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
오피니언
-
오피니언
-
전국노동
-
전국노동
-
오피니언
-
오피니언
-
전국노동

(지난호에 이어서)
사회주의 국유화는 타의에 의한 노동계급의 억압인가?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국유화나 국영 경제로 정의하지 않고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으로 정의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다.”
(최일붕, “스탈린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198호 입력 2017-02-24)
노동자연대와 마찬가지로 신좌파는 국유화와 중앙집중 계획경제에 반대하고 있다.
신좌파는…혁명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역사적 의제로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혁명의 문제는 과거의 혁명들이 획득한 권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권력 문제를 포함하는 데에까지 확장됐으며, 혁명의 목표는 권력과 자원의 탈집중화와 자주관리(self-management)가 되었다.
(《신좌파의 상상력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이종태 옮김, 1999, 이후)
경제의 국유화나 의사결정의 국가 집중을 통해 신좌파가 제시한 자유로운 사회의 형태를 정의내릴 수는 없다. 신좌파가 제시했던 자유의 형태는 의사결정의 탈집중화, 국제적인 산업의 사회화,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의 자주관리였으며, 이에는 민주주의를 경제적ㆍ문화적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 확대해야 한다는 욕구가 포함되어 있다.(같은 책)
사회주의 국유화는 협동조합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의 생산수단 사회화이다. 국유화야말로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다.”는 명제를 현실화 하는 것이다. 신좌파가 내거는 “권력과 자원의 탈집중화”, “의사결정의 탈집중화”와 “국제적인 산업의 사회화”,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의 자주관리”는 중앙집중 계획을 “명령경제”, “지령경제”라 비난하고 분산적 계획, 민주적 계획, 아래로부터의 계획, 자치적 계획 등 노동자연대와 같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공히 내거는 구호였다. 신좌파의 "국제적인 산업의 사회화" 역시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건너 띠고 국제혁명을 강조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같은 구호다.
“의사결정의 탈집중화”를 하면서 “국제적인 산업의 사회화”를 어떻게 구현하겠다는 것인지 해명하지 않고 있다.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의 자주관리”는 지역마다 혹은 더 세분화해서 기업마다 자치를 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자본주의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민주적 중앙집중의 원리에서 보듯, 집중과 민주, 집중과 참여를 대립적으로 간주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1793년에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독일에서도 아주 엄격한 중앙집권화를 실현하는 것은 진정한 혁명적 당의 임무이다”(“동맹에 보내는 중앙 위원회의 호소”)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후 1855년 엥겔스는 주를 달아 1793년 프랑스 혁명 상황에 대한 맑스의 언급이 이후 밝혀진 사실과 달리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지방적이고 지역적인 자치가 정치적이고 국민적인 중앙 집권과 모순되지 않듯이”라며 무정부주의자들의 고립되고 분열적 사고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자치노선은 프루동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의 경제노선과도 일치한다.
프루동이 그리는 미래 이상사회는 대개 노동자 자신이 자치관리하는 기업을 경제단위로 하여 지역·지방·국가로 연합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 푸르동의 경우, 국유화가 아니라 ‘사회화’이다.(《아나키즘》, 玉川信明, 오월)
《공산당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에게서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 도구들을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는 것이 사회주의의 요체라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생산 수단을 우선 국가 소유로 전화시킨다”고 다시금 강조했다. 엥겔스의 이러한 주장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권위’와 중앙 집권이라는 관용어가 매우 악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혁명 이상으로 권위적인 것을 알지 못하며, … 내가 보기에 그것은 권위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권위와 중앙집권을 가능한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저주받아 마땅한 두 개의 사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혁명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아니면 말로만 혁명가인 사람으로 보입니다.(“엥겔스가 또리노의 까를로 떼르자기에게”, 72년 1월 14일[-15일])
레닌 역시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하는데 있어서 무정부적인 일탈에 대해서 심각하게 비판하였다.
조합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는 행정에의 참가라는 실제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또한 달성된 성공이나 정정된 오류에 엄밀히 입각하여 이 경험을 더욱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경제관리의 기관들은 ‘선출하는 생산자대회들 혹은 생산자대회’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 그리고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경제형태들의 건설이라는 실제의 업무를 계속하고 시정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업무에 대한 쁘띠부르조아적이고 무정부적인 파괴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파괴행위는 부르조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다.
