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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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체결의 현장 재현 모습. 중앙의 이토 히로부미 좌우로 을사오적 등이 앉아 있다.

 

" 식민지악법 치안유지법 , 그리고 국가보안법 "


동아시아에서 조선은 화약고였다.

 

특히 15, 16세기의 일본은 전국시대((戦国時代)로 수많은 세력 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100여 년간 끊이지 않은 혼란기였다. 이런 약육강식 일본 열도의 통일을 시작한 사람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였고, 오다 사후 일시적으로 통일시킨 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였다. 

 

도요토미는 불안정한 정국을 조선 침략으로 돌파하기 위해 2차례 조선과 명의 연합국과 전쟁을 치렀다. 바로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그러나 도요토미의 사후 재분열이 일어난 일본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가 수습하고, 1603년 에도(江戸, 현 도쿄)에 막부(幕府)를 열면서 통일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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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17세기 중국은 명과 청의 교체기였다. 만주 지역 여진족의 누르하치(청 초대 황제, 1559~1626)는 1616년 국호를 후금(後金)으로 정한 후, 명에 선전 포고를 하고 랴오둥(遼東) 지방의 푸순(撫順)을 점령했다. 1636년 홍타이지(제2대 황제, 1592~1643)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명과 전쟁 전에 조선의 인조(仁祖, 1595~1649)에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그러나 조선이 항쟁하자 청은 후방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2차례 조선을 침략한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었다. 결국 조선은 45일간의 항전 끝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청과 군신관계를 맺는다. 이후 청은 마침내 1644년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다. 

 

이로 인해 전통적 화이(華夷)사상 질서가, 중화(中華) 명이 오랑캐 이(夷)인 청에 의해 대체되면서 기존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중국은 일찍이 중화라 일컫고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오랑캐라 불렀다. 

 

반면에 한반도는 네 차례나 중국과 일본의 주전장(主戰場)이 되면서, 국토는 초토화되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진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은 중국의 왕조 교체나 일본의 정권 교체와 같은 격변 없이, 새로운 동아시아 지역 질서에 편입된다.

 

ㅡ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 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일본은 1866년 3월 조슈번(長州藩)과 사쓰마번(薩摩藩)이 동맹을 맺고, 1868년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한다. 이들은 일본을 ‘만국대치(萬國對峙)’의 국제질서 속에서 일왕(천황) 중심의 근대적 국가체제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 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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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번과 사쓰마번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계는 조슈번(長州藩)과 사쓰마번(薩摩藩) 출신들이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다. 초기 정국을 주도한 인물로 조슈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1대 총리를 하고 2대 총리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번갈아 가면서 내각을 구성한다. 특히 이들은 1차 세계대전까지 육군은 조슈번이 해군은 사쓰마번이 장악하는 번벌(藩閥)을 이루어 육·해군의 각 요직을 장악한다. 현재도 이들 출신은 막강하여 고이즈미 전 총리는 사쓰마번, 아베 전 총리는 조슈번 출신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를 과감하게 추진하면서, 중앙 권력의 강화를 위해 무사들의 불만을 국외로 돌리고, 무력을 동원해 조선을 정벌하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다. 정한론은 일본 내 모순해결과 국력 팽창 정책으로서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론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시작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준 조슈번의 스승이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유수록(幽囚錄)』 에 나오는 정한론 배경 설명이다.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蝦夷)를 개척하고 제후를 봉건해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琉球)와 조선(朝鮮)을 정벌한 후 북으로는 만주(滿州)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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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

 

1875년 일본은 군함 운요호로 강화도 초지진에 보내 발포를 유도하고, 이를 핑계로 영종도를 습격한다. 그리고 일본은 민간인 학살과 약탈 그리고 방화 등의 공격을 하면서 조선과 통상 교섭을 강요했다. 결국, 이듬해 1876년 2월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이 미국에 당한 포함외교(砲艦外交)를 재연한 것으로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조약이었다.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휴머니스트, 2012)에서 조일수호조약은 아편전쟁 이래 청이, 일본 막부가 서구 열강에게 강요당했던 불평등조약과 비교하더라도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고 기술한다.

 

“일본은 그동안 대등한 관계를 맺어오던 조선을 일본보다도 후발국이라 규정하고, 서구 열강보다 먼저 조선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우선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훨씬 불평등한 내용을 강요한 것이었다.”

 

ㅡ  조선의 반외세 투쟁과 임오군란(壬午軍亂) 그리고 제물포조약

 

일본은 이미 1853년 7월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의 포함외교로 200년간 유지했던 쇄국의 문을 열고 1858년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일본도 서구 열강에 유리한 불평등조약이었지만, 당시 청이 서구 열강과 체결한 톈진조약과 비교하면 일본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다.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앞의 책에서 일본의 유리한 조약을 체결한 배경을 설명했다.

