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
오피니언
-
전국노동
-
오피니언
-
전국노동
-
지역소식
-
전국노동
-
전국노동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바르바로사(Barbarossa)’*로 명명된 작전명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바르바로사(붉은 수염)’는 고대 신성 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동방에 관심을 기울였다 해서 대소련전 작전명으로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르바로사 작전(1941년 6월 22일 ~ 1941년 12월 5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위시로 한 추축국이 소비에트 연방(소련)을 침공한 작전이다.(편집자주)
독일이 1941년 소련 침공 이후 1945년 항복할 때까지 계속된 이 전쟁을 보통 ‘독소전쟁’이라 부른다. 사실상 제2차 대전의 주전장(主戰場)은 ‘독소전쟁’이었다.
히틀러는 개전 첫날,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소련 비행장을 기습하여 지상에 있던 소련 항공기 1,200대 이상을 파괴하여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독일군은 북부(레닌그라드 방향), 중부(모스크바 방향), 남부(우크라이나 방향) 세 집단군으로 나뉘어 전격전(Blitzkrieg)을 펼치며 빠르게 소련 내부로 진격했다. 나치 독일은 단숨에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소련 지도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초반부터 ‘절멸(絕滅) 전술’을 펼쳤다.
독일은 작전 초기 대승을 거두었으나, 스탈린의 산업 시설 이전과 소련의 막대한 인적 자원 및 광활한 영토로 인해 전쟁은 장기화하였다. 마치 지난 2월 28일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장대한 분노(Epic Fury)’라는 작전명으로 이란을 전면 공습을 감행하여 무차별 파상 공세를 펼친 데 대해, 이란은 현재 전열을 가다듬고 총반격을 가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상황과 유사했다.
미국은 불과 침공 하루 전까지 이란과 제네바에서 3차 핵협상을 진행하면서 이란을 방심케 하고 대비를 약화하는 위장 평화 공세를 펼쳤다. 마치 히틀러가 스탈린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소련을 안심시키는 군사·외교적 기만 전략과 판박이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침공 12시간 동안 이란 영토 전역에 무려 900회 이상의 무차별적인 공습을 했다. 이는 단일 시간대 기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압도적인 인종 몰살폭격(沒殺爆擊)으로, 주권국가의 수도와 주요 군사·민간 인프라를 일거에 초토화하려는 극악한 전쟁 범죄행위였다. 과거 이스라엘 역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당시 기습폭격으로 이집트 등의 항공기 수백 대를 파괴하며 제공권을 장악한 바 있는 전형적인 침략 전술이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략전쟁이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이란 내 희생자가 이란 보건부 공식 집계(3월 25일 기준)로는 최소 1,500명 사망에 18,551명이 부상하였다고 한다.
침략자들의 노림수는 명백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와 고위 군 관계자 그리고 정권의 지휘부를 와해시키고 군사 기반을 무력화하는 이른바 ‘참수 작전’과 지휘 체계 와해에 전력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또한 반다르 아바스 인근 미나브의 해군 기지 근처 여학교를 미사일 공격을 해 여학생을 포함한 민간인 약 170명이 숨지는 등 무차별 공습으로 이란 민중을 공포에 떨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이스라엘의 오만한 계산은 빗나갔다.
지휘부를 타격하고 압도적인 폭력으로 공포를 심어주면 이란 민중이 굴복할 것이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망상은 침략 한 달이 지난 지금 철저히 부서지고 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의 기습적인 전격전(Blitzkrieg)으로 끝날 것 같은 독소전쟁이 무려 4년을 끌며 결국 히틀러는 자살하고 독일은 패전한다.
영국과 독일의 동상이몽, 영·독 해군 협정과 뮌헨 협정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서막은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다. 이어 히틀러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집어삼키고, 1940년 5월과 6월 불과 6주 만에 프랑스를 무너뜨렸다. 그 후 독일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도 기습해서 점령했다.
히틀러는 놀랄 만큼 단시간 전투로 서부전선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뒀다.
이제 독일은 서부전선의 마지막 교전국인 영국과의 일전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히틀러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끌려다녔다.
