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 사람을 찾아서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5.29
황금수 선생(사진 오른쪽).jpg
수암 최백근 선생 63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황금수 선생(2024.12.21.)

 

지춘란은 4·19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서울구치소에서 겪으면서, 4월혁명공간의 사회당·사회대중당 여성 당원으로부터 정전 이후 한국의 정세를 귀동냥하고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하면서 동지로 사귀었다고 본다. 

 

황금수는 “남성 당원과 달리 그 양반들은 특히 여성적인 어떤 성격이라 할까, 서로 당은 달라도 한 식구처럼 자주 만났더라고. 옥살이도 같이했기 때문에 그분들은 언니, 동생으로 잘 통하는 그런 관계였습니다.”라는 증언은 필자의 이런 추론을 가능케 했다.

 

지춘란이 언제 출소한 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결혼 후 부군 황금수가 소중히 보관한 사진의 뒷면에 ‘1969년 秋夕 날’로 쓴 사진이 있다. 배경으로 보아 출소 이후, 서울 중구 신당동 민족일보 편집국장 양수정 부인이 운영하는 신당동 산부인과 의원에 취직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4·19혁명으로 지춘란은 형기가 무기에서 ‘절반’으로 감형받아 나왔기 때문이다.

 

출소 후 지춘란은 5·16 쿠데타 이후 혁신계 ‘사회대중당 사건’으로 구속된 감방 동지인 최만리 사회대중당 중앙당 부녀위원장으로부터 황금수를 소개받는다.

 

왼쪽 지춘란, 다른 분은 교도소에 함께 근무한 민간 간호원으로 추정(1967년 서울교도소).jpg
왼쪽 지춘란, 다른 분은 교도소에 함께 근무한 민간 간호원으로 추정(1967년 서울교도소)

 

황금수는 지춘란과 결혼생활을 하면서, 그녀의 중국 용정 출생과 중국 국공내전에서의 간호 활동 그리고 6·25전젱 이후 남도부와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조선 귀국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ㅡ 각종 고문과 3차신경통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지만 삼불 원칙(不言, 不文, 不名)을 고수한 황금수

 

황금수는 철저한 삼불 원칙으로 비합운동(非合運動)을 해 왔기 때문에, 혹 공안에게 빌미가 될 말이라던지 과거 활동 내용은 부부임에도 지춘란과 자세히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지춘란의 조선 귀국에 대해서는 아예 들은 기억이 없다고 했다. 만일 황금수가 또다시 체포되고 구속되어 고문을 당해 죽더라도 아내 지춘란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으로 필자는 짐작한다.

 

황금수는 지춘란과 결혼 전 해방공간 1948년과 1950년 그리고 1961년 5·16쿠데타로 체포된다. 

 

1948년은 5·10단독 선거 반대 투쟁 때 황금수는 레포와 민청 활동으로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지만, 미성년자인 관계로 다행히 45일을 구금당하고 나온다. 이후 그는 1950년에는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죄)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온갖 고문이란 고문을 당하고 1953년 7월에 출소한다. 또한 황금수는 1961년 4월혁명 공간 시기 통민청·사회당·민자통 활동으로 체포되나, 모진 고문 속에도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여 8월 중순에 나온다. 

 

이때 무자비한 고문에 대한 황금수의 증언이다.

 

“당시 함께 옥살이한 선생 이름이 기억이 나는데 부산의 김학우. 배울 학자, 비 우자. 김학우 선생이 그때 한 육십 중반 정도 되는 사람인데, 그때 우리가 봤을 때는 굉장한 노인이었다고. 김학우 선생이 내가 아침에 불려 나가서 고문을 당하고 저녁에 사람들한테 부축을 당해 들어오니까….

 

나한테 김학우 선생이 ‘황공, 황공 시인하고 넘어가자. 그러다 죽겠다’ 이러더라고.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그걸 반대하면서 버틴 적이 있어. 만일 시인하면 그것으로 끝임을 알기 때문이었지.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무자비한 폭력에도 부인하니, 조사관들이 내 합법적 활동을 죄로 만들 순 없고 이러니까. 결국 내놓더라고.”

