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창영(시인, 문학박사)
등록일 : 202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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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성과가 사뭇 달라지게 마련이다. 시도 그렇다.  첫 장면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에 따라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서두에서 호기심이 생기면 끝까지 읽지만 아무런 매력이 없으면 읽다가 말 수도 있다.

 

자초지종을 순서대로 써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옛날 옛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았는데…’로 시작하는 것은 그야말로 옛날 얘기다. 들을 것과 읽을 것이 얼마 안 되던 시절에는 이야기를 순서대로 천천히 펼쳐도 흥미진진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일상은 늘 바쁘고 활자는 넘쳐난다. 사람들은 시작부터 흥미를 끌지 못하는 글을 굳이 다 읽으려 하지 않는다.

 

한 편의 영화를 생각해 보자. 주인공의 신상을 소개하고 성장 배경을 보여 주는 것은 나중 얘기다. 첫 장면은 대개 사건으로 시작되거나 의미심장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예사롭지 않은 장면에 관객은 호기심이 동하여 영화에 집중하게 된다.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비로소 첫 장면이 이해되고 자초지종이 밝혀진다.

 

시에서도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심을 끄는 것이 중요하다. 시의 나머지 부분을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뻔한 이야기나 장면으로 시작한다면 몰입도는 그만큼 낮아진다. 

 

한 사내가 죽었다
종각역 4번 출구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보신각 뒷골목에서 가로 육십 센티
세로 백육십 센티 빈 박스 속에서 마른 새우처럼,
최초로 엄마의 바다를 헤엄칠 때처럼.
잔뜩 웅크린 채 굳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그 앞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에게 조문하지 않았다
또 다른 노숙자가 다가와 그의 안부를 물었고
곧이어 구급차가 나타나 그를 싣고 갔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삼십 년 전 종묘광장 벤치 위에서 잠을 청하고
서울역과 청계천 빌딩 숲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던 
순간에도, 달방호의 차가운 물길 속을 걸어 들어가던 
순간에도 그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저물어가도 되는 것일까?
조문도 없는 길 위에서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고 
다시 새벽이 왔다
별 하나가 잠들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김남권, 「꽃별 지다」) 

 

이 시는 첫 장면에서 한 사내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죽음 소식을 알게 되면 우선 놀라게 되고, ‘왜 그렇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시인은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어서 죽은 장소가 제시되고 시신의 모습이 묘사되고 주변 풍경이 그려진다. 죽은 이가 노숙자임이 드러나고 죽음이 확인되는 과정과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이 이어진다. 사람이 죽었음에도 아무도 놀라지 않고 울지 않는 분위기도 포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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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한뎃잠을 청하던 화자의 체험이 덧붙여지면서 사회의 무관심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저물어가도 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윽고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한 것이라고 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별 하나가 잠들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는 표현으로 각성된 자신의 상태를 묘사한다.

 

이 시를 음미하다 보면 타인이 곤경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를 반성해 보고 생명의 존엄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노숙자 한 사람이 죽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시인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것이다. 시는 뻔한 현상이나 이야기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 제시하고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공감과 감동을 자아낼 때 그 가치가 드러난다. 

 

만약 이 시가 위와 같이 구성되지 않고 자초지종에 치중했다면 긴장감은 많이 떨어질 것이다. ‘종각역 근처에 평소 노숙자들이 지내는데 어느 날 그 중 한 사람이 죽었다’로 시작한다면 벌써 호기심은 저만치 달아난다. 뉴스에서 이따금 접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뻔한 이야기로 인식되면 그 속에 담겨 있는 시인의 메시지는 관심을 받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서두가 중요하다고 해서 무리하게 보여주기에만 치우치면 곤란하다. 시의 내용에 잘 맞도록 해야 하다. 서두의 표현들을 내용에서 충분히 감당해야 한다. 서두만 눈길을 끌고 전체 내용에서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면 용두사미가 되고 만다. 호기심을 자극했다면 끝까지 몰입할 수 있도록 내용을 채워 주어야 한다.

 

김남권의 「꽃별 지다」는 첫 장면을 시 전체에서 잘 붙들어 주고 있다. 시작 부분에서 제시한 사내의 죽음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전체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는 얘기다.

 

첫 장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모범이 될 만한 시 몇 편에서 시작 부분을 음미해 본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윤동주, 「또 다른 故鄕」)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정지용, 「풍랑몽」) 
‘겨울 들녘에서/ 묵시록 읽고 있는 바람소리 들린다’(박종현, 「쥐불놀이」)
‘폭염에 마스크를 쓰고 불판 아스팔트를 걸어/ 쥐약을 사러 갔다’(백무산, 「인류세」)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오세영, 「그릇 1」)
‘언제부터/ 도시 한복판으로 압송되었는지’(조재형, 「횡단보도」)
‘양식이 고갈될 때면 상수리나무 숲으로 간다’(조정화, 「상수리나무 도서관」)
‘유리 주전자 속 가부좌한 목련꽃 한 송이’(옥효정, 「꽃차를 마시며」)
‘눈발이 후비는 어깨뼈 아래’(지창영, 「송전탑-고공 농성」)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최정례, 「칼과 칸나꽃」)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T. S. 엘리어트, 「황무지」)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말랐다’(H. 하이네, 「쉴레지언의 직조공」)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예사롭지 않다. 다음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표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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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내 시에 깊이 빠져들도록 하고 싶다면 자초지종에 매달리지 말자.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내용을 재구성하고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첫 장면을 제시해 보자. 세밀한 부분을 크게 부각시켜 보기도 하고, 사실을 과장하여 표현해 보기도 하고, 단어를 낯설게 조합해 보기도 하고, 특징을 한 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해 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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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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