(V.I 레닌, “러시아공산당 제10차대회의 결의. 우리 당내의 생디칼리즘적, 무정부주의적 편향에 대하여의 최초의 초안”,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노동자의 사상> 제1호에서 재인용)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노동을 전국적인 규모에서 가능한 최대로, 극히 엄격하게 집중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본의 위력과 노동의 무력함의 근원의 하나인 노동자의 직업적 분산상태 및 지방적 분산 상태와 세분상태를 극복하는 것이 전제가 된다.
(V.I. 레닌, “러시아공산당(볼) 강령 초안”, 1919년 2월 23일, 노동자의 사상 제1호에서 재인용)
레닌은 심지어 이러한 “쁘띠부르조아적이고 무정부적인... 파괴행위는 부르조아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다.”라며 이들이 반혁명을 불러온다고까지 경고하고 있다. 무정부주의자들, 각종 유사 무정부주의자들은 국가일반을 부정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국가, 그 국가의 국유화에 대해서도 부정하고 있다.
조선에서도 이와 같이 파시즘의 전체주의를 사회주의를 중상하는 이론으로 사용하는 흐름들에 대해 “《민주주의》의 구호를 들고 중앙집권제를 거세하면서 무정부상태를 조성하던자들이 사회주의를 파괴하고는 로골적인 부르죠아독재의 길로 나가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사회주의를 《전체주의》라느니, 《병영식》이라느니, 《행정명령식》이라느니 하면서 비난하는것은 황당무계한 궤변이다.
원래 전체주의는 파쑈독재자들의 정치리념으로 복무하였다. 바로 악명 높은 독일의 히틀러와 이딸리아의 무쏠리니가 전체주의를 저들의 파쑈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상적도구로 리용하였다. 파쑈독재자들은 기만적인 《국가사회주의》의 구호를 내걸고 민족적전체 또는 국가적전체를 위하여서는 그 어떤 로동운동도 계급투쟁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근로인민대중의 초보적인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마저 말살하고 전대미문의 야수적인 폭압정치를 실시하였다. 전체주의의 반동적본질은 개인은 전체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미명아래 반동적통치계급의 탐욕적인 리익을 위하여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희생시키는데 있다. 전체주의에서 말하는 전체는 인민대중전체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독점자본가, 대지주, 반동관료배, 군벌과 같은 극소수 특권계층을 의미한다. 인민대중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고 있는 사회주의를 《전체주의》라고 비난하는것은 결국 인민대중의 요구를 반영한 가장 진보적인 리념을 파쑈통치배들의 반동적인 리념과 같이 보는 터무니없는 궤변이다.
사회주의를 《병영식》이라고 비난하는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궤변이다. 사회생활방식은 사상에 의하여 규정되며 사회제도에 따라 달라 진다. 사회주의는 사람의 본성적요구를 반영한 가장 진보적인 사상이며 사회주의제도는 인민대중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을 마음껏 누릴수 있게 하는 가장 선진적인 제도이다. 인민대중의 자주성, 창조성을 억제하는것은 사회주의제도가 아니라 자본주의제도이다. 근로하는 인민이 자본의 노예로 되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인민대중에게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보람찬 생활이 보장될수 없다. 사회주의를 《병영식》이라고 헐뜯는것은 흑백을 전도하는 악선전이다.
사회주의를 《행정명령식》이라고 비난하는것도 리치에 맞지 않는 궤변이다. 일반적으로 행정명령식관리방법은 착취사회에서 특권계급의 요구를 강권으로 내리먹이는 낡은 통치방법이다. 경제생활이 시장경제법칙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 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관리는 철두철미 행정명령식으로 진행되며 인민대중은 한갖 관리의 대상으로서 행정명령에 복종할 의무밖에 없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된 인민대중이 관리에서도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인민대중에 의하여 수행되는 국가와 사회관리의 근본특징은 모든 활동에서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우가 아래를 도와 주며 서로 동지적으로 협력하는데 있다. 이것은 모든것을 행정명령으로 내리먹이는 낡은 사회의 관료주의적관리방법과 근본적으로 다른것이다.