당시 독일은 영국과의 전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함대와 전투기가 부족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함대를 거의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35년 6월 18일 영·독 해군 협정을 맺으면서 영국은 독일에 영국 해군력의 35%까지 잠수함을 포함한 함대를 건설하는 것을 공식 용인했다. 이는 독일이 유럽대륙을 넘어 해상으로 군사력을 확장하는 길을 열어주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독일은 이 조약을 발판으로 합법적으로 군비 증강에 열을 올렸다. 특히 나치 독일 초대 공군최고사령부 총사령관 괴링(Hermann Göring, 1893~1946)의 주도하에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을 급속도로 육성하여 강력한 기동 전력을 구축했다.
1938년 영국 총리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1869~1940)은 독일의 수데텐란트 합병을 용인하는 ‘뮌헨 협정’을 맺으며 “평화를 지켰다”라고 국민에게 떠벌렸으나, 히틀러는 이를 영국의 유약함으로 보고 공세적 침략을 준비한다.
결국 영국의 이러한 묵인과 양보는 히틀러에게 군사적 전력을 증강할 시간과 명분을 제공하였고, 이는 유럽의 평화를 지키기는커녕 도리어 전쟁을 가속게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불러왔다.
언론인 제바스티안 하프너(Sebastian Haffner, 1907~1999)의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돌베개, 2016)에 영국과 독일의 동상이몽(同牀異夢)을 기록했다.
“영국의 협조로 도이칠란트에는 대단한 양보들이 주어졌다. 먼저 제국과의 합병을 원하는 도이치어 사용지역들을 차지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지역, 그리고 단치히까지도.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는 영국, 프랑스와 더불어 평화로운 유럽을 위해 협조하고, 무엇보다도 그가 새로 얻은 지역들에서 이 두 나라, 특히 영국과 힘을 합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이렇게 두 개의 구상이 서로 마주 서 있었다. 히틀러의 구상은 영국이 적어도 선의의 중립을 통해, 동부에서 대규모 도이치 정복 전쟁을 방관하는 일이었고, 영국의 구상은 도이칠란트가 더욱 커지고 더욱 만족해서 (‘유화되어’) 평화로운 유럽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상주의는 아니었다. 영국은 평화로운 유럽이 절실히 필요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져 영국이 대륙에 참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동아시아, 지중해, 근동에서 대영제국의 취약 지점들이 완전히 노출될 것이다. 그 경우 영국은 국경을 수정하려드는 공격적인 두 나라, 곧 일본과 이탈리아에 맞서 그때까지 유지해온 대영제국을 방어할 힘이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동상이몽 ‘독소불가침조약’
히틀러는 영국의 ‘유화 정책’을 역이용하여 서부전선에서의 승세를 타고 이제 프랑스와 영국에 칼날을 들이밀기 위해 소련과 193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볼셰비즘(소련)은 나치 독일의 최대 적이었고 파시즘(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소련의 최대 적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독일의 존립을 위협하는 유대·볼셰비즘으로 규정하고 최종적으로 파멸시켜야 할 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독일이 당장 소련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처럼 두 개의 전선(동부, 서부)에서 동시에 싸워야 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히틀러는 동쪽의 소련을 일시적으로 안정시켜야만 서부전선 폴란드와 프랑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스탈린 역시 독일을 적으로 간주했으나, 괴뢰 만주국을 건설하고 소련을 압박하는 일본의 위협이 있었다. 1939년 할힌골 전투(Battle of Khalkhin Gol)에서 일본군과 충돌했던 소련은 동쪽의 일본과 서쪽의 독일이라는 양면 전쟁을 피해야 했다.