 

이후 황금수는 1974년, 1979년 또 2번의 구속으로 고문이란 고문은 다 받아 몸은 거의 만신창이가 된다. 특히 그가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당하였을 때는 3차신경통까지 걸려 엄청난 병마 속에 수감 생활을 한다. 

 

시인 박용구는 『화려한 식민지: 시인 박몽구의 세태추적기』(도서출판 눈, 1989)에서 황금수 선생의 심각한 옥중 투병 실태를 고발한다. 

 

“현재 전주교도소에서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해 온 황금수 씨(50)도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병고에 허덕이고 있다. 황씨는 진단 결과 견디기 힘든 통증이 따르는 안면마비 현상의 '3차 신경통'을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하나둘씩 이가 빠지기 시작해 지금은 음식물을 전혀 씹을 수 없는 상태로 겨우 미음에만 의지해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박용구 선생.jpg

 

ㅡ 남도부의 제3지대에 대한 당 보고 임무를 지춘란에게 부탁

 

황금수는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자격정지 15년을 받고 1988년 12월 출소하나, 아내 지춘란은 의문사 당하였다. 

 

다행히 복역 당시 황금수가 3차신경통으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딱한 사정을 「가톨릭 평화신문」 기사로 안 안경자는, 그가 징역을 살고 나오자 자기가 아내 노릇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황금수와 산상(山上) 결혼한다.

 

이후 황금수는 안경자의 헌신 속에 건강을 회복하면서, 그녀가 고귀한 노동으로 번 돈과 본인의 집을 처분한 자금으로, 통일운동과 병마로 고통받는 동지들을 위해 아낌없이 통 크게 함께 후원한다. 

 

하지만 황금수는 안경자 여사와 살면서도, 첫째 아내 지춘란이 당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이야기한 것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지춘란은 “남도부가 자기에게 제3지대가 살아온 모든 것을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3지대가 어떻게 싸웠다는 것을 증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라고 황금수에게 이야기하였기 때문이었다.

 

황금수에게는 지춘란은 부부이자 동지였고 조국의 통일과 미제국의 몰락을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빨치산 여전사였다.

 

2004년 필자는 황금수 선생을 처음 뵙고, 4월혁명 공간 통민청 관련 구술 요청을 하였으나 아직 구술할 형편이 아니라고 사양하셨다. 이후 필자는 황금수 선생과 꾸준한 만남을 통해 마침내 구술도 하게 되었고, 2020년 지춘란의 판결문과 제적등본 그리고 사진 등을 주시면서 지춘란 조명을 제안하였다.

 

필자는 황금수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기에는 너무나 전문 지식과 경험 그리고 철학이 부족했다. 

 

하지만 필자는 다행스럽게도 『월간 말』과 『민족21』에서 일할 무렵인 1999년에서 2004년까지 “통일역사기행단”을 만들어, <비전향장기수 선생의 삶의 현장 방문>과 <전북 빨치산 기행>,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 탐방> 그리고 <미군 폭격에 의한 집단 학살지 탐방>을 진행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필자는 2006년부터 “미군범죄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 조사위원으로 미군의 무차별 폭격 학살 현장인 예천 산성동, 단양 곡계굴 네이팜탄 폭격지와 영동 노근리, 포항 함포 사격지 등 미군 학살 현장 여러 곳을 전민특위 위원들과 함께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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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언젠가는 이런 현장 탐방과 조사 그리고 증언 등을 토대로 틈틈이 공부해온 미군 범죄와 집단 학살 등을 함께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였는데, 황금수 선생이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만들어 주어, 흔쾌히 승낙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먼저 필자는 관련 문현은 주로 안국동에 있는 <정독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을 활용했고, 필요한 서적은 황금수 선생이 구입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 주셨다. 

 

ㅡ 조선인 부대의 이동과 인민군 편입이 갖는 정치적 의미

 

지춘란 조명을 위해 우선 중국 근현대사, 제2차 세계대전사 학습과 지료 수집 그리고 6·25전쟁에 대한 전문가 십여 분에게 정중하게 취지와 설명을 드리고 의견을 구하였다. 2020년은 코로나19가 창궐할 시기로, 전문가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주로 이메일을 사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답변을 주지 않았다. 다만 임경석, 염인호, 정창현, 김광운 선생은 성심성의껏 답변과 자료 그리고 의견을 주셨다. 