지난 시기 사회주의실천에서 나타난 행정명령식관리방법은 사회주의사회의 본성으로부터 생긴것이 아니라 착취사회에서 물려 받은 낡은 유물이다. 사회주의배신자들은 《행정명령식》을 반대한다는 구실밑에 민주주의중앙집권제원칙을 반대하는데 예봉을 돌리였다. 민주주의중앙집권제는 사회주의국가활동의 중요한 원칙이다. 사회주의국가활동에서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제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여 있으며 여기에 사회주의국가활동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있다. 《민주주의》의 구호를 들고 중앙집권제를 거세하면서 무정부상태를 조성하던자들이 사회주의를 파괴하고는 로골적인 부르죠아독재의 길로 나가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이 황당무계한 궤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속에서 사상적혼란을 일으키게 된것은 인민대중이 사회주의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지 못한데 기본원인이 있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이 사회주의의 탈을 쓰고 교묘하게 감행되였기때문에 그 반동적본질을 처음부터 꿰뚫어 본다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다. 그러나 사회주의리론을 발전완성시켜 똑똑한 자막대기를 마련하고 사회주의사상으로 인민대중을 튼튼히 무장시켰더라면 사람들이 그토록 황당한 궤변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을것이다.
사회주의위업을 옹호고수하고 끝까지 완성하기 위하여서는 사회주의사상을 끊임없이 발전완성시키고 그것으로 인민대중을 튼튼히 무장시켜 그들이 사회주의를 확고한 신념으로 간직하도록 하여야 한다.
(김정일,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될수 없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근로자》에 발표한 담화, 1993년 3월 1일)
사회주의 생산에서 “모든 활동에서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우가 아래를 도와 주며 서로 동지적으로 협력하는” 사업 방식은 “청산리 방법”이나 “대안의 사업체계”로 현실화 됐다.
“사회주의를 그저 관료적 지령 경제나 국유화 경제 따위로 생각한다면, 사회주의는 인간 해방과는 아무 관계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김영익, “중국은 과연 사회주의인가?”, 〈노동자 연대〉 290호, 2019-06-20)라는 <노동자연대>의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될수 없다.”
사회주의에서 농촌 집단화를 “동물농장”이라고 비난하고 영국 제국주의 정보기관의 첩자가 된 조지오웰이 “평등주의적 유토피아를 언뜻 보여 준다”(김인식, “조지 오웰 사후 60년: 좌파의 관점에서, 좌파를 위해 글을 쓴 작가”, 〈레프트21〉 24호, 2010-01-28)며 찬사를 보내며 사회주의 국유화에 대해 비난하는 《노동자연대》에게 과연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억지로 강요된 억압행위라도 된다는 말인가?
“총체성과 보편성을 복권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주의와 관료 지배를 재활성화하는 길”, “민족과 국가, 질서와 권위를 내세우는 조야한 반포스트모더니즘”, “계급, 민족, 국가, 권력, 혁명, 국유화의 언어를 재권위화하려는 강한 정치적 선전 문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이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많은 나라에서 노동계급 자력 해방 정치는 당·국가 관료의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된 주객전도(主客顚倒)로 대체됐다. 노동자 평의회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관료적 명령 체계에 종속됐다.”, “사회주의를 국유화와 계획경제, 강한 국가권력의 존재로 치환하면, 노동자 민주주의의 부재와 관료적 억압은 부차적 흠결로 취급” 등 최일붕의 비판은 온통 사회주의 국유화와 중앙집중에 집중되고 있다.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서 “계급, 민족, 국가, 권력, 혁명, 국유화의 언어를 재권위화하려는 강한 정치적 선전 핵심”이 그렇게 저들의 분노를 살 이유라는 말인가?
