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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세계 주요한 사건의 현장 활동가이자 반전운동가로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인 타리크 알리는 『1960년대 자서전』에서 6·25전쟁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한국전쟁은 처음부터 법적 신비화의 망에 싸여 있었다.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
누가 먼저 38선(북한과 남한 사이의 분할선)을 넘었는가?
실제로 이 전쟁은 중국의 물결을 돌리기 위해 미국이 시도한 것이었고, 클레멘트 애틀리 노동자 정부가 후원했다.”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는 영국 노동당의 당수로 1945년 7월부터 1951년 10월까지 총리를 역임하며, 6·25전쟁 당시 영국군을 파병했다.
황금수는 부산에서 한 달 가까이 장질부사를 앓는 동안에 6·25 전쟁이 터진 것을 벽보를 보고 알게 된다.
ㅡ 고문에 이기기 위해 모든 기억을 다 지우다.
황금수는 부산에서 더 있을 수가 없고 해서, 천신만고 끝에 겨우 대구집으로 온다. 그러나 권오연 동지의 친구인 대구 서문시장 건어물 사장이, 동생 일로 가게를 빼앗기게 될 상황이 발생하자, 황금수를 운동 조직원 활동을 하였다고 밀고한다.
특무대에서 황금수는 조사를 받았지만 일절 운동에 관계되는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체포 시 여러 가지 조사에 응하는 방법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재우기 등 각종 고문과 매타작을 당하였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황금수의 고문 증언이다.
“비합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다 보면. 특히 47년 이후 남쪽에 운동이 그때까지는 합법적인 운동이었는데, 그 운동이 다 무너지면서 무척 희생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운동조직이 다 파괴되다시피 했고, 그래서 극히 소수 정예세력이 그러한 엄혹한 시기에 그들과 대항해서 싸움을 했는데, 그때는 검거되면 무척 심한 고문을 당하고. 고문당하다가 죽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엄중한 시기에 운동하다 보니까. 고문을 당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길 수 있는, 그런 것을 갖기 위해서 모든 기억을 다 지우는 방법을 그때 사용합니다. 선배 동지들과 그런 방법을 많이 이야기했고, 나 자신도 아주 힘들고 어려운 경우를 감당해야 하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보 이야기를 만들어 병신 흉내를 내며 끝까지 버팁니다. 그러면 참 극단적인 상황까지 저들은 몰고 갑니다.
당시 사람을 두들겨 패서 죽이는 거를 그놈들은 보통으로 여기고…. 형무소 안에서 저녁 시간이 되면 몽둥이를 맞아서 고통스러워하는 신음 소리와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와 미칠 지경입니다.
그리고 이놈들이 방마다 신음 소리가 나니까, 나중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겨울에 물을 말이지, 찬물을 온몸에 끼얹으면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요. 그리고 매타작 고문을 하면, 훡~훡~ 이런 말이지 목쉬는 소리만 나고, 나중에는 목소리가 나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에 들릴 정도의 소리가 나오질 않아요. 목이 한기를 입으면.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그렇게 심한 고문을 하고 정말 악독한 자들이었어요.
회유와 고문에 이기지 못해 안 한 것을 했다고 거짓으로 증언하면, 이놈들은 한 것으로 만들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죽입니다.
이미 나는 이런 내용을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왜 지문 찍느냐고 거절했어요. 그러면 이놈들이 사정없이 몽둥이찜질을 하였지만,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이후 이런 심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황금수는 나중에 삼차 신경통을 앓게 된다.
ㅡ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비신스키의 한국 정부 집단학살에 대한 항의
6·25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의 집단학살은 국제적인 문제를 야기시켰다.
소련 외무부 장관이자 유엔 소련 대표였던 안드레이 비신스키(Andrey Vyshinsky, 1883 ~1954)는, 유엔에서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에 대해 자주 신랄한 언어적 공격을 가해 독설가(毒舌家)로 유명했다. 특히 이승만 정부의 집단학살 문제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하며 즉시 중지를 요구합니다.
황금수의 증언이다.
“고문으로 사람이 죽으면 트럭의 짐칸에 실어다가, 싣고 가서 광산이나 구덩이 파서 갖다 밀어 넣었어요. 그때까지 죽지 않은 사람은, 거기서 총살해서 넣습니다. 그 장면은 난 못 받지만…. 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그 당시에 우리가 들어서 알기로는 소련 주 유엔대사 비신스키(Vyshinsky). 그때로서는 비신스키가 유명한 독설가로 알려졌어요. 유엔 활동을 많이 하던 비신스키가 한국에 무고한 죄 없는 양민들을 대량 학살을 하고 있다. 그 뒤에는 미국이 있다. 즉시 중지하라. 유엔총회에서 그렇게 막 폭로하는 바람에….
