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ㅡ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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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사건 대책위가 꾸려지고 공동대표를 맡았던 문정현(앞줄 가운데) 신부와 함께 찍은 사진. 앞줄 문신부 옆 청색 옷을 입은분이 신동숙 여사이다 (사진=  4·9통일평화재단 이창훈 사료실장 )


혁명가의 아내로 부군 도예종 선생이 2차 인혁당사건으로 국가로부터 살인 당하자, 한평생을 진상규명과 대구 경북지역 자주민주통일운동의 원로로 활동하다 지난 1월 11일 신동숙 어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장례식은 13일 남대구전문장례식장에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중앙위원과 민족자주평화통일대구경북회의 상임위원 등에서 말해주듯 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경력에 걸맞게 <통일민주인사 신동숙 선생 추도식>으로 엄수되었다.

 

필자는 2000년대 초반 서울 동대문 이화여자대 부속 동대문병원에 입원해 있는 신동숙 여사를, 당시 사월혁명회 황건 상임의장과 문병하면서 정식 인사드리고 그때부터 어머니로 모셔왔다. 이후 어머니가 인혁당사건 재심 공판과 민족민주운동단체 행사로 서울에 오시면, 동행과 여러 가지 심부름을 도와드렸다. 

 

나중에는 어머니가 한 달에 한 번씩 대구 집에 와달라고 해서, 절에 요양 가신 해와 2021년 6월 요양원에 가기 전까지는 계속 정기적으로 필자는 찾아뵈었다. 주로 어머니는 부군 도예종 선생에 관한 이야기와 각종 운동 단체 행사 초대참여 여부 그리고 후원 등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의견과 자문을 필자에게 구했다.

 

필자는 2016년 1차 인혁당 관련 진술서 작성을 도와드리면서 신동숙 어머니에 대한 삶을 더욱 깊게 알게 됐다. 이 글은 어머니에 대한 삶의 조명과 당시 시대와 역사에 대한 규명이다. 

 

원래는 기고 예정이었으나 분량이 너무 많아 <사람을 찾아서> ‘여성 빨치산 지춘란’ 1탄에 이어 2탄으로 ‘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으로 몇 차례 나눠 격주 연재 예정이다.

 

ㅡ 신동숙, 부군 도예종 선생의 진상규명에 한평생 몸바치다.

 

신동숙은 부군 도예종 선생이 국가로부터 살인 당한 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으로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남편과 동지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는 일을 최우선에 놓고, 진상규명에 한평생 몸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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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종·신동숙 부부 생전 모습  (사진= 4·9 인혁열사 계승사업회)

 

1989년 4월 9일, 경북대 대강당에서 14년 만에 공개적으로 ‘4·9통일열사’ 추모제를 개최한다. 그러나 이전 1976년부터 1988년까지 8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4월 9일에, 신동숙 등 유족들은 대구시 수성구 파동 소재 ‘통인사’에서 여덟 열사의 제를 모셔왔다.

 

그리고 1998년 11월 9일,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이돈명, 문정현 공동대표, 김형태 집행위원장)’가 출범하면서, 신동숙 등 인혁당 유족들은 진상규명을 국가기관이 직권조사하게끔 압박한다.

 

1986년 8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가 창립되고 1998년 422일간의 천막농성 투쟁 끝에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2000~2005)가 만들어진다. 이 농성 투쟁에 신동숙 등 인혁당 유족들도 참여한다. 

 

그리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법적 조직적 기반이 되고, 미처 규명하지 못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으로 이월된다.

 

유가협과 신동숙 등 인혁당 유족들은 진실규명 운동과 국가 사과 그리고 명예 회복 등의 활동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마침내 ‘김대중 국민의 정부’ 때 2000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한상범 위원장)를, ‘노무현 참여정부’ 때 2004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2004~2007, 오충일 위원장),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2004~2007, 이종수 위원장),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5~2007, 이해동 위원장) 그리고 2005년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2005.~2007, 송기인 위원장)를 출범시켜 인혁당사건 등을 조사하고 규명케 한다. 

 

또한, 신동숙 등 인혁당 유족들은 사건에 관련되었던 당사자들, 종교계 그리고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이 인혁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도록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고 호소한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사건이었다’라고 마침내 밝히게 된다. 

