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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덕분에 나는 / 낯선 사람들과 형제가 되었다
그대 덕분에 나는 / 살아 뻗어가는 모든 세력에 가담했다
그대 덕분에 나는 / 다시 태어나 조국을 되찾았다
그대는 나에게 주었다 / 외로운 사람들이 알지 못한 자유를
그대는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 친절이 불처럼 타오르는 것을
그대는 똑바로 서게 해 주었다 / 똑바로 뻗어가는 나무처럼
그대 덕분에 나는 배웠다 / 사람들 사이의 일치점과 상위점을 분별하는 기술을
그대 덕분에 나는 알았다 / 한 사람의 고통이 어떻게 하여 만인의 승리 속에서 사라지는가를
(중략)
그대는 내가 보도록 해 주었다 / 빛으로 가득찬 밝은 세계와 커져가는 기쁨을
그대는 내가 사멸하지 않도록 해 주었다 / 왜냐하면 그대 속에서 나는 이미 나 혼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생토록 칠레공산당(Partido Comunista de Chile)에 헌신했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의 「나의 당에게」라는 시다. 네루다는 1969년에 칠레 공산당이 인민연합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사회당 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를 추대하고 후보에서 사퇴했다.
지춘란은 제3지대장 남도부로부터 “여하한 난관과 애로에 부닥치더라도 조금도 동요 없이 당을 위하여 충실히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동무”라고 평가받았다.
ㅡ 당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동무, 지춘란
지춘란의 판결문에는 “4280.3.25 만주 길림성에서 중공군 제72단 전사(위생원)로 입대 후 만주 중국 본토에서 국부군과 대전하면서 중공군 부상병을 치료하여 오던 중 4282.5월 양사(소위)로 승진 4282.9.4 중국 공산당에 입당”이라고 나와 있다.
일제 괴뢰 만주국은 동북 3성 조선족에 대해 박해가 잔혹했고, 당연히 조선족은 반장제스(蔣介石, 1887~1975)·국민당 정서가 지극히 높았다.
중국공산당은 조선족과 지춘란에게 장제스·국민당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로부터 평등과 해방 그리고 일제강점하 조선 독립을 위해 연대해준 당이었다. 지춘란은 처음에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지만, 조선 귀국 후에는 조선공산당에 편입된다. 그리고 그녀는 무엇보다 당원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지춘란이 국공내전과 조선전쟁 시기에 입당한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이었다. 또한,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해 고통을 겪어 왔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을 견지한 공산주의 혁명이 급성장하는 시기였다.
『철학대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동녘, 1989)에 나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의 정의 일부이다.
“당의 조직 원리는 민주적 중앙 집권제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데 있어서 조직 이외의 다른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
(중략)
당은 계급 전체의 이해 관계를 대변한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수한 개별적인 행동들을 공동 투쟁으로 결집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결집에 의해 노동자 계급의 통일적 의지가 만들어진다.
이와 같은 작업을 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중앙의 지도이며 엄격한 규율이다. 모든 당원은 결의 사항을 완수하는 데 협력할 의무를 지니며, 각자의 계급투쟁에서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당의 활동에 활용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리고 모든 당원은 당 사업 중에서 결함을 찾아내고 새로운 길을 검증해 낼 의무를 지니며, 비판과 자아비판의 의무를 지닌다.
일단 결정된 결의 사항은 다수의 의지를 표현한다. 비록 소수의 당원들이 결의 사항의 정당성을 확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모든 당원은 결의 사항을 실행에 옮길 의무를 진다.”
그리고 지춘란이 중국공산당 입당할 당시, 당장(당헌, 강령)의 총강 일부이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노동계급의 선진적이고 조직적인 부대이며, 그 계급 조직의 최고 형태이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민족과 중국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 현 단계에서는 중국의 신민주주의 제도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며, 그 최종 목적은 중국에서 공산주의 제도를 실현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중국혁명의 실천이 통일된 사상 - 마오쩌둥 사상을 모든 활동의 지침으로 삼으며, 어떠한 교조주의적 또는 경험주의적 편향도 반대한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기초로 하여, 중국과 외국의 역사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어떠한 유심주의적 또는 기계적 유물론적 세계관도 반대한다.”(1945년 6월 11일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통과)
ㅡ 신화를 창조한 빨치산 투쟁을 왜곡 폄하 축소한 빨치산 문학
열성 당원이자 공산주의자인 지춘란은 당 중앙의 결정에 따라 빨치산에 배속받고 흔들림 없이 끝까지 투쟁한다.