미국 놈들이 비신스키의 항의를 받자, 이승만이한테 전통으로 명령을 해서. 그동안 막 무작위로 불러내서 트럭에 싣고 가서 학살하는. 그런 행위가 마지막에는 진정이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많은 사람이 부산 쪽으로 이감도 가고 그랬어요.”
6·25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한 집단학살은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 보도연맹) 가입자에 대한 것이었다. 보도연맹은 창설 당시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았다. 먼저 중앙본부가 창설되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시연맹과 이후 각 도 단위의 지방지부가 결성된다.
보도연맹은 악질 친일반공검사 오제도의 제안에 따라, 1949년 6월 5일 서울시 시공간(市公館)에서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 선포대회’를 개최하면서 조직의 창설을 선포했다.
‘보도(保導)’는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뜻으로, 본래 전향한 좌익 인사들을 대상으로 사상교육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좌익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가입하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지역별로 모집 할당까지 내려가며 확대하려 하면서, 지주 대신 머슴이 또는 보리쌀과 비료를 받기 위해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입한 민간인도 상당수있었다. 당시 보도연맹원의 규모는 대략 30만 명 전후로 추산된다.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휴머니스트, 2010)에서 김선호는 ‘국민보도연맹, 과연 전향자단체인가’ 연구 논문에서 법적 근거가 없는 관변단체였음을 밝힌다.
“즉 보도연맹은 어떤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오제도 검사의 제안에 따라 정부관계자·사회지도자들의 동의를 거쳐 만들어진 관변단체였다. 이 같은 보도연맹의 법외(法外)적 성격은 보도연맹운영의 파행을 야기한 근본 원인이었다.”
ㅡ 일제강점기가 기원인 보도연맹
보도연맹과 유사한 단체는 일제강점기 때도 있었다.
김선호는 같은 연구 논문에서 보도연맹의 기원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일제는 조선의 전향자들을 사상보국전선에 동원하기 위해 1938년 7월 24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이하 ’사상보국연맹‘이라 약칭’을 결성한 바 있다. 사상보국연맹의 주요 사업은 각 관찰소와 협력하여 비전향자를 포섭하고, 전향자의 생업을 도모하여 재범의 우려를 없애며, 궁극적으로는 황도선양·내선일체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 기구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1941년 1월 사상보국연맹을 발전적으로 해산한 후 재단법인 ‘대화숙(大和塾)’으로 통합했다. 대화숙은 일본정신 함양과 내선일체 강화, 전향자의 선도·보호를 주된 사업으로 하고 있었다.
보도연맹과 사상보국연맹·대화숙은 모두 좌익전향자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며, 단체의 성격상 좌익전향자에 대한 선도·보호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사상보국연맹이 대화숙으로 통합되면서 법적 근거를 가진 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었음에 비해 보도연맹은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관변단체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단체의 성격만이 아니다. ‘보도연맹’이란 단체명도 이미 일제강점기 때에 있었다. 일제는 1927년 9월부터 1939년 9월 13일까지 조선 전역에 이른바 ‘교외교호보도연맹(校外敎護保導聯盟)’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중략)
단, 교외교도보도연맹은 학생만을 가맹대상으로 설정했고, 결성 목적도 학생들의 교외 생활을 보도(保導)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전향자 보도를 목적으로 내세웠던 보도연맹과는 차이가 있다.
즉 국민보도연맹은 정부 수립 이후 결성되었지만, 그 조직의 성격과 명칭은 일제시대의 사상보국연맹·대화숙·교외교도보도연맹 등을 모델로 했음을 알 수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 했다.
“현재 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 추산되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 정도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위원회에서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전술한 것과 같이 군사정권이 대대적으로 관련 기록을 소각시키면서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고 한다.”<나무위키, 보도연맹학살사건>
집단학살은 보도연맹뿐만 아니라 군경의 민간인학살과 부역자 학살 그리고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이 있다.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최소 4천여 명에서 많게는 7천여 명까지 학살돼 묻힌 곳으로 6.25 전쟁 시기 대한민국 내 단일지역 최대 규모 희생지다.”<나무위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또한, 미군 폭격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도 있다.(참조: [사람을 찾아서](12) 미군의 융단폭격과 민간인 학살)
ㅡ 반공용사와 빨갱이 그리고 ‘골로 보낸다’
6·25전쟁 때 생긴 말 가운데 ‘골로 보낸다’라는 말이 있다.