 

2002년 12월 10일에는 인혁당사건 재심청구를 하게 되었고, 2005년 12월 27일 법원이 인혁당 재심을 결정하자, 그 이듬해인 2006년 3월 20일 재심 첫 공판이 열렸다. 

 

필자는 2005년 12월 재심 결정이 난 이후 무려 10여 차례에 걸치는 공판에 대부분 방청했다. 그리고 양심수후원회의 ‘후원회소식’ 2006년 7월 11일(통권177호), 2007년 2월 15일(통권184호)에 방청기를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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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인사  (사진=4·9통일평화재단 이창훈 사료실장 )

 

ㅡ 인혁당사건의 역사적 평가와 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필자가 2006년 7월에 기고한 양심수후원회의 후원회소식(통권177호) ‘인혁당 재심 4차공판을 보면서….’ 일부이다.

 

“최근 5·31 제4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에 편승해서 사회의 보수적 흐름이 보이는 가운데 지난달 25일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라는 시대를 역행하는 해괴망측한 단체가 나타났다. 1차적으로 남민전 사건과 인혁당 및 인혁당재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을 과거 공안 전문가, 전직 언론인 등으로 전문위원단을 구성하여 과거사위의 조사내용을 검증하겠다고 한다. 살인을 한 자가 감히 누구를 검증한다니 정말 소가 웃을 일이다. 

 

그런 가운데 7월 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4차 공판이 서초동 서울형사지법 320호에서 열렸다. 그러나 4차 공판도 2, 3차 공판과 마찬가지로 대구와 서울에 살고 있는 유족과 살아남은 사건 관련자만이 방청석을 채웠다. 잠깐 언론 집중 조명을 받으며 민민운동 진영이 다수 참여한 재심 첫 공판 때와는 현저하게 분위기가 다르게 조성되고 있었다. 

 

물론 현재 우리가 집중하고 투쟁해야 할 일들은 무척 많다. 7월은 특히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및 한·미 FTA 2차 협상 저지 등 긴장의 투쟁이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 정권시절의 국가살인을 밝혀내는 인혁당사건 방청투쟁의 중요성은 새삼 긴 말이 필요가 없다.

 

특히 인혁당사건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몇 가지 부분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1, 2차에 걸친 인혁당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권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조작사건 부분만 강조하다보니 여기에 연루되었던 활동가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야말로 금기사항이었다. 다행히 작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하경철)는 도예종 씨 등‘인혁당 재건위’사건 관련자 16명을‘민주화운동으로 유죄판결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했었다. 참여한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벌인 反유신활동 등 권위주의정권에 대한 항거행위를 ‘독재정권에 의해 침해된 민주헌정질서의 회복을 위해 수행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다.’고 밝힌 것이다. 

 

두 번째 현재 대부분 민주화운동관련 명예회복 및 보상이 80년 광주항쟁과 87년 이후 민주화운동에 집중되어있다. 하지만 인혁당사건에 참여한 인사들 대부분이 4월 혁명 이후 민자통, 민민청, 통민청에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던 인물이었음을 볼 때 이 사건은 자주·민주·통일로 대변되는 4·19혁명의 계승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80년대에서 머물고 있는 우리 운동의 역사를 60년대로까지 더 소급하여 완성시키기 위해 인혁당사건의 역사적 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80년대 운동이 갑자기 고양된 것이 아니라 이미 4·19 혁명의 자주·민주·통일운동의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검찰은‘김대중 전 대통령 내란음모 사건’재심의 경우 재판부에 아무 의견도 내지 않고 서둘러 심리를 종결했다. 그랬던 검찰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지? 만년 권력의 시녀였던 검찰이 현재 사회의 보수화 흐름을 틈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런 과잉 충성(?)의 의혹을 물리치고 이번 재심으로 검찰 과거사 청산의 효시로 삼길 바란다. 지난번‘재심사건 공판에 임하며’라는 제목의 보도 자료에서 ‘검찰은 공익의 대표자로서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재판에 임할 것’이라고 밝힌 바대로 검찰독립과 중립성을 지켜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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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만에 이뤄진 소원!  2005년 12월 인혁당 재심결정 직후 열린 기자회견  (사진 = 통일뉴스 )

 

ㅡ  4·9통일열사들은 가장 역동적인 진보적 지식인이자, 누구보다도 민족의 장래를 고민하고 치열하게 행동했던 분들이었다.

