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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34)”에서 지면 부족으로 쓰지 못한 ‘코리아 전범재판’의 평결문 일부이다.
“국제전범재판 재판부는 제출된 증거에 기초하여 피고가 유죄임을 평결한다.
(중략)
3. 재판부는 1953년 7월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간 중에 미국이 국제법을 위반하여 남한/남조선에 핵무기의 지원을 받는 강력한 군사력을 계속 유지해왔으며 또한 한국인/조선인들의 통일의지를 방해하려고 기도해왔다고 평결한다.
군대의 점령에는 한국/조선 여성에 대한 조직적인 성착취가 수반되어, 법 위에 군림한다는 생각을 가진 미국 군인들에 의한 폭행과 심지어 살인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이 부과한 경제제재는 북한/북조선 주민들을 가난하고 허약하게 만들어 결국 평균수명의 감소, 광범위한 영양실조, 그리고 한때 식량을 수출하던 이 나라에 기아 사태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본 재판에 참석하려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에게 비자 발급을 거부한 것은 자기들이 학대한 사람들을 격리시켜 세계에 진실을 밝히지 못하도록 하려는 범죄적 의도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 모든 55년 동안에 미국 정부는 군사개입, 점령, 그리고 한국/조선인들을 상대로 한 범죄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얻기 위해 언론과 매스컴 보도를 조직적으로 조작, 통제, 지시, 오도 및 제한해 왔다.
미국 정부는 또한 한국/조선인에 대한 잔혹행위와 민족근절 정책을 범하거나 또는 받아들일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기 위해 미국 군대와 일반 주민들간에 인종주의적 태도를 고취해 왔다.
미국 정부는 한/조선반도에 자신의 의지를 실행해 보겠다는 무법적인 결의에서 미국 헌법, 전쟁과 군대에 대한 권한위임법, 권리장전, 유엔 헌장, 국제법, 그리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법률을 위반해 왔다.
코리아 전범재판 재판부는 미국정부와 그 지도자들에게 이들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판정하면서 유죄로 밝혀진 자들을 가장 강력한 어조로 규탄하는 바이다.
그리고 권고 일부이다.
재판부는 북한/북조선에 대해 반인도적 범죄의 속행에 해당하는 모든 수출금지, 제재 및 처벌을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
(중략)
재판부는 또한 한국/조선인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통일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미국의 모든 개입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재판부는 미국 정부가 1946년 7월 이래 미국이 한국/조선에서 저지른 범죄와 불법행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코리아 국제전범재판 최종판결문은 2001년 7월 6일 자 통일뉴스에 있다.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678)
ㅡ 황금수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의 오류와 사실 ③
1969년 지춘란과 결혼한 황금수는 지춘란과 마찬가지로 1950년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행위)로 구속된다. 6·25전쟁은 계엄 하였기에, 각 지역에 설치된 군사법원은 민간인에 대한 일부 재판을 미군정 악법인 「국방경비법」으로 처벌했다. (참조: [사람을 찾아서](26) 지춘란, 국방경비법으로 사형 선고받다)
그런데 황금수의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 전과 관계 중 “50.9.20 국경법 징역 2년 54.10.16 국경법 32조위반”은 오류로 잘못 기록됐다. (참조 : [사람을 찾아서] (31) 준비되지 않는 싸움은 진다)
황금수는 국방경비법(국경법)으로 2번이 아니라 1950년 9월 20일 1번 징역을 산다.
그리고 당시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황금수는 증언한다.
“6·25전쟁은 전시 계엄 상황이기 때문에 정치범은 군사재판으로 국방경비법, 소위 모든 정치범은 국방경비법 32조 이적죄의 적용을 받았어요. 그리고 재판은 열을 세 줄로 세워 앞줄은 사형, 둘째 줄은 무기 그리고 셋째 줄은 몇 년형을 주는 그야말로 법 적용이 엉망이었습니다.
다행히 나는 소년으로 분류되어 셋째 줄에 사람도 별로 없는데…. 있게 되어 3년 형을 받고 1953년 7월 경에 출소합니다.”
황금수는 출소 후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일을 하나, 당국의 감시가 심해 서울로 올라온다. 이때 기거한 곳이 김영한의 집이었다. 김영한은 황금수가 대구형무소에서 동지적 관계를 맺은, 십 년 연배인 교사 출신 김해암의 제자였다.
김해암은 황금수가 어린 나이임에도 감옥에서, 수감 중인 두 부류의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을 보고, 훈련받은 운동가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당시 대구형무소는 앵무새처럼 쉴 새 없이 말하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등 두 부류 사람으로 구분되었는데, 황금수는 매일 두 부류의 사람을 교대로 의장을 세우고 회의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모두 능숙하게 회의를 주최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지켜본 김해암은 출소 후 제자 중에 의식이 있고 영어도 잘하는, 김영한을 연배가 같은 황금수에게 소개한다.
김해암은 대구 신암동에 있는 대구공업중학교 사회과 선생으로 본성은 허씨인데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경성제대에서 해방 후 학생운동의 간부로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운동’ 등을 하였다고 한다.
