
세상 더 산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한강, 「편지」)

 

봄눈.png
봄눈

 

이 시에는 분노와 격정이 드러나 있지 않고 그보다 더 깊은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 죽은 이에 대하여 일상처럼 안부를 물으며 시작하는 차분한 풍경이 역설적이게도 더 애달픈 심정을 자아낸다. 화자의 아픈 마음이 길에 녹아 있고 계절에 깃들어 있다. 

 

1992년에 연세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니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10년도 더 지난 후의 일이다. 작가는 역사의 비극을 오래 곱씹으면서 자신의 정서로 삭였던 것이다.

 

오래 들여다보고 자기만의 정서로 삭이는 작가의 자세는 소설 창작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이는 노벨문학상 수상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한림원은 수상작 선정 이유를 밝히면서 한강의 문학에 대하여 “역사적 상처에 맞서고 인간 삶의 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했다.

 

울림이 깊은 시를 쓰려면 사색과 정서의 우물이 깊어야 한다. 사색은 깊이 헤아려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발생 이유가 뭔지, 누가 어떻게 됐는지, 어쩌다 그리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생각하는 것이다. 정서는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을 말한다. 내가 대상의 입장이 되어 보면 기쁜지, 슬픈지, 노여운지, 즐거운지 등의 감정을 더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작가 한강.jpg
작가 한강

 

사색과 정서의 우물을 깊이 파려면 역사의 아픔, 사회의 상처 등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보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사건을 되짚어 보고 의미를 찾는 자세와 함께 인간애가 깃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길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통의 현장을 찾아가 볼 필요도 있다. 

 

한바탕의 분노나 격정, 웃음이나 환호 등 겉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머물지 말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존재의 본질적인 요소와 결부시켜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사색하고 느낀 감정을 문학예술로 승화시킬 때 독자는 그 깊이 만큼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게 된다.

 

작품을 빨리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습작 시절에는 마음이 더 조급할 수 있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여러 습작을 써 보되 한편으로는 하나의 사건이나 대상을 두고 오래 사색하고 정서적으로 녹여 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사색과 정서의 우물을 깊게 파 본 작가는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더 깊이 보고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창영 시인.jpg
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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