지춘란은 민족·민중혁명과 조국 통일을 위해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과 판결문에 나온 “공산주의가 승리한다”라는 신념으로, 계급해방과 인간 평등 쟁취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제3지대장 남도부와 간호장 지춘란에게 제2전선 승리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굴의 혁명사상과 조국 통일에 대한 의지와 함께 근거지 확보, 원활한 보급, 인민의 지지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특히 빨치산은 인민의 지지를 “물과 고기의 관계”, 즉 “인민성”을 중시하면서 협력을 끌어내야 했다.
하지만 빨치산은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근거지에다, 조선으로부터의 병력과 무기 그리고 장비를 보급받을 수 없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신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태는 『남부군, 이태 지음』(두레, 2014)에서 빨치산 투쟁이 성립되기 위한 몇 가지 필수요건을 이야기하면서, 시종 부정적으로 어떨 때는 악의적으로 왜곡 폄하했다.
“첫째로 근거지가 될 공간이 있어야 한다.
(중략)
남한의 경우 인구밀도가 세계 제2위, 어디를 가도 인가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지리산이 넓다 해도 겨우 반경 15킬로미터의 원 속에 갇혀 있는 셈이며 동서남북 어느 방향이고 반나절만 걸으면 인가가 계속되는 야지로 나가게 된다. 근거지를 확보할 공간이 없는 것이다.
한편 지리산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로 울창하다고 할 만한 수림이 없다.
(중략)
다음은 보급수단이다.
(중략)
북한과의 왕래가 단절된 상태에서 남한 빨치산의 보급 수단은 전투에서의 노획이나 산악지대 주민으로부터 약탈하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세력이 약화되면 보급의 길이 막히고 보급이 어려우니까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남한 빨치산은 가속적으로 소멸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략)
남한 빨치산에는 정신 무장도, 객관적 조건들도 그럴 수가 없었다. 설득보다는 위험이 앞섰다. 그것은 빨치산이나 토벌대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남부군 부대는 보급투쟁 등으로 마을에 내려갈 때 으레 ‘인민성을 재고하라’는 훈시를 했다. ‘인민은 우리의 주인이니 인민의 거처인 안방에는 들어가지 마라. 식량은 빼앗지 말고 설득해서 얻어라. 꼭 필요한 물건 아니면 손을 대지 말고 불필요한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해방군처럼 ‘해방지구’를 갖지 못했고 언제나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 했던 우리에게는 ‘인민성’을 발휘할 여유가 없었다.”
이태뿐 아니라 대다수 투항하거나 전향한 빨치산은, 수기(手記)로 당국의 눈치와 입맛에 맞게 빨치산을 왜곡 폄훼(貶毀)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공의 이야기로 남과 북에서 버림받는 빨치산으로 소설화했다.
ㅡ 김남식, “고역의 장정” 빨치산 투쟁을 ‘희생’을 전제로 제2전선론으로 폄하(貶下)
조선노동당 전문가인 김남식(1925~2005)은 빨치산에 대해 ‘희생’을 전제한 제2전선론 논문울 썼다.
“6. 제2전선에 대한 평가의 의미
(중략)
제2전선은 희생을 각오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큰 것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입장이므로 설사 희생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군사적 상식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휴전과 더불어 주전선의 기본임무인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사수된 이상 제2전선의 역할과 임무는 완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 유격대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제2전선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 제2전선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한 이해도 중요한데, 그것은 물론 인민군의 후퇴에 따른 것이며, 인민군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엔군의 참전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포로문제에서도 정규군의 포로송환문제는 제2전선에 참여한 사람들의 포로문제하고는 성격이 다른 문제라는 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제2전선의 임무와 역할, 그리고 당시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입장이 아닌가 생각된다.”(출처 : 『「청년』」 제1호(1991년 8월) 「6·25당시 남한의 빨치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의 입장을 중심으로-」)
김남식은 빨치산 평가에서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임무는 ‘조선 사수’ 그리고 ‘포로송환 문제’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유엔군 참전으로 후퇴하는 상황에서 제2전선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빨치산의 ‘희생’은 불가피했다고 했다. 그러나 김남식이 평가한 빨치산에 대한 부분은 제2전선의 전술적 성격과 빨치산을 지도한 남로당 지도부와의 관계가 많아, 목숨으로 제2전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투쟁한 빨치산 통사(通史)를 조명하는 데 필자는 부족하다고 본다.