할힌골 전투는 1939년 5월 11일부터 동년 9월 16일까지 몽골 인민공화국 영토에서 발생한 소련군, 몽골 인민군과 일본 관동군, 만주군 사이의 무력 충돌이다. 하지만 사실상 소련과 일본의 국지전이었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을 통해 독소전쟁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그사이에 노후화된 군대를 현대화하고 군수산업을 더욱 강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독소불가침조약’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특히 스탈린은 소련이 유럽 전쟁에서 빠지고 영·프가 히틀러와 싸우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앞의 저서에서 반反 소련 동맹과 ‘독소불가침조약’에 대해 설명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최종 목적이 소련을 향한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고, 히틀러도 스탈린이 그것을 모르게 하려고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1936년 이후로 여러 나라들, 곧 일본, 이탈리아, 몇 개의 작은 국가들과 ’반反 코민테른‘Anti-Comintern[반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실은 이미 반反 소련 동맹이었다. 조약 안에는, 도이칠란트가 소련에 맞선 전쟁을 벌일 경우, 소련과 이미 조약을 맺은 국가들은 선의의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비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 8월 23일에 도이칠란트와 소련은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여기 포함된 비밀 조항들은, 폴란드에 대한 전쟁에서, 소련이 1921년 폴란드에 양도한 폴란드의 동부 지역은 소련으로 반환되고, 나아가 발트 해 연안 국가들과 핀란드에서도 소련이 패권을 갖는다는 점을 인정했다. 약간 모호한 비슷한 약소들이 남동 유럽에 대해서도 이루어졌다.
소련 제1, 2차 5개년 계획 성공으로 유럽 제1의 공업생산국으로 발돋움
1928년 소련은 이미 스탈린이 주도한 제1차 5개년 계획(1928~1932)이 성공적으로 끝내고 농업국에서 철강, 화학, 자동차, 항공, 조선, 전기 등 중공업 기반의 공업국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군수산업도 크게 발전하여 군사적으로도 강대국의 대열에 올라섰다. 전 세계가 경제 대공황에 허덕일 때 외국 자본의 투자와 축적된 자본이 없는 조건에서 국내자본과 농업집단화정책 등으로 일궈낸 성과였다. 이후 제2차 5개년 계획(1933~1937)이 끝나는 1938년에 이르려서는 유럽 제1의 공업생산국으로 탈바꿈한다.
시민사회운동가인 이무열의 『러시아역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22)에 나오는 소련의 5개년 계획에 대한 평가다.
국제사회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이전의 러시아 제국을 훨씬 능가할 만큼 커졌고,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새로운 발전 모델로서 소련의 계획경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소련에서 확립된 새로운 사회질서, 사회주의 체제는 당시 공황으로 반신불수가 돼 있던 선진 자본주의국의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고, 후진국과 갓 독립한 신생국, 독립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횃불로 다가왔다.
그뿐 아니라 소련은 러시아 혁명 이전에 90% 넘었던 문맹률을 대규모 교육 캠페인인 ‘리크베즈(Likbez, 문맹 퇴치 운동)’로 10% 미만으로 낮추었다. 교육 수준이 낮고 문맹이 많았던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 교육 과정인 ‘노동자 학부(Rabfak, 랍팍)’가 설립되어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는 등 교육의 평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소련은 세계 최초로 무상의료제가 시행되고 노동자 연금제도 등 각종 사회보장 제도가 시행되면서 세계의 노동자, 농민 그리고 식민지 민중과 지식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소련은 1, 2차 5개년 계획으로 전력생산이나 중공업 같은 부분에서 미국·영국·독일 등의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영국·독일 등의 제국과 견줄 수 있는 군사 전력은 취약했다.
대표적인 예로,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까지 이어진 소련-핀란드 전쟁(겨울 전쟁)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소련이 단기간에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핀란드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소련군의 치명적인 취약점을 세계에 노출시킨다.
소련군의 치명적인 취약점은 12월의 혹한 속에 여름철 군복을 입고 전투에 참여하는 등 겨울 환경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또한 삼림과 늪지대가 많은 핀란드에서 기갑부대 중심으로 전투를 하다 보니 보급선이 길어져 전진이 멈췄고, 핀란드군의 습격에 취약했다. 또한 핀란드군은 기동성이 좋은 스키 부대를 활용하여 긴 도로에 늘어선 소련군 부대를 분리 및 고립시켜 각개 격파했다. 특히 소련은 숙련된 장교들이 대거 숙청되어 군 지휘 계통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소련은 핀란드 영토의 일부를 떼어내는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으나, 최소 사망자가 12만이 넘는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이는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독소전쟁은 ‘세계관 전쟁’으로 ‘나치즘’과 소련의 ‘대조국전쟁’
1941년 6월 22일 오전 3시 15분, 히틀러는 무모하게도 독소불가침을 깨고 190개 사단의 방대한 병력을 동원해 세 갈래로 나누어 소련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총 병력은 약 330만 명, ‘독소전쟁’은 북으로는 핀란드에서 남으로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캅카스(Caucasus)까지 거의 3,000㎞에 달하는 전선에서 수백만 대군이 격돌했다. 이른바 ‘독소전쟁’이다.