 

2007년 2월 필자가 기고한 양심수후원회의 후원회소식(통권184호)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 판결을 보고’ 일부이다. 

 

“저는 작년 7월, '인혁당 재건위사건 재심 4차 공판을 보면서'라는 글을 소식지 (177호)에 쓰면서 「…젊은 검사가 그 엄혹한 시대를 어떻게 알고 중인 신문을 할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하겠다. 많은 회원분들의 동참 방청투쟁을 기대한다」고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잠깐 집중조명을 받으며 민족민주운동 진영이 다수 참여한 재심 첫 공판 때와는 달리 그 후로는 대구와 서울에 살고 있는 유족과 살아남은 사건 관련자만이 방청석을 채웠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15차례나 되는 재심 공판에서도 설마했지만 방청자 면면은 똑같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현재 집중하고 투쟁해야 할 일들이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시절의 국가살인을 밝혀내는 인혁당사건 방청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는 새삼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국가살인 정권의 잔당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대선 유력후보로 미국추종 반통일 한나라당이 부각되는 상황에서, 이들의 죄과를 폭로하는 방청투쟁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청투쟁을 통해 저들의 악랄함을 똑똑히 파헤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결과는 검찰이 30일 항소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지난 1월 23일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만 27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중 「익명을 요구한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사회적 상황이 바뀌면 ‘인혁당 재건위 재심 판결은 일개 지방법원의 판결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리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눈치 보다가 마지못해 검찰독립과 중립성을 부르짖던 검찰이 대선 후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제일 먼저 권력에 야합하며 권력의 시녀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제성호라는 자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전혀 범죄사실이 없는데 범죄를 뒤집어씌운 조작사건 내지 정치공작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법원의 재심결과를 다시 재심해야 한다’ 운운한 것은 최근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의 여론 지지율에 고무되어 과거 권력의 뒤를 이은 유신지지, 신군부지지 선언을 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는 듯해 너무나도 애처롭습니다.

 

‘사법살인’이라고 국가는 사법부에 책임을 전가했지만 이것은 ‘사법살인’이 아니라 바로 ‘국가살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유신살인’인 것입니다. 지금 그 아류들 후예들의 정당인 미국추종 반통일 한나라당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정권을 잡은 양 거들먹거리고 있습니다.

 

32년 만에 무죄판결이 되었다고 자축할 때가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우리의 투쟁의 전취물을 분열로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올해는 우리가 겨우 이 정도로라도 지켜낸 자주민주통일의 전취물을 보다 굳건히 지킬 수 있는 시금석인 대선이 있는 중요한 한해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방법으로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결코 미국추종 반통일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되돌아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민족의 내일과 6·15공동선언에 중심을 놓고 전민족이 완전히 통일단결하여 반보수대연합으로 대선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이번에 무죄판결을 받은 분들은 그 당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역동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이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누구보다도 민족의 장래를 고민하고 치열하게 행동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고인들의 자주민주통일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여 다시는 이 땅에 또다시 피를 뿌리는 야만의 정권이 탄생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때 실종자 가족 모임인 ‘5월광장 어머니회’의 강령은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 집회 모습.png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 집회 모습

 

첫째, 우리의 자식들은 죽은 것이 아니고 현재의 민주화운동 속에 살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체 발굴을 거부한다. 모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이 모두 우리 자식들이다.

 

둘째, 우리는 어떠한 기념물 건립도 반대한다. 기념물 건립은 우리 자식들의 민주화 투쟁 정신을 화석화시켜 건축물과 돌 속에 가두는 것이다. 우리 자식들의 정신은 기념물이 아니라 현재의 투쟁을 통해 기념되고 계승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어떠한 금전 보상도 거부한다. 생명은 생명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지 어떠한 금전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 금전 보상은 인간의 생명을 금전으로 격하시키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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