트로츠키주의의 두드러진 특성은 비변증법적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이들은 무정부주의적 사조로 빠져든다. 이들에게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과 국제주의, 민주와(참여)와 중앙집중, 위와 아래, 지도자와 인민대중은 대립되는 개념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노동 운동의 이러한 강인한 생명력은 노동자들이 지도자들의 손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탈취하여 마침내 스스로 그것을 움켜쥐게 되는”이라며, “지도자들 일반을 떠나 ‘대중’에게 호소”하며, “‘지도자’와 ‘대중’을 대립시키”는 경제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신념에 철저하고 흔들림 없는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또한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에서도 “‘당 독재인가 아니면 계급독재인가, 지도자들의 독재(당)인가 아니면 대중들의 독재(당)인가?’라는 하나의 문제 제기는 이미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끝없는 사고의 혼란을 증명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완전히 특별한 무엇인가를 발명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현명해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레닌은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인 이탈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키는 것”으로 이는 “필연적으로 어떤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도 박살내 버릴, 저 쁘띠부르조아적 분열과 동요로 귀결되며, 또한 지속성, 통일 및 조직적 행동에 대한 저 쁘띠부르조아적 무능으로 귀결된다.”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김남섭 옮김, 돌베개, 39쪽-43쪽)고 하였다.
중앙집중 계획 대신 분산적 계획(알랙스 캘리니코스), 자치를 옹호하고 노동자 평의회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노동자통제를 옹호하는 <노동자연대> 같은 (범)무정부주의자들에게 레닌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우리가 “노동자 통제”를 말할 때 항상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슬로건과 나란히 배치해야 하며, 항상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 뒤에 바로 가까이에 두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가 의미하는 국가의 성격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레닌, “볼셰비키는 국가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 1917년 10월 1일)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끝없는 사고의 혼란”이다. 과연 노동자연대가 말하는 아래로부터, 노동자통제는 "상품의 생산과 분배의 전 지역에 걸친,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인가? 당은 전국적인 생산을 어떻게 지도하고 문화혁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이며 제국주의 침투와 공격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경제의 국유화나 의사결정의 국가집중을 통해 신좌파가 제시한 자유로운 사회의 형태를 정의내릴 수는 없다.”, “중앙집중적인 제3차 인터내셔널과 달리, 신좌파가 이뤄낸 국제적인 정치적 단결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대중운동들의 요구와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신좌파 다원주의자들과 <노동자연대>가 다른 점이 무엇이 있는가?
맑스주의자에게 “계급, 민족, 국가, 권력, 혁명, 국유화”라는 범주를 제외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노동자연대는 민족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노정협의 민족론은 국가주의적 경향으로 기운다. 그들은 민족과 계급의 긴장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예컨대, 반제국주의 국가가 국내 노동계급을 억압할 수 있다는 문제, 민족해방 담론이 내부 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문제, 지정학적 대립 속에서 노동계급 국제주의가 국가적 충성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문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 결과 민족은 종종 계급 아래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계급을 대신하는 구실을 한다.
(최일붕,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과 그 한계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비판적 서평", 〈노동자 연대〉 579호 , 2026-04-07)
“반제국주의 국가가 국내 노동계급을 억압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반북주의 논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이 미국 제국주의 압박에 맞서 왔다는 사실이 곧 그 사회 내부의 계급 관계와 억압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반제국주의는 외부 지배에 대한 저항이면서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해야 한다.
그런데 노정협은 북한 국가의 지정학적 위치를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북한 노동자·민중의 자체 활동과 정치적 자유라는 기준을 지워 버린다. 그 결과 반제국주의는 국제주의가 아니라 국가 지지의 언어로 변질된다. 이는 스탈린주의 전통의 오래된 약점이 오늘날에도 되풀이되는 사례다.”(같은 글)라는 반북주의로 조선에서 “아래로부터 해방”으로 쟁취하는 “노동자·민중의 자체 활동과 정치적 자유”는 바로 미제가 갈망하는 정권교체 염원이 실현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에서 민족의 문제는 반제국주의와 분단에 맞서는 진보적 투쟁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4.3의 민중은 단정ㆍ단선에 맞서 외세 척결, 자주통일을 외쳤고, 여순항쟁은 제주동포를 학살하려는 명령에 부단히 저항하였으며, 4월 혁명 역시 이 전통 위에서 학살진상규명, "가자 북으로 오러 남으로"라는 자주통일을 외쳤다. 통혁당, 남민전, 광주학살 이후 자주통일 요구는 바로 민족적 요구였고 이는 민중의 계급적 요구이기도 했다.