 

일단 필자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지춘란의 조선 귀국 경로였다. 

 

지춘란 판결문에 나오는 중국인민해방전쟁 즉 국공내전에서의 행적이다.

 

“피고인 지춘란은 4280.3.25.(필자 ; 서기 1947.3.25.) 만주 길림성에서 중공군 제 72단 전사(위생원)로 입대 후 만주 중국 본토에서 국부군과 대전하면서 중공군 부상병을 치료하여 오든 중 4282.5월 양사(소위)로 승진 4282.9.4 중국 공산당에 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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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춘란  판결문

 

하지만 1년여 년 이상의 시행착오 속에, 지춘란의 조선 귀국 경로는 조선의 문헌 자료가 없으면 반쪽이라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국내 전문가들의 저서에 나오는, 중국 국공내전에 참가한 조선인 부대의 행적을 다루는 저서는 많지만, 이는 궁극적으로는 ‘남침’의 빌미로 이용될 수 있는 것들 뿐이다.

 

필자가 참고한 서동만(1956~2009)의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선인, 2005)에 나오는 국공내전에 참가한 조선인 부대 기록이다. 

 

“1949년 7월과 50년 1월의 두 번에 걸쳐 국공내전에 참가한 동북야전국 소속 조선인 부대가 북조선 측에 인도되어 조선인민군의 전방 주력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대해 각주로 출처 근거와 서동만 본인 의견을 첨가했다.

 

“와다 하루키 저·서동만 역, 『한국전쟁』, 90~94쪽. 이 주제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로는, 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 명지출판사, 2000, 염인호 「해방 후 중국 동북지방 조선인 부대의 활동과 북한입국」,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2』, 2002, 이종석, 『북한 – 중국관계 1945~2000』, 중심, 2000, 113쪽.

 

이들 부대의 이동과 인민군 편입이 갖는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는 견해가 엇갈린다.

 

와다는, 이들 부대는 중국공산당 소속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중국 공민이 된 이상, 중공의 지시, 명령에 따른 ‘파견’으로 간주한다. 이들의 고향은 중국 동북 지역이며,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그러했다는 것이다.

 

염인호, 이종석은 북조선 정부와 조선로동당의 ‘소환’에 따른 ‘귀국’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중국 동북지역에서 자발적으로 혹은 당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북조선 체제 건설에 참여한 경우와 이들 부대의 이관은 성격을 달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어떠한 경우든 당시 존재했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며, 이는 나중에 형성되는 국가 간 관계의 틀만을 적용해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ㅡ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에 참가하고 조국에 돌아 왔다”라고 연설한 김일성

 

서동만은 같은 책에서 귀국한 조선인 부대의 배치사항도 정리했다.

 

“그 안에 포함된 사단들은 제12사단보다 중요한 부대들로서 개성 방면에 배치되어 서울로 진공한 제4단(사단장 : 리권무), 해주, 사리원 방면으로 배치되어 서부전선의 주력이 된 제6사단(사단장 : 방호산), 동해안 방면을 담당한 제5사단(사단장 : 김창덕) 등이 있었고, 최소한 이 4개 사단에는 당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종래 북조선 측은 중국내전 참가 조선인부대의 이관에 대해 일절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단지 『김일성저작집(1980년판)』 제5권에 수록된 「인민군대는 현대적 정규무력으로 강화 발전되어야 한다」는 문서는 김일성이 1949년 7월 29일 인민군 제655군부대 장교회의에서 한 연설로 그는 첫머리에서 ‘동지들은 조선민족으로서 중국인민을 지원하여,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에 참가하고 조국에 돌아 왔다’고 말하여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김일성은 현대전은 무장뿐만 아니라 전투방법에서도 과거의 전쟁과는 다르기 때문에 유격전을 기본으로 싸우던 때의 전술과 전법만을 가지고는 이길 수 없다고 전제한 뒤, 이 부대가 실제 전투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현대 병기를 장비한 정규전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필자는 여러 전문가의 도움으로 지춘란의 중공군 제72단은 『중국 동북해방 전쟁을 도와』(길재준, 리상전 집필, 조선·평양 외국문출판사, 주체105(2016))와 『현대 조선의 탄생』(박경순, 내일을 여는책, 2020) 그리고 {조선의용군 제7지대} (림창배 변철호 주필, 료녕민족출판사, 심양, 1996)에 나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참조 : 사람을 찾아서② 정의의 전쟁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국민당과 싸우다, 울산함성 2023/10/17 

 http://www.ulham.net/culture/10078)

