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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람을 찾아서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1.09
해방을 앞둔 1944년 운니동에서 건국동맹원들과 함께 한 여운형(사진=한국일보 자료사진).jpg
해방을 앞둔 1944년 운니동에서 건국동맹원들과 함께 한 여운형 선생.


20세기는 혁명의 시대이자 인민의 시대였다.

 

영국의 BBC 방송은 20세기를 조명하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리즈 ‘People's Century(인민의 세기)’를 1995년, 1996년, 1997년 3년에 걸쳐 26회 매회 1시간짜리 에피소드를 방영했다. 이 시리즈는 위대한 인물의 행동을 회상하여 역사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평범한 남성과 여성이 20세기의 발전과 혼란이 자신의 삶에 끼친 영향을 인터뷰했다. 주로 20세기를 형성한 사회·경제·정치·문화적 운동을 인민의 관점에서 제작했다.

 

1996년 방영된 시즌 2 첫 회 에피소드 제목이다.

 

“Brave New World(1945~1961) - A ‘cold war’ embroils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in a contest of ideologies

멋진 신세계 - ‘냉전’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은 이념 경쟁에 휘말린다.”

 

그리고 1946년 영국의 전 총리 처칠의 미국 풀턴 연설이 소개된다.

 

“In 1946, Winston Churchill would deliver a speech at Fulton, Missouri that would soon catapult Americans out of their complacency: ‘From Stetin in the Baltic to Trieste in the Adriatic, an iron curtain has descended across the continent. Behind that line lie all the capitals of the ancient states of Central and Eastern Europe: Warsaw, Berlin, Prague, Budapest -- all these famous cities and the populations around them lie in what I must call the Soviet sphere.’

1946년 윈스턴 처칠은 미주리주 풀턴에서 연설하는데, 그 연설은 곧 미국인들을 안주에서 벗어나게 했다. ‘발트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내려졌다. 그 선 뒤로는 중부 및 동유럽의 고대 국가의 모든 수도가 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부다페스트, 이 모든 유명한 도시와 그 주변 인구는 제가 소련권이라고 부르는 곳에 있다.”

 

’냉전(Cold War)‘이란 말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1945년 10월 『트리뷴』지에 기고한 칼럼 ‘당신과 원자탄’에서 사용됐다. 그는 핵전쟁의 위협 속에 선전포고도 없이 전시와 다름없는 긴장 속에 미·소가 세계를 양분해 지배하고자 하나, 어느 쪽도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는 상태를 ‘냉전’이라 불렀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조선은, 영국 BBC 방송의 ‘멋진 신세계’에서 밝히는 ‘냉전’의 이념보다, ‘일제 식민 지배 청산’과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 먼저였다. 

 

ㅡ 건국준비위원회의 일제 식민 지배 청산과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건설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선생.jpg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선생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방이 뜻밖에 온 것이 아니고 국외 중국과 소련 접경지역에는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창설되거나 싸우고 있었고, 국내에도 해방을 위해 준비해 온 세력이 있었다. 

 

국외 항일 무장세력으로는 대표적으로 김구의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 김두봉의 화북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김일성의 만주 동북항일연군(제 88국제여단) 등이 있었다. 또한, 국내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과 이재유, 이관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그리고 노동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재유는 형 만기 이후에도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방되지 않아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였고, 이관술은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박헌영은 은신 중이었다.

 

여운형은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과 치안유지권을 인수하고, 8월 15일 밤 이미 그가 1944년 8월에 결성했던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발족시킨다.

 

김진국·정창현의 『www. 한국현대사. com』(민연, 2000)에서 건준의 발 빠른 조직 성장을 정리했다.

 

