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9.16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2026 브릭스 정상회의 참석자들이 합동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신화사).png.jpg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2026 브릭스 정상회의 참석자들의 합동 기념사진 (사진=신화통신)


ㅡ 팍스 아메리카나의 균열과 역사적 패권의 이동


국제질서의 중심은 영원하지 않다. 19세기 세계는 영국 해군이 바다를 지켰고 런던이 세계의 돈을 움직였으며 파운드가 국제거래를 지배했다. 그러나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친 뒤에는 미국이 팍스 브리태니카 자리를 차지했다.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만들어진 IMF와 세계은행, 달러 중심 국제통화질서는 그 패권 이동을 제도로 굳힌 결과였다.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세계경제의 중요한 결정은 사실상 G7이 주도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된 위기를 G7만으로 수습할 수 없게 되자 G20이 정상회의로 격상됐다. 기존 질서는 자신이 만든 규칙으로 자신이 일으킨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할 때 그 중심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올해 9월 세계는 미국중심 질서의 변화를 예고하는 메시지를 열하루 간격으로 두 번 보았다. 9월 1일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에서 상하이협력기구(SCO)가 비슈케크 선언을 채택했고, 12일 인도에서는 브릭스(BRICS)가 뉴델리 선언을 내놓았다. SCO는 2001년 테러리즘, 분리주의, 극단주의라는 ‘세 개의 악’에 공동 대응하는 안보기구로 출발했다. BRICS는 2006년 외교장관 협의를 시작해 2009년 첫 정상회의를 열었다. 출발점은 달랐지만 지금 두 조직은 미국과 서방에 지나치게 집중된 국제사회의 결정권을 나누자는 곳에서 만나고 있다.

 

올해 두 정상회의가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인도의 모디가 연이어 같은 자리에 선 것이다. 세 사람이 SCO와 BRICS 정상회의에 모두 대면 참석한 것은 2019년 이후 처음이다. 특히 2020년 국경분쟁 이후 얼어붙었던 중국과 인도의 관계가 풀리는 대목에 시진핑은 7년 만에 인도를 찾았다. 중국과 러시아만 모였다면 서방에서는 다시 ‘반미연대’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도 긴밀하게 협력하는 인도의 모디가 그 한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은 지금 진행되는 변화가 그런 단순한 구도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ㅡ 안보와 경제에서 가시화된 서방 패권에 대한 도전


비슈케크 선언은 안보 문제에서 분명했다. 이란 영토에 대한 군사공격을 국제법과 유엔헌장 위반으로 규정하고 이란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지지했다. 공격국의 이름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명백하다. 일방적 강압조치에도 반대했다. 더 주목할 대목은 ‘대표적이고 민주적이며 공정한 다극 세계질서’를 선언문에 적어 넣었다는 점이다. 한 나라가 자기 안보를 위해 다른 나라의 안보를 희생시키는 유라시아 질서를 더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뉴델리 선언은 성격이 달랐다. BRICS에는 전쟁 당사국 이란과 미국의 우방인 UAE가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이란 전쟁에서는 공격의 책임을 따지는 대신 최대한의 자제, 민간인 보호, 주권 존중과 외교적 해결이라는 선에서 합의했다. 그러나 경제 분야에서의 미국 패권에 대한 반대는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일방적인 관세와 비관세 장벽, 유엔 안보리가 승인하지 않은 경제제재는 반대다. 회원국 통화를 이용한 결제를 늘리고 각국의 결제망과 금융메시징 체계를 연결하는 작업도 계속하기로 했다. 달러 없이도 거래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두 선언을 함께 놓으면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변화가 보인다. SCO는 미국이 주도해온 안보질서에 이의를 제기하고, BRICS는 무역, 금융과 국제기구에서 서방이 행사해온 권한을 줄이려 한다. IMF의 지분, 세계은행의 의결권, 유엔 안보리의 대표성, 국제결제와 제재 권한이 모두 그 대상이다. 두 조직 안에도 이해충돌은 많다. 중국과 인도는 경쟁하고 이란과 UAE의 이해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이 계속 한자리에 모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한 나라가 제멋대로 규칙을 만들고 파괴하는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이해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ㅡ 미국 스스로 훼손한 질서와 자국 국익을 좇는 동맹국들