 

국공내전 중 3대 전역(戰域) 중 하나인 ',동북전역', 전투장면 (회화).png.jpg
국공내전의   3대 전역(戰域) 중 하나인 '동북전역' 전투장면  (회화)

 

지춘란의 중공군 제72단은 중국 국공내전 당시 길남군분구 제72단이고, 이후 독립11사에 편성된다. 1949년 3월에 동북인민해방군이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 후 같은 해 9월 4일 지춘란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이후 중국은 한반도가 과거 중일전쟁처럼 일제 대신 미 제국 침략의 교두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한반도가 동아시아 지역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완충지대가 되어야, 중국은 오로지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만 힘을 쏟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코 한반도의 전쟁을 중국은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은 당시 이해가 일치하였다고, 필자는 여러 가지 저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도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사회주의적 국제주의) 원칙에 의해 상호협력을 다짐했다. 

 

ㅡ 지춘란의 조선 입북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사회주의적 국제주의)

 

『철학대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동녘, 1989)에서 정의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다.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원칙이 포괄하는 주장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건을 평가하고, 임의의 정치적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항상 국제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 사회주의 세계 체제의 확립과 발전이라는 입장에서 출발할 것.

 

제국주의에 대한 공동의 투쟁을 위해 사회주의 세계 체제와 국제 노동자 계급, 반제 인민 운동의 힘을 통일시키도록 부단히 노력할 것.

 

제국주의 체제로부터 사회적, 민족적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근로 대중과 인민들을 전면적이고 연대적으로 지원할 것.

 

전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결정적 보루인 사회주의 국가 공동체의 통일과 단결을 확고히 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역량을 긴밀히 연결시킬 것.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성과 단결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 위에서 유지, 확장시키는 것.”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은 6·25전쟁에서 중국의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衛國)으로 발휘된다.

 

중국의 항미원조 보가위국.png
중국의 항미원조 보가위국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모택동이 1950년 10월 8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해 각급지휘관에게 보낸 전보 내용 일부이다.

 

“팽덕회, 고강, 하진년, 등화, 홍학지, 해패연 동지 및 중국인민지원군 각급지휘관 귀하

 

1. 조선인민해방전쟁을 돕고 미제국주의의 공격에 맞서 조선인민, 중국인민과 동방각국인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명령한다. 신속히 조선국경 내로 출동해 조선 동지들과 함께 침략자들에 맞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하라. 
(중략)


5. 우리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국경에 들어가 조선인민, 조선인민군, 조선노동당(공산당), 기타 민주당파와 조선인민의 영도자 김일성 동지에게 우애와 존중의 뜻을 나타내야 한다. 아울러 군사기율과 정치규율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이것은 군사적인 임무를 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초인 셈이다.


6.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어려운 사정을 면밀하게 고려하라. 뜨거운 열정, 용기, 세심함과 감투정신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라.


지금 전반적인 국제정세와 국내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한 반면 침략자들에게는 불리하다. 동지들이 용감하게 현지의 인민들과 힘을 합쳐 침략자들을 무찌른다면 최후의 승리는 바로 우리 것이다.”(출처 :『중국이 본 한국전쟁』)

 

홍학지는 전쟁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한국학술정보, 2008)에서 6·25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밝혔다.

 

“조선전쟁을 끝내게 한 것은 우리 지원군이 조국의 인민들로부터 부여받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도와주어야 하며 가정과 국가를 지켜야 한다’(抗美援朝保家衛國)는 신성한 사명을 완수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지춘란의 조선 귀국은 염인호·이종석의 “북조선 정부와 조선로동당의 ‘소환’에 따른 ‘귀국’으로 간주한다.”와 서동만의 “다만 어떠한 경우든 당시 존재했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며...”라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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