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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흉측한 형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 《로즈메리의 아기》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관객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 평범함의 공포다. 공포는 피가 낭자한 육신이나 기괴한 외양에서 탄생하지 않고 미소를 짓는 이웃,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 그리고 전문지식의 권위를 두른 의사의 얼굴을 하고 일상 속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영화에서 가장 소름 돋는 지점은 로즈메리가 악마의 실체를 목격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몸과 정신에 일어나는 이상 징후를 필사적으로 설명하려 할 때, 주변의 모든 신뢰하는 이들이 입을 모아 다들 괜찮다면서 그녀를 고립시키는 가스라이팅의 순간들이다.
공포의 본질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신뢰의 처참한 붕괴다. 정확하게는 신뢰가 이미 파탄 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압박과 합리화에 따라 그것이 여전히 공고한 것처럼 연기해야 하는 상태다.
다들 진실을 조금씩 알고 있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 조금씩 침묵하며, 그 침묵을 ‘현실론’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정당화할 때, 음모에 낚인 당사자는 가장 철저히 배제된다. 이러한 소외와 배제의 구조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한미동맹을 둘러싼 거대 담론이 작동하고 소비되는 방식과 놀랍게 닮아 있다.
미국을 ‘사탄’의 비유로 가져오는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로즈메리의 아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탄 자체가 아니라 그 사탄을 안방으로 불러들이는 인간들의 비겁한 태도와 선택이다. 사탄은 혼자 문을 부수고 침입하지 않는다. 대개 누군가의 간절한 욕망 내지는 체념이 그를 부른다.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읊조린다. “대안이 없다”, “우리 모두를 위한 선택이다”,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미국은 아직까지 세계 유일의 패권국이고 이는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문제는 거대한 힘 자체가 아니라 그 힘과 맺은 관계의 성격이 맹목적인 ‘신앙’으로 굳어져 있다는 점이다. 동맹이란 국가이익의 냉정한 계산 위에 세워진 가변적인 계약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한미동맹은 검증과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논의에 앞서 존재하는 불가침의 전제다. 의문을 제기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위험한 인물’이나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힌다. 공포는 질문하는 행위 자체가 금지된 상태에서 싹튼다.
영화 속 남편 가이는 사탄을 숭배하는 악인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성공을 갈망하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인간일 뿐이다. 이는 정치철학가 한나 아렌트가 간파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과 궤를 같이한다. 거대한 비극을 완성하는 것은 거창한 악의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칠 파장을 고려하지 않는 ‘무사유’다. 가이에게 사탄과의 거래는 성공으로 가는 확실한 고속도로였을 뿐. 그는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다.
한국의 외교안보 현실에서도 이러한 ‘가이’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동맹을 국가의 전략적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경력을 쌓는 수단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미국의 정책 기조를 국내의 그 누구보다 먼저 내면화하고 이를 대변함으로써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려는 관료적 엘리트들 말이다. 워싱턴의 언어를 세련되게 구사하는 능력이 곧 국익을 수호하는 능력과 동일시되고 있다. 외교는 없다. 대미 투자합의의 결과를 조속히 입법화하지 않았다면서 합의를 뒤집으려는 미국을 두둔하는 참모가 이재명 대통령의 곁에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2025년 8월 말 이대통령이 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언급한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 기조에 한국이 반대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외교적 실언일 수 없다. 한국의 주류 엘리트 집단의 무의식 속에 체화된 굴종적 사고방식이 전염된 것에 가깝다. 상전인 워싱턴을 안심시키고 충성심을 다짐하려는 보고용 언어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국민의 안위인가 아니면 워싱턴의 눈 밖에 나는 것인가.
로즈메리는 선택과 상관없이 이미 몸 안에 들어앉은 이질적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대통령이 직면한 작금의 상황을 이러한 은유로 읽어내는 것은 결코 과도하지 않다. 그는 분명 기존의 무조건적인 동맹주의에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던 정치인이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에 들어선 그가 마주한 현실은 이미 ‘임신되어버린 구조’였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 요구,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서 강요받는 한국군의 역할, 심지어 미국의 관세협정 위반에도 오히려 우리가 서둘러 입법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들은 흐름을 형성하며 압박해온다.
그 흐름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이것만이 한국이 생존할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하게 되물어야 한다. 그 정책의 진정한 수혜자는 한국의 국민과 국가적 자율성인가 아니면 미국의 정책적 편의와 일관성인가. 로즈메리가 느낀 진정한 공포는 자신의 아이가 사탄의 혈육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기정사실로 관리되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저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하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자각에서 온다.
우리의 공포도 마찬가지 아닐까. 과연 우리는 미국의 ‘그릇’으로서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체념뿐인가.
한국 사회에서 소위 ‘사탄’이라 불릴 만한 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완전히 지워내는 것이 가능한가. 냉정히 말해 그것은 당장은 불가능하다. 패권은 엄연히 존재하며 동맹 또한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틀이다. 문제는 관계를 완전히 제거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관계의 본질적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다.
관계의 재설정은 구체적인 정책전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첫째, 한미동맹의 성격을 ‘불가결한 신앙’에서 ‘호혜적 계약’으로 전환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나 전략적 유연성 합의 과정에서 밀실 행정을 지양하고, 국회의 비준권과 사후 감독권을 실질화하여 외교적 결정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적 합의의 산물이 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전략적 자율성’의 확보를 위해 대미 의존도를 완화하는 다자주의 외교를 복원해야 한다. 중견국 간의 다층적인 협력 구조를 설계함으로써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 즉 ‘반대할 수 있는 물리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셋째, 동맹의 비용과 편익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논의하는 ‘외교의 공론장’을 활성화하여 더 이상 동맹이 공포나 가스라이팅의 도구가 아니라 냉정한 국익의 수단으로 작동하게 해야 한다. 외교의 은밀성은 신화일 뿐이다.
로즈메리는 결국 아이를 죽이지 않는다. 악의 세력에 대한 완전한 패배나 굴복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다른 관점도 가능하다. 그녀는 사탄의 질서를 축복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태어나버린 생명 앞에서, 가혹한 조건이지만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그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윤리를 선택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비참한 굴복이 아니라 주어진 한계 상황 안에서 주체성을 재정의하려는 고통스러운 몸부림이다.
한국의 자주독립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은 가망성이 없다. 기존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구성해나가는 실천적 언어로만 가능하다. 맹목적 숭배를 차가운 계약으로 바꾸고 신앙이 되어버린 동맹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반대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적 언어는 “이해관계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는 정치적 언어로 치환해야 한다. 외교를 밀실에서 끌어내어 민주의 영역으로 돌려놓는 것만이 우리가 거대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사탄은 언제나 믿음직한 얼굴로 우리 곁에 머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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