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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은 푸르동, 생시몽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공산주의 공동체를 무장봉기로 실현하고자 했다.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파리에 오기 전에 이미 가족협회, 계절협회, 추방자동맹, 정의자동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파리에 온 후 정의자동맹과 공산주의자동맹에서 마르크스 세력과 무정부주의자들은 노선과 조직 운영방식을 놓고 대립했다. 공산당선언의 배경이 된 1848년 혁명이 지나간 후, 마르크스 세력과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은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와 1871년 파리코뮌에서 다시 만났다. 마르크스와 무정부주의자들의 대립은 공산주의자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가 분쟁 끝에 해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르크스가 자신과 대립했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 때문에 공산주의자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조직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러한 경험 때문에 혁명적 무정부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마르크스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에 대해 비판한 것은 첫째 이들이 객관적인 정세를 무시하고 무장봉기를 너무 빈번하게 일으켜 당국의 탄압으로 조직이 와해된다는 것이며, 둘째 이들이 혁명수단으로서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의 건설을 반대한다는 것이며, 셋째 이들은 국가와 그 제도를 부정했기 때문에 의회투쟁을 경시했으며, 넷째 혁명 직후 소수 혁명가들의 독재에는 찬성하지만 노동자국가와 노동계급의 독재에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의 이론을 발전시켜 자신의 혁명이론을 정립했으며, 공산주의자동맹, 국제노동자협회, 파리코뮌 등 자본주의 타도투쟁에서 이들과 연대했다. 또한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이 중앙집권적 조직에 반대했지만 연합적 조직이나 연합적 조직 내의 느슨한 협의체적 지도부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즉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중앙집권에 반대한 것이다.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 역시 반자본주의 투쟁의 연대대상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행적을 살펴보고 재평가하는 것이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먼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의 원시적 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 카르보나리당을 살펴보고, 원조격인 바뵈프, 바뵈프와 블랑키를 연결해주는 부오나로티, 마르크스가 가입한 정의자동맹의 상급조직의 지도자였던 블랑키, 정의자동맹에서 마르크스와 경쟁했던 바이틀링, 국제노동자협회에서 마르크스와 대립했던 바쿠닌의 삶과 사상을 간단히 알아본다.
ㅡ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의 본거지, 카르보나리당
바뵈프, 부오나로티, 블랑키, 바쿠닌 등은 프리메이슨이나 카르보나리당과 교류하면서 이들의 비밀조직 운영방식과 엘리트주의, 무장봉기에 영향 받았다. 프리메이슨이나 카르보나리당은 소수 엘리트의 봉기를 주장했던 19세기 대표적인 비밀혁명조직이다. 카르보나리당(Carbonari, 숯장이)은 프랑스에서 16세기 발생하여 프랑스대혁명 당시 프리메이슨의 급진적인 분파로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1831년까지 포르투갈, 스페인, 브라질, 우루과이, 오스만제국, 러시아에서 활동했다.
카르보나리당은 중앙집권적인 조직이 아니라 작은 비밀결사조직들의 연합체였으며, 소조직의 지도부들끼리만 연결됐다. 카르보나리당의 회원들은 주로 시골에서 숯불을 굽는 직업(숯장이)으로 위장했고, 자신들이 모이는 장소를 "바락"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카르보나리당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을 "파가니"라고, 회원들끼리는 서로 "좋은 사촌들"이라고 칭했다. 신입회원들은 숯 판매업자, 혹은 무두장이(피혁업자)로 위장한 입당의식을 거쳐야 하며, 6개월 동안 예비당원(견습생)으로 지낸 후 정식당원(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프리메이슨 회원은 처음부터 카르보나리당의 정식 당원이 될 수 있었다. 프리메이슨(freemasonry)는 십자군전쟁 때 기사단이 발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보통은 중세 말기 석공길드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프리메이슨은 1717년부터 기록에 언급되고 있으며 1723년 제임스 앤더슨이 시민의 권리나 노동윤리 등이 포함된 프리메이슨 규약을 발표했다. 그 이후 프리메이슨은 영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 퍼졌으나 계몽주의 성향으로 가톨릭의 탄압을 받았다.
프리메이슨은 지역별로 분산된 소단위(Lodge)로 운영되며 소수 엘리트로 구성됐다. 신비주의 노선도 있으나 프랑스의 현실주의 노선은 프랑스대혁명을 비롯하여 정치격변기에 적극 참여했다. 프리메이슨은 20세기에도 전 세계에 펴졌으며 1910년 멕시코혁명과 러시아혁명에도 참여했다. 프리메이슨은 중세 말부터 근세까지 각종 혁명에 연루돼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규율이 엄격한 비밀혁명 조직으로 인식되어 유럽의 많은 혁명가들이 이 조직에 가입했다.