필자가 20여 년 동안 만난 대부분 빨치산은, 민족·민중혁명과 조국 통일 그리고 인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뜨거운 신념을 가진 분이었다. 그런데 “고역의 장정”을 한 빨치산을 평가하지 않고 지도책임 문제만 부각한 것은 너무 아쉬움이 많다.
공산주의자는 무엇보다 현실주의자로 인간 평등과 최상의 존재인 “인간”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휴머니스트이다.
김남식은 제2전선이 ‘희생’을 각오로 하는 전술이었고, 큰 것을 위해 빨치산이 희생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인간의 존엄과 생명에 대한 평가로는 너무도 도식적인 군사적 평가로 필자는 판단한다.
앞의 『철학대사전』에 나오는 사회주의 휴머니즘 내용 일부이다.
“사회주의 휴머니즘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초로 삼고 있다. 사회주의 휴머니즘은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들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며, 인간에게 있어 최상의 존재는 인간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이 전면적으로 발전되려면 모든 사회 관계의 완전한 변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ㅡ 인민성과 포로 생명 우선을 강조한 혁명 전투 기율의 빨치산
지춘란은 중국 국공내전 당시 인민해방군 간호장이었다.
부군 황금수는 “지춘란이 가끔 혼자서 중국 군가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모든 규율, 강령, 지시가 전부 노래로 정리되어 실천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내용은 무찌르자, 적을 죽이자 이런 구절은 없고 주로 인민을 도와주자, 지켜주자, 모든 인민에게 고통을 주면 안 된다. 이런 내용이었다.”라고 증언했다.
1947년 10월 10일, 중국 인민해방전쟁 당시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부가 ‘3대기율 8항주의’를 재차 반포할 것에 대한 훈령”을 내려 “3대기율, 8항주의”는 전군의 통일된 기율이 되었다.(참조 : 지춘란(4) 지춘란, 의료 요원으로 적군과 아군 차별 없이 간호하다, 울산함성, 2023/11/14, http://www.ulham.net/culture/11201)
모두 인민의 군대와 포로 정책 그리고 생명 우선을 강조하는 중국인민해방군 혁명 전투 기율이다. 마찬가지로 필자는 6·25전쟁에 참전한 조선인민군 장기수로부터 이런 전투 기율을 들은 적이 있다.
빨치산은 조선인민군과 마찬가지로 당과 군사위원회의 2원 조직으로 구성된다. 전선이 유리한 경우에는 도당위원장이 지역당 사업을 중심에 두지만, 전선이 교착 상태나 불리한 경우는 군사위원회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필자가 알고 있는 생존 비전향 장기수 중, 빨치산 당 일꾼인 구연철, 김해섭 선생은 빨치산 평가는 당 중앙에서 엄격하게 종합 조사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본인은 지역 당 일꾼으로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김남식은 1962년 말에 남파 후 체포되어 전향한 사람으로, 과거 조선노동당 간부였지만 집필 당시 조선노동당 당원도 아닌 상황에서, 더더구나 위치에 있지도 않는 그가 어떻게 「6·25당시 남한의 빨치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의 입장을 중심으로-」를 쓸 수 있는지 필자는 의문이다. 또한, 김남식이 남파할 당시 6·25전쟁과 빨치산에 대한 평가가 과연 총화되었는지도 궁금하다.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해당하는 조선의 사회과학원은 『조선전사』를 1979년부터 1992년까지 출판했다. 주로 절반이 현대사이고 무려 10여 년에 걸쳐 집대성했다. 그리고 남쪽 빨치산에 대한 기록은 『조선전사』에는 거의 없다.
『조선전사』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도서출판 4.27시대, 2021)에 나오는 설명이다.
“남측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1974~1984) 20권에 비견되는 북의 대표 역사서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펴낸 <조선전사>(1979~1992)를 보자.