이것이 국가주의 요구인가?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국제주의와 대립되는가? <노동자연대>의 국제주의는 단 한 번도 외세가 진주하고 분단된 한국에서의 민족문제와 통일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우리의 구체적 지반 하에서 고민하지 않고 있다.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부정하고 오직 국제주의만을 외치는 이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반대하는 아방가르드
1923년 10월의 채 성장하지 못한 공산주의 혁명의 억압 이후에 마침내 파산을 맞은 독일 혁명은 두 가지의 반혁명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한편으로 적대적인 국제환경과 러시아에서의 관료적인 국가자본주의의 압력 하에서 이루어졌던 합병이 그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대공황과 독일 나치즘의 승리가 촉발시킨 사회전 위기의 기류이다.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이 아방가르드를 파괴시킨 것이다.(캘리니코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스탈린은 아방가르드 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질문 : 음악의 아방가르드 경향과 미술 및 조각의 추상 미술 사조는 이념적으로 얼마나 위험한가요?
스탈린 : 오늘날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소련 음악에는 형식주의가, 회화에는 추상주의가 주입되고 있다. 때때로 "볼셰비키와 레닌주의자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이런 하찮은 일에 몰두하여 추상 회화와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데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가? 정신과 의사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나누세요"는 질문이 들려옵니다.
이러한 질문들에서 우리나라, 특히 우리 젊은이들을 향한 이념적 사보타주의의 역할에 대한 오해가 명백히 드러납니다. 바로 그들의 도움으로 예술과 문학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공개적으로 자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른바 추상 회화에는 민족의 행복과 공산주의,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의 길을 위해 투쟁하며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진정한 얼굴이 없습니다. 그 대신 자본주의에 맞선 사회주의 계급투쟁이라는 문제를 흐리게 하는 추상적인 신비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붉은 광장의 미닌과 포자르스키 동상*에 가서 승리의 감정을 되새겼습니까? '혁신'이라는 예술을 상징하는 뒤틀린 철제 흉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추상 회화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현대 미국의 금융 거물들이 모더니즘을 장려하고, 이러한 유형의 작품에 엄청난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이유인데, 이는 사실주의 거장들이 결코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금액입니다.
소위 서양 대중음악, 즉 형식주의적 경향에는 계급투쟁이라는 근본적인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음악은, 만약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사람들을 황홀경과 무아지경에 빠뜨리고 어떤 행동이든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야수처럼 만드는 '셰이커'라는 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음악은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의 뇌와 심리에 영향을 미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일종의 음악적 마약으로,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없게 되고 무리 지어 행동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혁명이나 공산주의 건설에 끌어들이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보시다시피 음악 또한 투쟁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스탈린, 창조 지식인들과의 대담에서 토론, 1946년, https://www.revolutionarydemocracy.org/rdv9n1/stalintel.htm)
*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미닌은 17세기 초 폴란드군을 물리친 의용군 지도자 '쿠즈마 미닌'을 뜻하며, 성 바실리 대성당 앞에는 그와 포자르스키 왕자를 기리는 미닌과 포자르스키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18세기 중엽 미국에서 발생한 기독교의 한 분파로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춤추는 예배 의식 때문에 ‘셰이커’라고 불렸으며, 평등주의와 금욕주의를 실천했다.(역주)
예술사조로서 아방가르드는 중립적이거나 탈정치적인 사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계급투쟁적이었다. 러시아에서 등장한 미래파 경향은 새로운 형식과 파격적 실험과 작품으로 많은 자극을 남겼으나 점차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반대하고 인민대중과 분리되면서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이후 미래파는 소련 사회주의를 붕괴시키고 인민들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는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예술사조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고 타격하는 것은 비단 사회주의 예술을 보전, 발전시키는 것을 넘어 사회주의 자체를 보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은 당파성ㆍ계급성ㆍ인민성ㆍ전형성이다. 당파성은 예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예술이 아니라 사회주의 원칙을 표현하고 제시해야 한다. 계급성은 당파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인민대중의 이해와 감정, 계급의식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것이다. 인민성은 인민대중 위에 군림하거나 전문성이라는 미명 하에 예술인들만의 호사나 취미에 갇혀 인민대중과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대중과 호흡하고 인민대중의 미적, 정치적 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전형성은 시대상황과 시대정신을 날카롭고 구체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해내고 사회를 개조하는 주체적인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고리키의 《어머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작품인데, 여기서 ‘펠라게야 블라소바’는 노동자계급 혁명가로 발돋움하는 전형적인 인물이고, 그의 어머니 뻴라게야 닐로브나는 수동적이고 유약한 어머니가 아들의 삶과 투쟁을 이해하면서 각성해 가는 민중의 전형이다. 안드레이는 원칙적이고 강건한 혁명가지만 따뜻한 인간애와 세심함과 유연함을 가진 혁명가의 전형이다.
