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창영(시인, 문학박사)
등록일 : 2025.06.26
자화상.png.jpg
 

 

한 편의 시는 유기체(有機體)다. 각 부분이 하나의 목적 아래에 있으면서 부분과 전체가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조직체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머리, 몸통, 사지가 각기 모양과 기능이 다르면서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시의 각 부분도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 

 

시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다를 바 없거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면 잘 익은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시에서 하나의 단어나 문구가 배치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각 부분은 존재하는 만큼 저마다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전체에 부합해야 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사진=부산일보).png
(사진=부산일보)

 

이 시에서 화자는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자화상을 연출한다. 대표적인 소재로 우물이 있고, 그에 인접한 요소들로 달, 구름, 하늘, 바람이 등장한다. 그러한 배경 속에 시적 주인공인 사나이의 모습이 여러 측면으로 그려진다. 마주하자니 밉고, 외면하자니 가엾고, 다시 보면 또 미운 자신의 모습, 결국 그 모습 그대로 그리워지기도 하는 복잡한 심사가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은 유기적으로 잘 연관되어 있다. 1연에는 우물이 등장하는데, 시 전체를 관통하는 '우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적 화자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우물 속에 비친 '사나이'는 곧 화자 자신이며, 우물은 화자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유기적인 통로 역할을 한다. 

 

우물의 위치 또한 중요하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곳, 즉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공간이다. 세상사에서 떨어져 오직 자신만 비춰 볼 수 있는 외딴 곳은 스스로 성찰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렇듯 장소 또한 시의 주제에 맞추어 유기적으로 결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에 비친 자화상.png.jpg

 

2연에 나오는 인접한 요소들도 시적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 풍경을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우물 속에 비치는 밝은 달, 흐르는 구름, 펼쳐진 하늘 그리고 바람 부는 가을 풍경은 3연에 등장하는 화자에게 무언으로 성찰을 촉구하는 듯하다. 달, 구름, 하늘, 바람 그리고 계절은 순리대로 흐르는데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 앞에 서 있는지 생각해 보면 웬지 떳떳하지도 않고 어쩐지 미워질 법도 하다.

 

4~5연에 등장하는 화자의 행동 역시 복잡한 심사를 잘 드러낸다. 자신의 모습을 보면 미워지고, 그래서 돌아가다 보면 가엾은 마음이 들고, 그래서 되돌아가 우물을 다시 들여다보는 행위 속에 독자 또한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간다. 밉고도 가엾지만 버릴 수 없는 자신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니 그 모습 그대로 그리워질 수밖에……. 이러한 감정 변화는 일제강점기라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순수함을 두고 고뇌하는 시인의 내면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6연에서는 앞서 그려진 풍경을 정리하고 있는데 사나이의 모습 앞에 추가된 ‘추억처럼’이라는 단어가 돋보인다. 추억은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다. 사나이의 모습이 성에 차지 않지만 엄연히 그 모습으로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과의 화해일 수도 있다. 

 

나아가, 뭔가 새로운 자신이 되겠다는 각오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전까지의 자신은 추억처럼 남겨 두고 이전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새로운 결의가 숨어 있음을 짐작하게도 한다. 시인의 생각을 명확히 언급하는 대신 ‘추억처럼’이라는 한 마디 말로 변화를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독자가 생각할 여지를 열어 두었기에 긴 여운이 남는다.

 

이 시는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시적 화자의 복잡한 내면과 자아 성찰의 과정을 매우 자연스럽고 깊이 있게 드러낸다. 어느 한 군데를 뺀다면 그만큼 불완전할 것이요, 무언가 보탠다면 사족이 될 것이다. 그만큼 시의 모든 구성 요소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유기적 연관성'을 잘 구현하고 있다. 

 

시는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살아 있는 유기체다. 시를 창작할 때는 각 요소들, 즉 이미지, 시어, 운율, 구조, 화자의 심리 등이 유기적으로 연관되도록 해야 한다. 유기적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적합한 소재와 제재를 선택하고, 잘 어울리는 배경을 설정하며, 적절한 단어와 표현으로 분위기와 행위를 묘사해 주어야 한다. 각각의 요소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나타내고 느낌을 자아낼 때 그 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감동을 주고 오래 사랑받게 된다.

 

지창영 시인.jpg
지창영 시인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연재

초보자를 위한 시창작 강의(22)ㅡ 유기적 연관성

2025.06.26

역사

마르크스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제1회)

2025.06.25

연재

신동숙(7)ㅡ 일본 침략과 항일투쟁 그리고 을사늑약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06.21

교양

[시] 한 표, 투 표

2025.06.08

연재

지춘란(40)ㅡ 조선 입북과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

: 사람을 찾아서

2025.05.29

연재

신동숙 (6회)ㅡ스페인인민전선과 프랑코 군사쿠데타 그리고 과거청산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05.14

교양

[시] 청개구리

2025.05.04

연재

지춘란 (39)ㅡ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람, 동지

: 사람을 찾아서

2025.05.02

교양

[책소개] 변창기 노동자시인의 ‘붉은 노동’

2025.05.01

교양

[노동시] 근로자의 날을 거부한다

2025.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