전체 34권을 원시편부터 고대, 중세, 근대, 현대편까지 크게 5개 시대로 구분해 놓았는데
(중략)
이런 <조선전사>의 특징은 현대편이 전체의 절반 이상인 19권에 이른다는 점이다.”
그런데 김남식은 1991년 8월에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때는 『조선전사』가 완전히 출판되지도 않은 때이다. 그리고 어떻게 남쪽 자료를 수집하고 평가 논문을 쓸 수 있었는지, 공안의 절대적 협조 없이는 절대 불가한 일이다.
그리고 빨치산 포로 문제에 대해 조선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한국의 논문과 증언 등에 의할 것 같으면 초기에 빨치산은 전쟁 포로로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포로송환 문제가 부각되면서 일반 수용소로 보내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국방경비법과 시행령에 의해 처벌했다.
김남식은 ‘포로송환 문제’도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제네바협약’(1949.8.12.) 4조 2항 (가)목을 적용하면, 빨치산도 포로에 해당한다. 정규군 출신으로 교전 중에 군대에 복귀하려다가 실패한 경우에는 포로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조 : 지춘란(24) 지춘란은 빨치산 간호장, 조선인민군으로서 끝까지 신념과 지조를 지켰다, 울산함성, 2024/8/27, http://www.ulham.net/culture/22367 )
특히,남도부와 지춘란은 분명히 군인인데, 한국 정부는 빨치산을 포로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의 법인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받았다.
ㅡ 와다 하루키, 조선을 유격대 국가로 폄하
지춘란은 1931년 중국 용정 출생으로 1947년 3월 25일 길림성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제72단 전사 위생원으로 입대하여 국공내전에 참전한다.
국공내전 당시 중국 내 조선족의 국적 문제에 대해 이종석은 저서 『북한-중국관계(1945~2000)』(도서출판 중심, 2001)에서 중국공산당은 조선과 중국의 이중국적을 인정했다고 저술했다.
“해방 직후부터 중국 거주 조선족이 중국 내 소수민족인가, 아니면 조선교민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중공 중앙은 조선족의 국적에 대해 조선이 그들의 조국임을 인정했다. 아울러 그들을 중국의 정식공민으로도 인정했다. 이중 국적을 인정한 것이다.
중공이 이중 국적을 승인한 배경에는 ‘조선은 나의 조국이라는 감정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조선족’들에게 ‘중국 국적을 가지라면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것’이므로 조선공민이자 중국공민임을 동시에 인정함으로써 그들을 국공내전에서 중공을 위해 싸우게 하려는 책략이 놓여 있었다.
중공이 인정한 이러한 이중 국적 상황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1950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국공내전 시기와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들어온 수만 명의 중공 내 조선족 부대는 중국 국적이 아니라 북한 국적을 지닌 조선인으로서 ‘조국’에 귀환한 셈이 된다.”
지춘란은 바로 중국 국적이 아니라 조선 국적을 지닌 조선인으로서 “조국”에 “귀환”하여 6·25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서동만(1956~2009)은 저서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에서 “1949년 7월과 50년 1월의 두 번에 걸쳐 국공내전에 참가한 동북야전국 소속 조선인 부대가 북조선 측에 인도되어 조선인민군의 전방 주력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서동만은 와다 하루키 주장에 대해 본인 의견을 남겼다.
“와다는, 이들 부대는 중국공산당 소속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중국 공민이 된 이상, 중공의 지시, 명령에 따른 ‘파견’으로 간주한다. 이들의 고향은 중국 동북 지역이며,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와다 하루키 주장은 중국공산당의 조선과 중국의 이중국적을 인정한 부분을 무시한 견해이다. 또한 이들은 조선인으로서 “조국”에 “귀환”한 조선족으로, 와다의 주장은 중국이 6·25전쟁 전부터 개입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다.
특히 와다 하루키는 이것뿐 아니라 조선을 ‘유격대 국가’라 칭하며 ‘사령관’, ‘유격대 대원’ 등으로 조선을 ‘비정상국가’로 왜곡 폄하했다.
“김일성이 유격대 사령관이고 전국민이 유격대 대원이라고 하는 국가의 모습이 의식적으로 추구되었다.