 

“톈진조약에는 크리스트교 보호, 아편무역 공인, 외국인의 국내 자유통상권 규정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청의 톈진조약이 제2차 아편전쟁에 패배한 결과 체결된 것인데 비해 일본의 경우는 교섭을 통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거시적으로 보면 청의 태평천국 봉기나 인도의 세포이 봉기 등과 같은 아시아 민중의 저항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대일 정책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1880년대 들어 서양 여러 나라와도 불평등 외교통상 관계를 맺으며, 무방비 상태로 열강의 침탈을 받게 된다. 특히 일본과 열강들의 경제 침략으로 조선 경제는 제국주의 식민지 하부 구조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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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

 

특히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몰락해 가는 지주와 관료들을 매수해 조선 경제를 착취 수탈했다. 또한, 외래상품의 난입으로 농민과 수공업자 그리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고, 분노와 인내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중은 자연히 일본의 침략에 맞서, 반외세 투쟁과 봉건 세력과의 투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민중들의 투쟁은, 정부의 ‘신식 군대’와의 차별대우와 무거운 군역에 시달려 온 ‘구식 군인’들을 고무시켰다. 

 

결국, 1882년 6월 5일 군인들은 개항 이후 처음으로 민중까지 호응한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일본 공관과 일본인들을 닥치는 대로 습격했다. 도성 안은 억눌려온 울분이 터져 걷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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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이에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를 수습해 달라고 요청한다.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군란은 수습되었다. 그러나 개항이 가져온 변화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 정세를 지켜보던 청나라와 일본은 파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조선에 먼저 들어온 청은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고, 조선에 군대를 주둔하면서 내정에 간섭한다. 닭 쫓던 개꼴이 된 일본은 조선에서의 청의 주도권을 용인하고, 1882년 8월 임오군란의 사과와 배상을 받기 위해 불평등한 조일강화조약(제물포조약)을 맺는다. 조선은 이때부터 자주 국가로서의 위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ㅡ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전쟁 그리고 청일전쟁 

 

1884년(甲申年) 12월 4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일본 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정변의 주역들은 내각을 개편하고 군사, 경찰, 사법, 사회문화, 재정 등 중요한 직책을 차지했다. 또한,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분야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며,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지향하는 정강 14조를 공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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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난다. 

 

비록 갑신정변은 실패했으나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역사적 사변이었다. 특히 개화파가 중심이 된 정변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이후 민중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의 갑오농민전쟁으로 계승 발전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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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의 중심지였던 우정총국

 

그러나 갑신정변은 조선 반도 주변 나라인 청, 일본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 또한 조선의 국내 정치에 밀접히 결합할 수 있고, 그들의 개입으로 국제 정치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변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한 이후 호의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러시아는 남하를 위해 겨울이면 얼어버리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대체할 부동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영국은 이 의도를 간파하고 러시아의 조선 접근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영국은 조선에 해밀턴(거문도)을 차지하겠다고 일방적 통보를 하고 거문도를 점령한다. 중국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 러시아와 영국을 조정하여, 영국군의 거문도 철수는 2년 뒤에 이뤄진다. 

 

개항 후 청나라와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피폐해진 조선 농민들은 1894년 외세 침략과 봉건제도에 반대하며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든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에 출병을 요청하였으며,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내세워 즉각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다. 일본은 동학농민전쟁이 진정되었음에도 철군을 거부하며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다.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 내각을 구성해 갑오개혁을 단행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에 패한 청은 1895년 4월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하고 반식민지로 전락한다. 조선은 이 조약으로 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동아시아는 19세기 들어 영국을 선두로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략해 오는 가운데 큰 변화를 겪는다. 

 

특히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청, 조선 관계를 결정적으로 바꾸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한다. 그리고 새로운 동아시아 근현대사가 시작된다. 

 

ㅡ 러일전쟁과 을사늑약(乙巳勒約) 그리고 의병 투쟁 

 

일본은 이후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일본 낭인들을 경복궁에 난입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불태우는 패륜적 만행을 저지른다. 이로 인해 반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시해 사건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한다. 

 

동학농민전쟁으로 표출된 민중의 혁명 의지는 일본의 무력에 의해 압살(壓殺)되었고, 이후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으면서 식민지의 길로 들어선다. 