독일현대사와 국제정치사가 전공인 오키 다케시는 『독소전쟁: 모든 것을 파멸시킨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21)에서 ‘독소전쟁’을 군사사(軍事史)의 관점에서 매우 드문 전쟁이라 기록했다.
“전쟁의 양태도 적과 대치하며 진지를 구축하는 보병, 장갑부대에 의한 돌파 진격, 공정작전(空挺作戰, 적을 공격하거나 아군을 지원할 목적으로 항공기로 지상 부대를 적 후방에 침투시키는 작전-역주), 상륙작전, 요새 공략 등 현대 육지전의 거의 모든 패턴이 전개된, 군사사(軍事史)의 관점으로도 매우 드문 전쟁이었다.”
또한 앞의 저서에서 오키 다케시는 독소전쟁이 ‘나치즘’과 ‘유대족 볼셰비즘’의 투쟁, ‘세계관 전쟁’으로 간주했다.
“이 전쟁의 본질은 독일과 소련이 서로를 타협할 여지가 없이 전멸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를 전쟁 수행의 근간에 두고 그것을 위해 참혹한 투쟁을 철저히 실행한 점에 있었다.
약 4년에 걸친 전쟁을 통해서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는 집단학살과 포로학살 등 근대 이후의 군사적 합리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의미하기조차 한 만행이 계속 반복되었다. 이 때문에 독소전쟁의 참혹함은 상상하기 힘든 규모이다.
(중략)
독소전쟁이 이토록 비참한 지경에 이른 이유는 무엇일까.우선 총통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이하 독일 측 지도부가 소련과의 전쟁을 인종적으로 뛰어난 게르만 민족이 ‘열등 인종’ 슬라브인을 노예화하기 위한 전쟁, 나치즘과 ‘유대족 볼셰비즘’의 투쟁으로 상정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들은 독소전쟁을 ‘세계관 전쟁’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실행은 무자비해야 한다고 보았다.
1943년 3월 30일 소집된 독일 국방군 고급 장교들 앞에서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대립하는 두 개의 세계관 사이의 투쟁. 반사회적 범죄자 같은 볼셰비즘을 박멸한다는 판결이다. 공산주의는 미래에 대한 터무니없는 위협이다. 우리는 군인의 전우 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자는 지금까지 전우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전우가 아니다. 몰살 투쟁만이 문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지 않으면 적을 무찌를 수는 있지만 30년 이내에 다시 공산주의라는 적과 맞닥뜨릴 것이다. 우리는 적을 살려두는 식의 전쟁 따위는 하지 않는다.
히틀러에게 세계관 전쟁은 ‘몰살 투쟁’ 즉, 절멸 전쟁에 다름없었다.”
‘몰살 투쟁’, ‘절멸 전쟁’ 의도를 가진 히틀러에 대해 스탈린과 지도부는 코뮌주의와 민족주의를 융합시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소련은 일찍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물리친 1812년 ‘조국 전쟁’에 빗대어 이 전쟁을 파시스트 침략자를 격퇴하고 러시아를 지키기 위한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으로 규정했다.
피학살자 유족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동지애로 보듬은 신동숙
‘독소전쟁’ 초기, 소련은 수백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는 참극을 겪었다. 1941년 말까지 이동 학살 부대(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50만 명 이상의 민간인(주로 유대인)이 사살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은 나치 친위대의 사설 무장 부대이자 인종 말살만을 목적으로 삼은 민간인 학살 전문부대이다.