사령관의 명령에는 절대충성을 다짐하고 ‘일심단결’한다는 이 체제에는 민주주의의 여지는 없었다.”<출처 :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창작과비평사, 1994)>
또한 와다 하루키는 조선을 ‘국가사회주의(國家社會主義)’라 하였다.
오래전 2006년 필자는 ‘국가사회주의’에 대해 비전향장기수 신현칠(1917~2012) 선생과 대화한 적이 있다, 그 일부분이다.
“근래 학계에서 북조선이 국가사회주의라고 하는 말이 많이 들린다. 아마도 일본의 어떤 학자의 말에서 시작된 말인 것 같은데, 국가사회주의라하면 우리 같은 옛날 사람들은 우선 나치스의 국가사회주의(독일의 사회주의 노동자 당)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이라고 알고 있다.
당시 독일은 패전해서 막대한 배상과 국민의 생활 또한 피폐해서 거의 나라가 거덜 났다. 자본가가 어디서 이익을 끄집어내야 할지 막연한 지경이었고,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이럴 때 일부 경제인과 히틀러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백성을 선동해서, 자본가에게는 이윤을 보장하고 살기 어려운 노동자에게는 사회주의 정책이라 부추겨 국가사회주의라 하였다. 그 당시 사회도 그것은 다만 국가 통제경제에 불가한 아주 지독한 대중 선동 수단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결국 전쟁 정책 대외정책으로 특히 유대 정책으로 마치 발광하는 사람처럼 날뛰다가 저렇게 자멸하고 말았다.”
신현철 선생은 조선을 어떻게든지 ‘비정상국가’와 ‘불량국가’로 이미지화하려는 일본학자와 미국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ㅡ 아! 월산(越山) 지춘란
지춘란은 부군 황금수가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빨치산 당 보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1984년 ‘의문사’ 당한다. 그녀는 빨치산 투쟁 시 여름 장마철에 동료들이 급류에 휩쓸려 죽는 것을 보고 물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황금수와 결혼 후 서울 암사동에 살 때 동네 한강에 가족 물놀이를 가더라도 발목을 담그는 조차도 겁을 먹을 정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그녀가 황금수가 출소 후 확인하니, 지춘란이 한강 자갈 채취하는 웅덩이에 투신했다는 것이었다.
황금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많은 돈은 아니나 현금과 집도 있었는데, 특히 지춘란은 유물론자 공산주의자로 투신할 이유가 없다고 ‘의문사’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또 심장병으로 죽은 아들 원이에게 출소 후 물으니 “엄마가 혼자 말로 너희놈들이 나를 죽여”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고 나에게 증언했다.
영원한 동지 월산(越山) 지춘란 연재 “사람을 찾아서”에 대한 황금수의 마지막 소회(所懷)이다.
“지춘란 동지는 무척 어질고 성품이 아주 유하고. 그리고 나한테 시집와서 내가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는 이런 조건하에서 무척 고생스러운 생활을 했는데도, 원망 한마디 안 하고 아주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나보다 지춘란 동지의 노력이 더 컸습니다.
그것을 나는 항상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지는 ‘같이 활동을 하다가 희생된 동지들이 혹시 살아남거든, 자기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싸웠다고 하는 거를 증언을 해달라, 그런 부탁을 하면서 자기는 언젠가 돌아가서 증언을 해야된다.’ 이런 이야기를 늘 저에게 했습니다.
특히 법정 최후 진술에서 ‘나를 죽이려면 죽여라. 나는 내가 인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국제적십자 요원에 해당된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정도로 신념이 아주 강한 여성이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 모든 물질은 정지돼 있지 않고 매 순간 운동하고 있다. 물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생성, 발전, 소멸의 자기 운동의 역사를 갖는다.
빨치산 또한 마찬가지로 생성, 발전, 소멸의 운동 역사를 갖는다.
그러나 빨치산 투쟁의 역사는 무려 30~40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빨치산 장기수들이, 지금도 반미·반일·자주·평화통일 투쟁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비록 지춘란은 빨치산 당 보고 의무를 다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남도부가 남긴 “비장 문건”이 2001년 10월 21일 남도부 빨치산 생존자 성일기와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팀이 발굴함으로써 제3지대의 활동은 공개 보고되었다.
아! 월산(越山) 지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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