 

1900년 청나라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만주 일대를 점령한 러시아는 조선 반도를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일본은 1902년 1월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다. 1903년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용인하는 대가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인정할 것을 러시아에 요구하나 거절당하자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러일전쟁에 영국과 미국이 전쟁 비용의 약 3분의 2를 빌려주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이후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1905년 11월 17일, ‘일본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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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체결 후 기념사진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 보호국이나 사실상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은 40년간 조선을 무단 점령한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었다. 장지연은 11월 20일 『황성신문』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일제의 침략성과 조약에 조인한 매국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했다.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도 조약의 무효와 각 지방의 조약 반대운동을 알리는 글을 싣고 반일 여론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조약 파기를 주청하는 가운데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자결로써 국권 침탈의 울분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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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과 '시일야방성대곡'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조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 투쟁’이 전개된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의병 전사자 수가 1만 7,779명(『조선폭도토벌지』 기준)에 달하는 등 조선인의 저항은 격렬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 지배하면서 조선인을 열등한 존재로 깔보고 멸시했다.  

 

그러나 의병 투쟁은 일본을 공포케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후 518년 만인,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강제 병합된다. 그리고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최고 통치기구이자 수탈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한다.

 

ㅡ 일제 무단통치와 3·1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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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창덕궁 흥복헌(興福軒)

 

일본은 조선을 강제 병합 후 무단통치를 시행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은 군사·사법·행정·입법 4개 권력을 모두 장악했다.

 

경찰은 헌병경찰이 보통경찰을 겸임했고, 경찰서장과 헌병대장은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에 근거하여 재판을 거치지 아니하고 바로 처벌하도록 했다.

 

“구류, 태형 또는 과료에 해당하는 죄,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 혹은 과료의 형에 처해야 하는 도박범과 상해죄, 행정 법규 위반자를 재판을 거치지 않고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출처 : 『강제병합 100년 특별전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민족문제연구소, 2010)

 

이로 인해 헌병과 경찰은 무소불위의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처벌을 남용하게 된다.

 

치바대학(千葉大学) 조경달 교수는 『동아시아 근현대통사』(책과함께, 2017)에서 무단통치에 대해 근세 일본이 행했던 것 이상의 엄격한 지배라고 했다.

 

“무단정치 체제에서는 헌병경찰이 죄 없는 민중을 구타하는 것은 흔한 광경이었고, 민중은 헌병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다.

조선인 헌병보조원이나 순사보는 변장하고 시장과 마을을 돌며 밀정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감시했기 때문에 일본인보다 더 원망을 쌌다.

 

이러한 폭력은 민간의 일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조선에서는 주먹으로 때리기 식의 권고주의(拳固主義)가 만연했다.

조선은 그야말로 ‘병영반도화(兵營半島化)’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무단통치에 조선인은 복종을 감수하는 노예 민족이 아니었다. 어떠한 폭압 정치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싸웠다. 이것이 3·1혁명이었다.

 

3·1혁명은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에 맞서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을 되찾자는 전국적 민족적 반일 애국 투쟁이었다. 일제의 총검에 희생된 사람만도 최소 칠천 명이며 구속자 역시 오만 명에 육박했던 민족자주독립 애국 항쟁이었다.

 

앞의 책에서 조경달 교수는 3·1혁명이 일반적으로 비폭력운동으로 평가되지만, 이것은 33명의 민족대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사실 다양한 투쟁이 진행되었다고 밝힌다.

 

“3·1운동은 연설회와 만세시위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도시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상인들의 철시(폐점 파업), 학생들의 동맹휴교 등으로, 농촌지역에서는 헌병경찰 기관과 관청·면사무소·재판소·우편국 등에 대한 항의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몽둥이와 농기구 등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한 점이다.

그 결과 관헌의 사망자는 8명, 부상자는 158명, 파괴된 관공서는 경찰서·경관주재소 87개소, 헌병주재소 72개소, 군청·면사무소 77개소, 우편국 15개소, 기타 27개소, 합계 278개소에 이르렀다.”

 

ㅡ 일제 식민지 악법 치안유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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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유지법

 

3·1혁명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조선 민족의 자주정신을 내외에 힘 있게 과시한 민족적 장거였으며 일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주는 등 식민지 나라들에 민족해방투쟁의 희망이 되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3·1혁명으로 일제는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 오히려 ‘무단정치’기에 비해 경찰서 수와 경찰관 수가 몇 배로 늘어났다. 1 부군(府郡) 1 경찰서, 1 면(面) 1 주재소 정책이 시행된 것이다. 그리고 일제는 식민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탄압기구로 감옥을 확장했다.

 

『강제병합 100년 특별전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에 나오는 조선인 수감자 수치와 항일지사들에 탄압 기록이다. 