1930년대 소련 작가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의 자전적 소설인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빠벨 꼬르차긴이 어떻게 역경과 불운을 이겨내고 사회주의 건설의 주역이 되었는지 묘사하는 스탈린시대 대표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이다.
조선영화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편》은 강선제강소에서 진응산, 강옥 등의 인물을 통해 전후, 후르시초프의 대국주의적 압력 하에서 파괴된 생산을 재건하기 위해 분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쇠물집안으로 하나로 스며드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새 사회 건설을 위한 단결을 그리고 있다.
마오쩌둥은 《연안문예강화》에서 “문예작품에 반영된 생활이 일반적인 실생활에 비해 더욱 고상하며 더욱 강렬하며 더욱 집중적이며 더욱 전형적이며 더욱 이상적이며 따라서 더욱 보편적일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며 “현 세계에서 일체 문화 또는 문학예술은 모두 일정한 계급에 속하며 일정한 정치노선에 속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 초계급적 예술, 정치와 병행하거나 정치로부터 독립한 예술은 실제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예술성과 결합하지 못하는 예술의 계급성은 강렬한 전형성을 형성하지 못하는 선전문구로 전락할 수 있다. 계급성, 당파성이 없는 예술은 사회의 진보적 발전과 인민대중의 교양에 복무할 수 없다.
이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강이고 사회주의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이 배격되어야 하는 이유다. 더욱이 아방가르드는 서방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회주의와 싸우는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했다.
냉전의 가장 초현실적인 장 중 하나에서 CIA는 당시 급진적이고 비순응주의적이며 개인주의 일색으로 여겨졌던 예술 운동인 추상 표현주의*를 비밀리에 옹호했다. 현재 미국 예술가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빌렘 드 쿠닝은 모두 검열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얽매이지 않은 아방가르드 창의성의 증거로서 국제적으로 선전되었다...
집단 정체성의 지속적인 분열과 주관성의 지속적 악화는 고립되고 권력을 잃은 개인들의 원자화된 사회를 만들어 연대를 방해한다.
미학적 변화를 혁명으로 내세우고 개별 인간 경험의 주관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은 허무주의로 전락했다. 현대 좌파 사상은 지배 엘리트의 필요에 따라 주무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점토가 되었다...
지적 소매상, 사기꾼, 기회주의자, 스파이, 괴짜, 그리고 유급 선전가들의 공헌으로 인해,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현대 좌파’가 사회를 전복하려는 거대한 맑스주의 음모의 일부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문화적 맑스주의’는 좌파 학계와 운동을 위한 포괄적인 비하 어휘가 되었다.
비록 CIA가 비판적 인종 이론, 트랜스 권리 운동 또는 현대 좌파의 다른 극단적 현상을 직접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인공적인 반공주의 지적 생태계 창조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현대 문화적 좌파를 탄생시킨 비판—철학적, 예술적, 제도적—의 인프라에 자금을 지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라이안 퍼킨스Ryan Perkins, CIA는 어떻게 현대 좌파를 창조했으며 우파는 왜 여전히 그것을 맑스주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는가?, 2025년 7월 30일)
CIA는 또한 예술계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서 미국 미술, 특히 추상 표현주의와 뉴욕 예술계를 장려했다. CIA는 서방의 자유로운 예술이라고 칭송되는 것을 보급하기 위해 미술 전시회, 음악 및 연극 공연, 국제 미술제 등에 자금을 지원했다.