그 변화를 재촉하는 쪽은 역설적으로 미국 자신이다.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려 했고, 무력으로라도 그린란드를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이란 전쟁은 명백한 불법 침략전쟁이다. 일방적인 관세압박과 통상 제제는 그야말로 약탈이다. 미국이 전후 국제질서를 세웠다는 사실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그 질서의 원칙을 미국이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패권은 군함과 달러가 부족해서만 쇠퇴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가 더는 그 나라의 말을 공정한 규칙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동맹국들도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는 기존의 규칙 기반 질서가 이미 파열됐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스페인은 미국의 이란 전쟁에 자국 영공과 기지가 이용되는 데 제동을 걸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도 미국의 군사행동에 자동으로 따라붙지 않았다. 일본 역시 호르무즈 해협에 병력을 보내라는 요구를 놓고 국내법과 국익을 따져 거부했다. 이 나라들은 미국과 결별하려는 것이 아니다.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미국의 요구와 자기 나라의 이익을 구별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외교다.

 

ㅡ 맹목적 숭미 외교 탈피와 BRICS·SCO 참여 등 자주 외교 촉구


문제는 한국이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중견국 외교’, ‘외교 다변화’, ‘글로벌 중추국가’ 같은 말은 쏟아졌지만 외교의 실제 반경은 전혀 넓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미국이요 오로지 한미동맹이다. 한국의 외교란 워싱턴에서 떨어지는 지시사항을 섬기는 ‘유사 외교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트럼프가 생뚱맞은 거짓말로 한국 대통령을 겁박하자 한국은 지레 겁을 먹고 호르무즈 파병을 검토하고 실사단을 중동에 파견하는 행태를 벌이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에다가 문화강국을 추구하는 나라가 미국에 무조건 연신 굽실거리고 있는 현실은 통탄할 일이다.

 

이제 한국은 제발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미국만이 내 세상”이라고 외치는 숭미 샤우팅은 이젠 그만. 팍스 아메리카나는 끝나가고 있다. 다극화 질서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음을 똑바로 보라. 우리는 BRICS 참여를 정식으로 검토해야 한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데 왜 미국의 눈치를 보는가. BRICS에는 중국과 러시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UAE, 이집트처럼 한국이 경제관계를 넓혀야 할 중견국들이 한자리에 있다. 국제결제, 개발금융, 인공지능, 에너지와 공급망을 논의하는 거대한 협의체다. 참가해서 우리의 이해를 주장하는 것과 밖에서 그들의 결정을 지켜보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국익에 도움이 될까.

 

SCO도 마찬가지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한국에 에너지와 핵심광물, 물류와 시장의 측면에서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니 이재명 대통령이 내일 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들과 회의를 여는 것이 아닌가. 중국과 러시아 역시 한반도 문제에서 피해갈 수 없는 당사국이다. 이런 나라들이 지역안보와 교통, 에너지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한국이 계속 빠져 있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 한미동맹이 SCO 가입을 막지 않는다. 튀르키예, 사우디, UAE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SCO와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가.

 

비슈케크와 뉴델리가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미국이 당장 몰락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 선언은 미국 하나만 바라보면서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말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쇠락하는 미국이 단말마적인 광기에 휩싸여 스스로 만든 국제질서를 관세와 제재와 전쟁으로 훼손하고 있을 때 이성과 도덕을 갖춘 중견국들이 인류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새로운 질서와 장치를 만들고 있다. 그래도 한국은 숭미의 그늘에서 그 변화를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진짜 외교는 내 판단의 자율성이다. 결국 자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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