“건준은 급속하게 발전했다. 8월 22일에는 총무 · 조직 · 선전 · 재정 · 식량 · 문화 · 치안 · 교통 · 건설 · 기획 · 후생 · 조사 등 12부와 서기 1국으로 대폭 확정되었다. 마치 한 나라의 행정부를 연상케 하는 위용이다. 지방에서는 더욱 놀랍게 발전했다. 해방된 지 보름 남짓한 8월 말에 145개의 지방조직이 건설되었다. 도 단위에는 거의 다 건준 지부가 설치되었고, 군 단위에도 대개 있었으며, 면 단위까지 조직된 곳도 많았다. 민중이 스스로 열과 성을 다해 나서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브루스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①』(글항아리, 2023)에서 8월 28일 발표한 건준선언서는 이미 치안 유지를 넘어 새 정부 수립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건준은 정부 수립을 기다리는 동안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기구가 되려고 했는데, 그 정부는 ‘전국의 인민 대표가 모여 선출한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구성될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건준은 한국 독립의 산파가 되려고 했다. 그 선언서는 한국의 혁명적 전환을 암시했다. 그것은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고 봉건 잔재를 일소하며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민족 반역자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대중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반역자는 새 정부에서 자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며 그들과 ‘원칙 없이 단결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건준은 같은 책에서 8월 16일 전국의 정치·경제범을 석방한다. 당시 이남의 석방자 수는 약 1만 6천 명이며, 서울에만 1만 명 정도가 있었고 대구에 1,600명 정도가 있었다고 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독립운동가들의 기념 촬영(1945.8.16.).jpg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독립운동가들 (1945.8.16.)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38도선 이북만을 점령하고 그 이남은 미군이 점령할 것이 확실해지자, 단 하루 만에 행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포고령을 내리고 일본 군인 3천 명의 특별경찰대를 조직했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라고 뒷날 개탄했다.

 

ㅡ 미국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案)과 미국의 조선 분할 통치 

 

제2차 세계대전 중 조선의 독립문제가 최초로 논의된 것은, 1943년 3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와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 1871~1955)이 워싱턴에서 영국 외상 앤소니 이든(Robert Anthony Eden, 1897~1977)과 가진 회합 때였다. 이때 루스벨트는 “한반도를 일정 기간 동안 미국, 중국 및 소련 등 3국의 ‘신탁통치(trusteeship)’ 아래 두었다가 독립시킨다”라는 의견을 처음 밝혔다.

 

‘신탁통치’안(案)은 루스벨트가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공산주의가 정권을 잡을 위험이 큰 식민지국이 독립할 때, 신탁통치를 실시하여 그 기간을 이용하여 친미 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 ‘신탁통치’였다.

 

그 후 조선의 신탁통치 문제가 공식 논의된 것은,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미국(루스벨트), 영국(처칠), 중국(장제스) 3국 수뇌회담에서였다. 11월 27일 발표된 ‘카이로 선언’의 제3항에서 ‘조선인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조선을 해방하여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8일간, 크림반도 휴양지 얄타에서 미국(루스벨트), 영국(처칠), 소련(스탈린) 3국 정상은 소련의 대일(對日) 참전과 전후 처리 문제를 다뤘다. 이때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조선의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당시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할 뿐 아니라 깔보고 있었다.

 

얄타회담.jpg
얄타회담

 

이후 1945년 7월 22일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트루먼), 영국(처칠), 소련(스탈린) 3국 정상회담에서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와 소련의 참전 문제를 논의하면서 조선 문제는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조선을 해방하여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 해방에 대한 토의 자체를 거부했다.

 

마지막 추축국(樞軸國) 일본은 전의를 상실하고 ‘일억 총옥쇄(總玉碎)’라는 최악의 발악만 남겨 둔 상태였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에, 8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이제 일본은 항복만 남았다. 이때 히로시마는 10여만 명이, 나가사키는 7만 4,800여 명이 미국 원자폭탄으로 무차별 살상당했다. 그리고 1945년 말까지 21여만 명이 숨지고 수십만 명의 피폭자가 후유증에 시달렸다.

 

소련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 12시간 뒤 8일 자정에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하고 아시아 대륙에 있는 일본군에 대해 급속한 공격을 한다. 미국은 일본의 만주 관동군이 이렇게 빨리 소련에 무너지리라 몰랐다. 

 

미국은 이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동아시아와 일본에 대한 패권을 지키기 위해 조선을 교두보로 선택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2차 세계대전의 원흉 독일처럼 일본이 당연히 분할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미국은 8월 14일 소련에 조선의 38도선 분할점령 안을 보내고, 15일 일본 대신 조선을 둘로 쪼갠다.

 

ㅡ 전범국가 일본 대신 분단의 대용품이 된 조선

 

어처구니없게도 조선이 일본 분단의 대용품이 된 것이다. 

 

정작 분단됐어야 할 나라는 전범국가인 일본이다. 그런데 미국의 대소(對蘇) 정책의 일환으로 이남은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이남은 미국에게 전범국가 일본을 지키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9월 3일 오키나와를 출발한 미국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 장교들에게 한국인은 ‘미군의 적’이라고 말하며, ‘항복의 조례와 규정을 적용하라’라고 지시했다.

 

이는 9월 7일에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2호, 3호를 통해 구체화했다. 

 

포고령 1호에는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등의 내용이 있다. 

 

그리고 포고령 2호에는 ‘항복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 미국육군 최고 지휘관의 권한 하에 발한 포고 명령 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 군율 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 회의의 결정하는 대로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함’이라는 내용도 적시됐다. 