카르보나리당은 로마교황청의 지배로 인해 오랫동안 분열된 이탈리아, 특히 빈곤한 이탈리아 남부지역에서 성장했다. 카르보나리당은 봉건귀족에 반대하고 평민의 권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애국적이며 급진적인 자유주의 성향을 지녔다. 이들은 이탈리아통일, 가톨릭반대, 입헌군주제 혹은 공화국 건설 등을 주장했다. 이들은 이러한 목적을 소수 엘리트가 선동하는 무장봉기를 통해 이루고자 했다.
조아킴 뮈라(Joachim Murat)는 나폴레옹의 친인척이자 최측근으로서 나폴레옹에 의해 나폴리왕국의 국왕(1808년~1815년)으로 재임했는데, 이 나폴리 왕국에서 카르보나리당이 저항세력으로서 성장했다. 이탈리아 북부에선 아델피아(Adelfia)와 필라델피아(Filadelfia)같은 단체들이 연합조직을 만들었다.
카르보나리당은 교황의 지배에 반대했으며, 시칠리아 조직의 경우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노선에 따라 가톨릭을 타도하려는 계획을 담은 "알타 벤디타"(Alta Vendita)를 작성해 배포했다. 교황은 이들을 탄압했으며, 특히 1821년 비오7세는 칙령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Ecclesiam a Jesu Christo), 1846년 비오9세는 "콰이 플루리부스"(Qui pluribus) 발간을 통해 카르보나리당을 반가톨릭세력으로 선언하고 회원들을 파문했다.
카르보나리당은 이탈리아통일 운동(Risorgimento, 리소르지멘토)를 주도했다. 이들은 1814년 나폴레옹에 의해 옹립된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난드 1세가 통치하는 시칠리아 왕국을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헌법을 제정하고자 무장봉기했다. 하지만 왕국은 교회와 합세하여 카르보나리당을 포함한 모든 비밀결사의 결성, 가입, 회합, 장소 제공을 금지시켰다.
카르보나리당은 1820년 시칠리아 왕국에서 오스트리아 빈체제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세력과 합세하여 페르디난트 1세에 반대하는 폭동을 다시 일으키며 자유주의 입헌군주제 헌법을 요구했다. 수세에 몰린 국왕은 새 헌법을 승인하고 의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러한 자유주의 운동은 1821년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왕국으로 확산됐지만 빈체제의 신성동맹은 군대를 보내 반란군을 진압했다. 결국 반란의 주모자인 모렐리와 실바티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페페는 추방당했다. 페데리코, 콘팔로니에리, 실비오 펠리코, 피에로 마론첼리는 투옥됐다.
카르보나리당은 프랑스에서 1830년 7월 혁명에도 가담했다. 7월 혁명으로 프랑스에 입헌군주제가 실시되자 이들은 1831년 이탈리아에서 봉기했다. 카르보나리당은 1831년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의 교황령, 그리고 모데나 지역에서 무기를 들었다. 모데나의 공작인 프란체스코 4세는 이탈리아 통일왕국의 국왕 칭호를 수여받는 대가로 혁명에 긍정적인 척을 하면서 실제로는 혁명을 탄압했다. 혁명의 주동자인 메노티는 봉기 전날 체포됐고, 프란체스코 4세는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제안에 따라 메노티를 포함한 주동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모데나에서 봉기실패에도 불구하고 교황령의 여러 이탈리아 도시에서 카르보나리당의 삼색기가 게양됐다. 혁명을 지원하는 의용군이 로마로 진군했지만, 교황 그레로리오 16세의 요청으로 개입한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격파됐다. 카르보나리당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탄압을 당했고 1831년 이후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그 회원들은 다른 급진적인 정치조직에 흡수됐다.
카르보나리당의 잔류세력 중 일부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샤르보네리(Charbonnerie)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샤르보네리 역시 입헌군주제 혹은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파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이들은 군대에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봉기의 공모자들이 처형되고 지도부들 사이의 갈등으로 샤르보네리의 세력은 점차 약해졌다. 특히 프랑스에서 입헌군주제가 실시되자 봉기의 명분이 희미해졌다. 프랑스 공화파 내에 "샤르보네리 민주주의" 정파가 결성됐지만 1841년 이후 주목할 만한 활동이 없었다.
이탈리아에선 카르보나리당 회원들이 마치니의 "조바네이탈리아“(청년이탈리아)에 합류했다. 조바네이탈리아는 빈체제를 전복하는 1848년 유럽혁명에 참여했다. 파리에서 카르보나리당과 샤르보네리의 잔존세력들은 1830년대 후반 추방자동맹, 의인동맹,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이들은 부오나로티, 블랑키의 지도를 받는 가족협회와 계절협회에 참여했다. 카르보나리당의 조직운영방식인 비밀엄수 체계는 19세기 중반까지 블랑키, 마르크스, 바쿠닌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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