미군정은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노동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총연맹, 남조선민주여성동맹, 민주애국청년동맹 등 대중운동단체뿐만 아니라 교육 부문에도 미군정과 대립하는 세력은 좌익으로 몰아붙여 무차별적인 탄압을 했다.
또한 미군정 남쪽 교육의 기본 방침은 반공 체제 구축과 소위 자유민주주의 제도화였다.
1946년 교육 정책을 관장하는 미군정청 학무국은, 일본강점기의 여러 단과대학을 통폐합하여 단일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안을 발표하자 ‘국대안 반대운동’이 전국을 강타한다.
ㅡ 미군정은 ‘국대안 반대운동’을 좌·우익 대결로 몰아가며 탄압한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제1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국대안 반대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미군정은 46년 3월 30일 ‘무허가 학교 폐쇄령’을 공포하여 민족적이고 진보적 성향의 학교, 학원, 강습회를 폐쇄하였다. 또 미군정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문명퇴치운동마저 금지시켰는데, 이는 좌익이 문명퇴치를 ‘정치이데올로기를 침투시키기 위한 기초공작’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에 서울의 17개 학교 학생들이 궐기하여 ‘무허가 학교 폐쇄령 반대!’ ‘친일 악질 반동 교원 추방’ 등의 구호를 내걸고 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에 참가한 학생 수는 미 군정청 발표만으로도 4만 명 이상에 달했다.
무허가 학교라는 이유로 강제 폐쇄를 당한 서울 법정대학의 학생들은 4월 6일 미 군정청 청사 앞에서 항의 성명문을 낭독하고 연좌농성을 벌였지만, 미군정은 학생 600명 전원을 검거하는 등 강경 대응하였다. 미군정청은 ‘군사점령의 목적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모든 교사들’에 대한 해임에도 열성을 보여 미군정 3년 간 남한에서 해직된 교육자 수는 1천100명에 이르렀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2월까지 7개월 간에 걸쳐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른바 ‘국립서울종합대학안(국대안)’ 파동은 교육 영역이 그렇게 이념적·정치적 논란의 주요 이슈로 등장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중략)
8월 22일 미군정은 군정법령으로 국대안법을 확정 공포하면서 총장과 교무처장을 임명하였는데, 국대안도 문제였지만 이들이 모두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감정적 거부감을 낳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서울대 초대 총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이미 경성대 총장을 지낸 해리 엔스테드로 해군에서 군목을 맡았던 대위였으며, 교무처장은 연희전문의 호레이스 언더우드였다. 엔스테드가 법학박사라곤 하지만, 일개 해군 대위가 최초이자 최고의 국립대학 총장이 된다는 건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국대안에 반대하는 학생 등의 요구를 무시하고 미군정이 정치적으로 변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대안에 반대하는 학생들은 46년 9월 등록을 거부하고 동맹휴학(맹휴)에 들어가면서 친일교수 배척, 경찰의 학원 간섭 정지, 집회 허가제 폐지, 국립대 행정권 일체를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 대체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국대안 반대운동은 정치적 상황과 긴밀히 관련되어 좌·우익 대결의 구도로 비화되었다.”
탄압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황금수는 자동차 운전수를 하면서 김영한의 집에 기거한다. 그리고 4월혁명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사회당과 통민청에 관여한다.
ㅡ 황금수, 4월혁명공간 청년운동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에 가담하다
황금수의 통민청과 김영한에 관한 증언이다.
“내가 김영한 동지하고 한 집에서 생활을 같이했어요. 그때 김영한은 실업 상태에 있었고, 나는 자동차 운전수를 하면서 생활을 담당하는 입장입니다.
그때 김영한은 통민청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었고, 그는 활동 결과를 나한테 이야기를 하고, 나는 결과를 듣고 서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당시 나는 앞에 나가서 구체적으로 통민청 일에 관여하지 않았어요.
이유는 나는 자동차 운전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노동, 사회당 노동쪽에 일했습니다. 나중에는 사회당 노동부장과 민자통 노동위원장도 합니다.
그리고 그때 김영한 생각은 내가 앞에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었고. 그것은 소위 과거 나의 전력 뭐 이런 것들 때문에, 만일을 위해 후과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통민청이 먼저 조직된 것이 아니고, 사회당 혁신정당운동이 발전하면서 청년조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전위조직으로 진보적인 청년운동 조직, 통민청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사회당에 참여하고 있는 나 자신도 청년이었기에, 통민청 건설을 하는 데 나도 이제 관여를 합니다. 당시 청년운동 통민청을 지도한 분은 최백근 선생입니다, 통민청을 조직하기 위해서 회합할 때, 회합 장소가 마포 쪽에 있는 우홍선 집을 이용했어요. 그때 많은 청년 운동가들이 통민청, 통일민주청년동맹을 내오게 되었다고 봅니다.