 

1945년 9월9일 조선총독부엣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장면.jpg
1945년 9월9일 조선총독부엣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장면

 

포고의 내용으로 보면 미군은 군사적으로, 점령군으로 적대 지역에 진주한 것이다.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미군정)은 친일파, 반민중 침략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냉전’ 이데올로기를 도구로 사용한다. 그리고 미군은 이남을 분할지배하기 위해 친미 사대주의자 이승만과 친일 친미 한민당을 지원하면서 적극 이용한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5)에서 미국의 이남 정책의 목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1945년 10월,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는 한국으로 떠날 민정장교들에게 ‘미국의 대한 정책의 목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주요 정책 브리핑을 실시했고, ‘일본인들이 협력적이고 질서정연하며 유순하다고 본 반면에 한국인들은 고집 세고 무례하며 반항적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선에서의 미군정의 기본적인 임무의 첫째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콘데도 적시했다. 그 방파제를 ’미 군부는 일본을 환테평양 공로(環太平洋 空路, Great Circle Air Route)의 일환으로 태평양에서 미국의 군사적 안보를 위해 필수적인 전략지역으로 파악‘했다.”

 

무자비하고 살벌한 맥아더 포고령에, 점령군 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은 일장기 대신 성조기로 무장했다.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신(新) 일제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미군은 조선인 폄하와 인종차별 그리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을 불법화하고 탄압했다.

 

ㅡ 조선민주청년동맹 성원 황금수의 삐라 살포 투쟁과 모뿔 사업

 

1945년 10월말 평양의 조선민주청년동맹 제1차 대회에서 공산당 청년 간부들과 소련 군사고문단이 함께 찍은 사진.png.jpg
1945년 10월말 평양의 조선민주청년동맹 제1차 대회에서 공산당 청년 간부들과 소련 군사고문단이 함께 찍은 사진

 

황금수는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성원으로 활동한다. 

 

1946년 4월 25일 결성된 조선민주청년동맹의 강령이다.

 

“ 1. 본 동맹은 민주주의적 이념과 경향을 가진 청년들이 대동단결하여 강고한 독립국가 건설에 총역량을 집중함.
1. 본 동맹은 정치, 경제, 문화에 있어 일제의 잔재 및 봉건적 요소를 근본적으로 숙청함.
1. 본 동맹은 절대적인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특히 청년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1. 본 동맹은 중·소·미·영 및 기타 민주주의 제 국가 정년들과 우호적 친선에 노력하여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에 기여함.
1. 진리를 탐구하고 심신을 연마하여 청년남녀 및 아동에 대해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고 문맹 퇴치사업에 노력함.
1. 본 동맹은 경제적 건설을 위한 산업, 교통, 운수기관의 부흥에 적극 참가하여 농촌경제의 급속한 발전을 기함.”<전상봉 『한국 근현대 청년운동사』(두리미디어, 2004)>

 

황금수는 삐라 살포 투쟁과 모뿔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대구에는 일본인이 만든 키네마극장, 조선 사람이 세운 만경관과 대구극장이 있었는데, 당시 키네마극장은 주로 연극을 많이 하여 삐라 살포 투쟁하기가 적합한 장소였어요.
연극 공연 시 징을 ‘쨍’ 치면 불이 꺼지면서 막이 내려오고, 그 안에서 무대 장치를 새로 설치한 후 또 징을 ‘짱’ 치면 불이 켜지는 이런 순간을 이용합니다. 막이 내려가면서 불이 꺼지는 그 찰나에 이층에서 삐라를 뿌립니다. 
1947년 봄인 거 같은데. 삐라 내용은 미군 놈 물러가라! 였어요”

 

그리고 기억에 남는 씨름 장사 나윤칠의 모뿔 사업도 증언했다.

 

“모뿔은 지금 말로 풀이하자면 후원회 활동을 말해요. 당과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당 운동에 우호적인 사람으로 모뿔을 통해 재정을 자발적으로 후원해요. 재정은 주로 구속 동지 영치금과 변호사 비용 그리고 구속 가족 생계뿐만 아니라 활동하다 병이나 부상한 동지의 병원 치료 등에 주로 사용됩니다.
모쁠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주로 대구 서문 시장 양심적 민족 상인들을 담당했어요. 주로 암호를 사용하여 가게에 들어가 협조 쪽지를 보여 주면, 보통 돈이 있을 경우는 즉석에서 마련해 주었으나, 없을 경우는 다른 가게에서 빌려와 주는 정도로 참여 열의가 높았어요.
그래서 이분들에 대한 보호는 절대적입니다. 결코 경제적 손해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치는 경우가 없도록 보안이 철저했어요.
기억에 남는 모뿔 사업으로 당시 씨름판의 4대 천왕 중 한 분인 나윤칠 장사입니다. 칠성동 씨름판 현장에 구경꾼들과 함께 잘 보이는 곳에 내가 서성거리면, 나윤칠이 나를 보고 찾아와, 쪽지 보고 돈을 주었어요. 나윤칠은 몽양 여운형 선생 경북 조문 대표도 역임하다가 이후 월북하여 6·25 때 상장으로 내려 온 것을 주위분들이 보았다고 해요.”