 

“1908년 10월말 재소자는 2,019명이었으나, 1909년에는 1일 평균 수용인원이 15,725명, 1930년 16,677명, 1940년 18,182명,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21,900명에 달하였다. 피지배 민족인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사실상 한반도 전체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항일지사들은 경찰의 심문과정에서부터 악랄한 고문을 받았고, 특수범죄자로 분류되어 독방에 수감됐다. 고문과 사벌私罰, 폭행등 갖은 악행이 자행되어 자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전향을 강요해 이를 거부하면 각종 고문을 하거나 징벌을 가했다. 사형을 면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감옥에서 목숨을 잃는 것도 이와 같은 악형과 전향거부 때문이었다.” 

 

일제는 여기에 더해 1925년 사회주의 유행을 핑계로, 그러나 실제론 애국지사 체포와 조선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제정한다.

 

김동춘의 『권력과 사상통제』(역사공간, 2024)에서 보다 항일운동가 처벌을 위한 법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치안유지법은 ‘국체’ 또는 ‘정체 변혁’, 즉 천황제를 부정하는 정치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법이었지만, 식민지 조선이나 타이완에서는 항일운동가를 처벌하기 위한 법이었다.”

 

그리고 강준만은 『한국근대사 산책 6권』(인물과사상사, 2008)에서 ‘치안유지법’ 시행으로 체포된 조선인 수를 밝힌다.

 

“일제는 사회주의의 유행에 대해 치안유지법으로 대응했다.

 

1925년 5월 12일부터 시행된 이 법의 목적은 ‘국체의 변혁이나 사유재산의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사회주의를 근절하는 데 있었다.

 

이 법의 시행으로 1925년부터 1938년까지 1만 8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치안유지법’은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1945년 10월 4일 연합군사령부의 ‘인권지령’으로 폐기된다.

 

ㅡ  ‘정권 유지법’인 국가보안법과 1, 2차 인혁당사건

 

1948년 단독 정부 수립 이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시행되자 위기에 처한 이승만 친일 친미 사대세력이 미국의 압박과 여순항쟁을 구실로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급히 제정한다. 반민족행위자 처벌 정국을 반공 정국으로 바꾸기 위해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악용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집권 세력조차도 ‘형법이 제정되기 전 건국 초기의 비상사태에서만 적용되는 임시조치법’임을 전제하고서야 ‘국가보안법’을 제정할 수 있었다.

 

그 임시조치법 ‘국가보안법’이 올해로 76년이고, 그리고 원법인 식민지 악법인 ‘치안유지법’은 100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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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철폐

 

‘국가보안법’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이지만 국가정보원, 경찰 보안수사대 등 공안기관이 ‘국가보안법’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수구정권이 공안 통치로 정권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권 유지법’이다.

 

대표적으로 박정희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이 광범하게 확산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그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국가보안법 사건을 터뜨렸다. 1, 2차에 걸친 소위 ‘인혁당사건’은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조작 간첩 사건이자 공안사건이었다. 

 

신동숙의 부군 도예종 선생이 연루된 1·2차 인혁당 사건은, 애초 중앙정보부가 조선의 지령을 받아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 조종하고 사회전복을 노렸다고 발표하였지만, 박정희 정권의 위기 탈출용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나중에 재심에서 모두 무죄로 판명된다.

 

특히 신동숙은 부군 도예종 선생이 학문에 대한 열정과 애국심이 뛰어난 분으로 기억하며 평생 존경하였는데, 간첩이라는 누명을 덮어쓴 것은 말도 안 되며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말씀하셨다.

 

“도예종 선생은 학자적인 분으로,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 책도 많이 읽으셨어요. 상주고등학교 근무 시에는 자기 전문과목이 경제학이 아니고 서양사 교사였는데, 학생들이 집에 왔어 하는 말이 ‘선생님은 경제학을 공부하셨는데 서울대 사학과를 나온 선생님보다 더 잘 지도해 준다’라고 자랑들 했어요. 또한 웅변도 잘 지도해주셔서 상을 받았다며 학생들이 기뻐하였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은 집념이 강한 분이라 책을 집필한다고 하면, 한 달가량을 새벽 5시부터 온종일, 한 달 내내 집중하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렇게 집중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부군은 책을 보고 있으면 몰두가 돼서 몸 피곤한 줄도 모른다고 하였어요. 그만큼 열심히 공부하는 학구파였습니다.

 

남편은 또한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 지배를 받은 것도 한인데, 해방 후 민족이 분단된 것을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우리끼리 정치를 해야 하고 민족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전통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민족정신이 대단하였어요. 

 

남편은 자상하고 여성 평등을 실천한 인간적인 가장이자, 야망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학자였고 민족을 사랑한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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