당시 청년운동은 통민청과 민주민족청년동맹 민민청이 있는데, 통민청은 사회당을 위시해서 서울 중심으로 그리고 부산 중심으로는 부산대 이종률 교수를 중심으로 민민청이 만들어집니다”
전상봉은 『한국 근현대 청년운동사』(두리미디어, 2004)에서 민민청에 대해 나름 정리했다.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은 1955년 부산지역 고등학생들의 서클인 암장에서 활동했던 청년들과 1956년 진보당의 외곽조직으로 부산에서 결성되었던 성민학회(醒民學會)를 모태로 탄생하였다.
(중략)
1957년 근거지를 서울로 옮긴 성민학회 멤버들은 4·19직후 부산과 대구 출신의 청년들과 함께 1960년 6월 12일 민민청을 결성하였다. 민민청은 위원장에 서도원, 간사장에 김금수를 선출하였다. 결성 당시 민민청에 참가한 주요 인사들은 김상찬, 서도원, 도예종, 김금수, 하상연, 이수병, 안상진, 박영섭, 김종대, 박준기(필자 정정 박중기), 김달수 등이었다.”
그러나 전상봉의 저서는 민민청에서 활동했던 인사 중, 5·16쿠데타 이후 2차 인혁당사건에 연루된 ‘암장’을 주목하면서, 당시 부산 경남 지역 청년운동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여 아쉬운 부분이 있다. 또한, 성민학회 성원은 통민청에 활동하는 인사들이 주류였는데, 민민청에 포함한 것은 오류이다.
ㅡ 4월혁명 공간의 전위조직 민민청과 통민청
같은 책에 전상봉은 통민청에 대해서도 나름 정리했다.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1958년 9월 서울에서 결성된 통일청년회를 모태로 한다. 통일청년회는 울산 출신 자유당 국회의원 김수선의 비서로 있던 김영광의 주도 하에 구성된 청년들의 모임이었다.
통일청년회는 4월혁명 직후 정치적으로 확대된 공간에서 새로운 조직진로를 모색하였고 이즈음 서울대 출신 청년활동가들이 가세하여 통민청을 결성하게 되었다.
1960년 결성된 통민청은 위원장에 우홍선(禹洪善, 본명 : 우동읍 禹東邑), 간사장에 김영광을 선출하였다. 당시 통민청에 참가한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우홍선, 최일, 김배영, 김영광, 양춘우, 이재문, 최상진, 유민수, 유찬우, 김재봉, 이규영, 진병호, 박익수 등이다.”
민민청과 마찬가지로 전상봉의 저서는 통민청을 서울 중앙 위주로 정리했다. 사실 통민청 결성 이전에 부산 경남과 광주 전남 지역에는 서클 수준의 청년운동이 있었다. 특히 당시 부산 진보당 외곽조직인 성민학회 활동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조직을 만들려고 활동한 ‘김배영’에 관한 연구가 부족한 부분이 아쉽다.
또한 통민청 활동 인사 중에는, 5·16쿠데타 이후 1, 2차 인혁당사건과 남민전에 연루된 분들이 주요 인물에서 빠져있다.
통일청년회 성원으로 통민청 조직 건설의 흐름을 가장 잘 아는 분은, 사회당 당무부장이자 통민청 성원인 김영옥이다. 그의 구체적 증언이다.
“통민청의 토대는 통일청년웅변학원과 통일청년회 그리고 서울대 신진회 학생그룹입니다. 통일청년회는 부산의 성민학회와도 연결됩니다.
통일청년웅변학원은 당시 울산 출신 국회의원 김수선의 비서를 한 진보적 성향의 김영광이 학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중심에서 활동합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학생들, 운동하는 학생 중 법대 최상진, 문리대 양춘우, 유민수 유찬우 이런 사람이 통일청년회 라고 하는 소그룹, 공개된 조직은 아니고. 소그룹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4·19 이후에 통민청을 만드는 토대가 된 것입니다.
즉 부산의 성민학회와 서울의 통일청년회 그리고 서울대학교 신진회 그룹하고 함께 해서 통민청이 만들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성민학회는 실질적으로 통일청년회 하고 함께 합니다. 그때 성민학회는 김배영, 김재봉 이런 분들이 활동하는데, 성민학회를 해체하고 통일청년회 활동을 같이한 것은 아닙니다. 성민학회는 성민학회 대로 있으면서 통일청년회 하고 함께 한 것입니다.”
민민청과 통민청은 4월혁명 공간에서 전위조직이었다.
1960년 9월 3일에 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발기, ‘자주·민주·통일’의 3대 원칙에 입각한 통일 방안을 발표하면서 통일 운동이 크게 활성화될 때부터 실무 조직 등 중추적 역할을 한다.
또한, 11월과 12월에 주요 대학에서 민족통일학생연맹이 결성될 때에도, 민민청과 통민청 일꾼 중 핵심은 학연과 연고 중심으로 대학별로 분담되어 활동한다.
특히 민민청과 통민청은, 4월혁명공간의 위대한 3대 투쟁인 2·8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과 2대 악법(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반대 투쟁 그리고 남북학생회담 성사투쟁 등을 실무 조직하며 견인해 낸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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