 

ㅡ 비상한 국면에는 비상한 방법으로 

 

대구경북은 현재 수구보수 세력의 아성이 되어 버렸지만, 해방공간에서는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다. 

 

또한, 황금수는 “해방공간에 대구경북의 운동을 대변한 신문은 민성일보(民聲日報)였는데, 민성일보가 우익들에 의해서 다이너마이트로 투척 공격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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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일보

 

민성일보는 1945년 9월 15일에 창간되어, 10월 3일의 '대구시보'나, 10월 11일의 '영남일보', 이듬해에 창간된 '남선경제신문'보다 먼저 창간된 신문이었다. 신문 제호가 ‘민중(인민)의 소리’란 뜻으로 지역지의 개념을 뛰어넘는 강한 논설로, 해방공간 잠시나마 대구에서 제일 많은 발행 부수를 기록한 신문이었다. ‘민성’의 초대 발행인 겸 사장은 황보집으로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의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참조: [사람을 찾아서](30)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황금수는 민청과 특수 임무 활동을 하면서 거마비를 받는 직업적 혁명가였다. 자연히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고, 해방공간이라는 비상한 국면에 비상한 방법으로 돌파한다. 아직은 밝힐 수 없지만, 재정 사업인 ‘모뿔’말고도 악질 사찰계 경찰과 극우 단체 지도부에 대한 응징 그리고 입산 교육 등이 있었다. 이런 특수활동은 이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도 일부 활용된다.  그래서 황금수는 조금만 공안의 압박이 심해도 피신했다.

 

1948년 처음 황금수는 체포된다. 45일 동안 경찰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석방된다. 그런데 석방한 이유가 석연치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아무리 소년이지만은 체포 당시 일을 생각하면 석방할 사안이 아닌데 이상하였어요.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병신노릇을 하다 보니, 안 맞을 매도 더 맞았어요. 
물론 조직을 위해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선 그 방법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교육을 받았어요. 선배들의 교육으로는 만일 고문에 못 이겨 실토하게 된다면, 자칫 나의 목숨뿐만 아니라 동지들의 목숨도 끝장일 수 있다고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했어요.
나중에 내가 성인이 되어 생각해보니, 당당하게 할 말은 하고 당당하게 싸울 걸 하고 생각도 들었지만, 당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어요. 어떻든 살아나가서 계속해서 활동하는 게 조직의 일원으로서 응당하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황금수와 함께 활동한 특수 활동 동지들은, 한 사람도 희생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보안이 철두철미하고 행동이 민첩하고 판단이 빨랐다. 

 

황금수는 석방되고 주변이 조여오자, 대구를 피해 부산으로 활동 공간을 옮긴다. 이후 그는 부산에도 지역이 좁다 보니 압박을 느껴, 서울 만리동과 인천 송현동에 아지트를 구해 놓고 이북으로의 탈출도 준비한다.

 

"당시 이북에서 사업하러 나온 일꾼들은 남쪽 동지들에 대한 탄압이 너무 극심하여 북으로의 송환을 준비하라는 분위기였어요. 또한 조직에서는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소문도 있었어요.
나는 서울 인천에서 여러 가지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데, 함께 활동한 권오연 선배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아마 부인이 부산에 살고 있는데, 방북 이후 문제를 정리하러 간 것 같았어요.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 또 그때 조건에서 연락도 쉽지 않고, 직접 부산으로 선을 찾으러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장질부사에 걸려요. 장염인데 피똥을 막 싸고 열이 나고 나중에는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앉으면 넘어질 정도로 체력이 소진되었어요. 한 달 가까이 장질부사를 앓는 동안에 6·25 전쟁이 터진 거예요.
내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 시내에 나오니 6·25 전쟁 발발하였다는 벽보가 붙어있어요. 그래서 부산에는 더 있을 수가 없고 해서 대구 집으로 돌아왔어요."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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