역사에서 나치의 홀로코스트만큼 유대인뿐 아니라 세계 민중 또한 감정적으로 분노하게 만드는 문제는 별로 없다. 하지만 역으로 지금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가자지구 집단학살과 이란에 대한 공격은 홀로코스트를 무색하게 한다. 당장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겪은 홀로코스트가 다른 대량 학살과 별개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잔혹한 학살에 맞서 세계 민중은 의분과 분노를 넘어 반제 자주 평화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난 2월 28일 국제 조폭 양아치 트럼프가 저지른 12시간 동안 쏟아진 900회의 폭격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중동 패권 유지를 위해 이란의 주권과 민중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미제국의 야만적 민낯 그 자체였다. 미제국의 무차별적인 공습과 파괴 행위로 인해 군사 시설뿐만 아니라 민간 인프라가 대규모로 파괴되었고, 그 결과 민간인 사상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수백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한 상황이다.
과거 우리 또한 6·25전쟁 전후로 끔찍한 민간인 학살을 겪었다.
미군정의 총칼을 등에 업고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자주·민주·통일 요구를 ‘빨갱이’로 몰아 무참히 도륙했다. 제주 4·3 항쟁에서의 무차별적인 초토화 작전과 여순 항쟁의 잔혹한 진압 그리고 6·25전쟁 전후로 자행된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민간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국가폭력은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집단학살(제노사이드)였다.
이승만 정권 12년은 그야말로 피의 통치였다. 그리고 그 학살을 묵인 방조한 배후는 미 제국이었다.
마침내 66년 전 ‘4·19혁명’으로 미 제국의 비호 아래 권력을 찬탈하고, 무고한 민중의 피를 빨아먹으며 연명해 온 이승만 독재 정권은 철퇴(鐵槌)를 맞는다. ‘4·19혁명’은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뿐만 아니라 수십만 명의 농민과 노동자, 지식인들이 골짜기와 바다에 수장되고 암매장당하는 참상 속에서 민중의 가슴 속에는 피맺힌 원한과 분노가 차곡차곡 쌓인 것이 폭발한 것이다.
4월혁명공간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과 청년 전위조직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은 12년 동안 동토의 땅 아래 암매장되어 있던 ‘민간인 집단학살’의 참상을 백일하에 드러낸 투쟁에 앞장선다.
먼저 경상도에서 시작된 진상규명 운동은 대구가 5월 30일 ‘경북지구피학살자합동위령제준비위원회’를 제일 먼저 결성하면서 주도했다. 이어서 6월 15일에 대구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경북피학살자유족회(경북유족회)’ 결성대회를 개최한다.
경북유족회는 선언문을 통하여 “우리들은 민주 건국 발전사상에 있어 유례없는 오점과 반민족적 죄과를 범한 동족 대학살에 희생된 원혼의 유가족들에 의하여 조직된 피의 결합체”로 규정했다. 그리고 당면 과업으로 ① 헌법에 규정된 기본 인권 보장, ② 예방 학살의 정치 도의 확립, ③ 학살 피해에 대한 국가 형사보상, ④ 합법적 절차를 통하여 관련자에 대한 집단 고발 및 처단, ⑤ 피학살자 원혼탑 건립, ⑥ 불법적 반민족 현상에 대한 비판 시정 등을 삼부에 건의·요구하고 전 동포들에게 학살과 대결하는 국민운동 전개 등을 제시하였다.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친일사대 독재자 박정희는 1차 인혁당과 마찬가지로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던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혐의로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조작해 신동숙의 부군 도예종을 비롯한 여덟 분의 열사들을 국가가 살인한다.
대부분 ‘사법살인’이라고 하지만 이는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법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비열한 꼼수이기에 필자는 ‘국가살인’이라고 부른다. 재심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국가가 사형을 집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신동숙이 가족처럼 지낸 분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간직한 6·25전쟁 전후 피학살자 유족들이었다. 경북유족회 조사부장이자 전 대구유족회장인 이복녕과 전국유족회 회원인 김현구 그리고 최찬 여사가 있다. 신동숙은 서로의 상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아픔을 간직한 유족을 동지애로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함께 살아갔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신동숙(19) 소련의 대조국전쟁, 레닌그라드를 사수하라! - 자기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운 사람들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5.02
신동숙(18) 나치 독일의 파멸을 부른 소련의‘대조국전쟁' - 피학살자 유족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동지애로 보듬은 신동숙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