(가브리엘 록힐Gabriel Rockhill과 쟈오딩키Zhao Dingqi, 제국주의 선전과 서방 좌파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반공주의와 정체성 정치에서 민주주의 환상과 파시즘까지, 먼슬리 리뷰, 2023년)
이처럼 추상 표현주의 아방가르드는 미국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주의와 싸우는 제국주의 냉전의 도구가 되었다. 심지어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일환인 미래주의(Futurism)는 이탈리아 파시즘 선전 도구이자 파시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캘리니코스는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이 아방가르드를 파괴시킨 것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아방가르드를 배격한 스탈린이 아방가르드를 파괴했다고 비난함으로써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회적 맥락에서 규명한 아방가르드 예술은 단순히 예술의 형식을 넘어 당대의 사회현실에 저항 의식을 내비친다. 이러한 의미의 아방가르드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시대와 사투를 벌였던 예술가의 작품에 여실히 나타난다. 20세기 초 소련에서는 예술가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반영하는 사실주의 미술을 강요했다. 그에 맞서 칸단스키와 말레비치와 같은 예술가들은 예술이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절대주의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기존 체제에 대한 전복 의지를 표했다. 이러한 예술적 흐름이 사회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맥으로 이어진 것이다.
(김지우 기자, "고요한 적막을 뒤엎는 예술의 전위병 아방가르드, 혁명의 미학", 2023-05-30)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에 저항하고 “정치로부터 자유”라는 중립적 외양을 하고 실제로는 소련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전복 의지를 표했”던 미술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캘리니코스는 소련을 타도해야 하는 관료체제로 규정함으로써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대하고 소비에트에 저항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혁명의 미학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반혁명을 혁명으로 옹호하여 제국주의와 부르주아의 이해에 복무하는 것이 트로츠키주의의 특성이다.
최일붕은 철학이든 문화운동이든 잡다한 포스트모더니즘 조류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응수한다.
노정협 ‘비판서’의 가장 근본적인 약점은 방법론적인 것이다.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왜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에게 지적으로 설득력을 가졌는지를 사회적·역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 대신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과 확산을 CIA와 제국주의 정보기관의 자금 지원, 그리고 ‘부르주아 프로파간다’의 결과로 환원한다.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과 그 한계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비판적 서평”, 〈노동자 연대〉 579호, 2026-04-07)
그런데 맑스는 “한 시대의 지배적 여론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라고 일갈했다. 맑스는 물질적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들이 정신적 생산수단도 지배한다고 했다. 자본가들은 자본주의에서 예술이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복무하도록 하고 사회주의에 침투해 사회주의를 해체하는 수단으로 작동하도록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왜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에게 지적으로 설득력을 가졌는지를 사회적·역사적으로 설명”은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1부에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2부에서 번역글은 부르주아 내에서 번성하고 사회주의에 전파하는 예술사조들이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의 일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에 대한 폭로는 음모론이 아니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그만큼 음험하고 음모적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와 여기에 조응하는 반혁명적 예술사조들은 상호의존적이고 보완적이다. 이 둘은 일방적인 외부로부터 주입이 아니라 외부와 내부가 공명하는 이데올로기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1968년 운동의 최종(1970년대 말) 정치적 패배와 이데올로기적 조건에서 비롯한 역사적 현상이”(최일붕, 같은 글)라고 하는데, 이는 이들이 사태의 원인과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1968년 운동에서 이미 나타났다. 여전히 반전, 여성차별 반대 등 진보성을 가졌던 이 운동이 소비에트에도 반대하고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무정부주의적 운동으로 나타나자 제국주의는 이를 수렴하기 시작하면서 포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안보투쟁으로 미일군사동맹에 맞서 격렬한 양상으로 진행되기도 했지만,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가 열렸던 때입니다. 1956년 2월로 후르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에 일어났던 투쟁들에서 이미 신좌파적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60년대 후반에는 “기존의 정당계열 식 운동의 변화 2)자율적 운동의 상식화 3)일상적인 사회관계에서 나타나는 권력의 해체의 추구 그러면서 정치의 재(再)정의 4)개발 및 근대화에 대해서의 비판적 시각의 정착 5)전국 정치투쟁을 보편적 집약점으로 하는 구조(구미다테, くみたて)로부터 개별과제(이슈) 별 운동으로의 전환 즉 매크로 운동으로부터 마이크로 운동으로의 전환 6)종적인 강고한 조직으로부터 네트워크형 조직으로의 전환 7)감성적인 해방 등”(“후쿠시마 사태, 전후 일본 국가 형성 논리의 파산” [수정일본사회 탐방]<9>일본 신좌파 운동의 대부, 무토 이치요우 ②,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이영채 케이센대 교수, 프레시안, 2011-12-25) 신좌파 운동이 대두되었다.