학살하기 위해 주로 산골짜기로 데려가, 총살 또는 생매장했기 때문에 생긴 말로 죽인다는 뜻이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2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민간인학살에 대해 김동춘 교수의 저서를 인용해 역사적·문화적 기반이 있다고 설명했다.
“ ‘골로 간다’는 말이 시사하듯이, 한국전쟁은 ‘2원 전쟁’이었다.
군인들끼리 싸운 전쟁이 그 하나라면 또 하나의 전쟁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저질러졌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었다.
김동춘은 한국전쟁시의 상호 폭력은 국가의 폭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문화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한국의 농촌공동체는 씨족집단, 동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경우 한 개인의 타인에 대한 폭력은 개인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씨족간의 대립으로 비화된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보다는 혈육의 정에 기초한 증오감이 폭력의 기반이 된다.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폭력과 보복의 행사는 대단히 감정 개입적이고 잔인한 양상을 띤다.’ ”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서중석 교수의 저서를 인용해 반공과 빨갱이에 관해 설명했다.
“신문사를 습격하건, 법원에 난입하건, 공공집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건, 정치인을 백주에 테러하건, ‘반공용사’들이 했다고 하면 붙잡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위건 ‘나는 반공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만 하면 그것에 저항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반면에 극우반공 이데올로기의 주창자들이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을 비판하고, 그 자들을 분석하고 ‘그 자들이 친일파요 반민족 세력으로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사람에 대해서 ‘저 놈은 반공을 반대하는 놈, 국시를 위반하는 놈’이라는 말 한마디만 떨어지면, 그 사람은 정치권에서 매장되고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형대에까지 올라가야 하는 어려운 사회 환경이 조성되는 겁니다.
양민학살도 무척 많았습니다만, 빨갱이라는 이유를 붙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하고 갖은 피해를 입으며 숨죽이며 살아왔습니까.”
미 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반전평화주의자 램지 클라크는 ‘코리아 전범재판’에서 “미국에서 6·25전쟁은 ‘잃어버린 전쟁’으로 불린다”며 민간인이 몰살당한 전쟁을 국제사회가 잊어버리고 있다며 개탄했다.
ㅡ 6·25전쟁은 미국의 인종말살전쟁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는 2021년 6월 24일 새벽(한국 시각) 미국 뉴욕인터처치센터에서 역사적인 ‘코리아 전범재판’을 열고, 6·25전쟁 당시 각종 전쟁범죄의 주범으로 지목된 미국 정부를 전쟁 발발 51년 만에 단죄했다.
<한겨레21> 365호(2001-06-28)는 ‘트루먼에게 유죄를 선고함’이라는 기사에서 6·25전쟁은 미국의 인종말살전쟁이라고 규명했다.
“1945년 해리 트루먼 이후 조지 부시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모든 대통령과 국무·국방장관, 각급 정보기관의 책임자 및 주한미군 사령관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12시간에 걸친 긴 재판 끝에 배심원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최강대국 미국 정부를 이끌어온 책임자들을 단죄했다. 피고들의 죄명은 ‘민간인학살’을 비롯한 반인류적 전쟁범죄행위.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곳은 한반도였다.
(중략)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유족 등 남쪽 참석자 60여명을 비롯해 미국, 일본, 캐나다의 해외동포들과 세계 각국 민간단체 활동가 등 700여명이 미국 정부가 징죄당하는 역사적인 현장을 감격 속에 지켜보았다.
전 미국 법무장관이자 세계적인 반전평화운동가인 램지 클라크는 이날 공동검사단의 수석검사 자격으로 기소문을 발표하고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300만명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45년 해방 직후 지금까지 세계인권헌장과 조약, 각종 국제규약 및 협정, 미국과 한국, 북한의 법 등을 모두 위반하며 각종 범죄를 한반도에서 저질렀다”며 “평화와 인권과 민족의 자존을 존중하는 국제규약의 이름으로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한국전에 참가한 13개국을 비롯해 전세계 18개국 출신 26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평결문에서 “각종 국제규약을 준거로 하고 각종 증언과 서류증거 및 전문가들의 보고서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한국전쟁 당시와 이를 전후한 민간인학살 등 피고인들의 유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중략)
비록 법적 구속력이 없는 민간법정인데다 피고로 지목된 대부분의 미국 정부 요인들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지만, 미국이 한국전쟁 때 저지른 범죄들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공개됐다는 점에서 이날의 법정은 법전 너머의 가치를 갖고 있다.
이번 행사를 공동주관한 국제행동센터(IAC) 브라이언 베커 의장은 “우리가 하는 일은 ‘사실’을 알리는 일”이라며 “ ‘한민족에게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도록 하라’(Let the Korea Be the Korea)는 것이 이번 재판의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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