승리한 사상이 옛날부터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그들도 겪고 있다. 승리한 사상이 기꺼이 비판적 요소를 포기하고 단순한 수단이 되어 기존질서에 봉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예전에 선택했던 긍정적인 무엇을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게 된다.(아도르노ㆍ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 문학과 지성사)
버먼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해도, 그리고 그 운동이 혁명을 성공시킨다 해도, 근대적인 삶이라는 물결 속에서 어떻게 단단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를 녹여 사라지게 하는 사회적 힘이 공산주의 역시 녹여 사라지게 하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페리 앤더슨, <근대성과 혁명>,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소위 혁명이라는 것은 낡은 권력을 뒤엎어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지만 새로운 권력이 다시금 민중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악순환 되는 정치 본연의 모습은 부정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치혁명 그 자체가 부정된다.(《아나키즘》, 玉川信明, 오월)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스트와 무정부주의는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유포하고 있다. 남은 것은 이 체제 속에 순응하거나 이 체제 내에서 부분적이고 개별적인 저항을 하는 것이다.
승리한 사상이 세계혁명의 좌초 앞에서 관료주의, 일국사회주의로 타락하고 급기야 관료 지배를 낳아 노동자국가를 타락시키거나 자본주의로 변모했다는 입장은 트로츠키주의의 중심 사상이기도하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는 러시아혁명 이후 레닌 시절에 몇 년 존재했을 뿐, 스탈린시대의 소비에트나 그 영향을 받은 동유럽이나 조선이나 중국이나 쿠바나 모두 사회주의가 아닌 관료지배 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특히 노동자연대 같은 국가자본주의자들은 동유럽과 소련해체를 진정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서 환영한다.
사회주의 건설이 1917년 이후부터 레닌 시절 몇 년 잠깐 존재하고 나머지는 다 관료지배체제라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은 현실의 반파시즘 투쟁, 민족해방투쟁을 통해 들어선 인류의 모든 혁명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이는 세계혁명이 되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새로운 관료 지배체제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는 회의주의와 패배주의를 심는다. 좌익청산주의다. 좌익청산주의와 우익청산주의는 공히 위험하다.
소련은 영웅적으로 투쟁하다 패배했지만 파시즘을 격퇴하고 민족해방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중 복지에 자극을 주었으며 자본주의의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에 맞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실현가능하다는 전망을 보여줬다. 현실사회주의의 패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때문이 아니라 그 독재가 무너지고 맑스주의 혁명적 원칙을 수호할 때 승리하고 원칙을 상실할 때 패배한다는 교훈을 보여주었다.
강성한 미제와 싸우며 민족해방을 이룬 베트남과 미제의 경제제재와 무력압살에 맞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조선과 쿠바는 국가지본주의와 타락한 노동자국가를 사수하고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인가?
맑스와 엥겔스가 파리꼬뮌의 패배로부터 혁명의 원칙을 발견했듯이 좌익 청산주의자들과 다르게 혁명을 지향하는 이들은 과거의 패배로부터 혁명적 교훈을 얻고 혁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간다.
지금까지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트로츠키주의는 다른 정치적 사조이지만 확고한 공통 지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김은식 기고] 나는 왜 양대노총 '직장 내 괴롭힘'에 몰두하는가?
방영환 열사의 유서 앞에서…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김은식[양대노총직장내괴롭힘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2026.08.01
노동권과 건강권 없는 자동화는 소비 없는 성장을 낳는다 —기계화 시대, 인간을 위한 재분배 설계가 먼저다
문귀영(노동운동가)
2026.07.31
[기고] '직장 내 괴롭힘' 자살이라는 사회적 참사 앞에서 전하는 울음
신고 3배 증가에도 처벌은 제자리… 직장 내 괴롭힘 방치가 만든 사회적 참사
김은식(양대노총직장내괴롭힘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2026.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