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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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독단적 평화가 제도화될 때, 질서는 흔들린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고 있는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 창설을 위한 헌장 서명식이 2026년 1월 22일 다보스에서 열렸다. 트럼프 본인이 의장이고 세계의 갈등해결과 평화정착을 위한 방안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권한을 갖는다. 평화라는 말은 인류 보편의 가치처럼 들리지만, 국제정치의 역사에서 이 단어는 압도적인 힘의 행사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화는 목표라기보다 수단이었고 명분이었으며 때로는 면책 장치였다. 트럼프는 “평화위원회가 완전히 구성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서 기염을 토했다.

 

‘평화위원회’ 창설이 더욱 신경을 자극하는 이유는 맥락 때문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대통령을 제거한데 이어 그린란드 병합을 강력하게 추구하고 있다. 미국은 말한다. “까불면 죽는다.”(FAFO) “서반구는 우리 것이다.” 무력사용은 없을 거라고 21일 트럼프가 한 발 물러선 것 같은 인상을 주었지만, 그 말은 “어차피 순순히 양보하게 되어 있으니까”라는 조건 문장이 생략된 것에 불과하다. 주권과 영토, 국제법이라는 근대 국제질서의 핵심 개념들은 의미의 기반을 잃고 있다. 협상 가능한 자산일 뿐이다. 지금 예외적인 사건들이 연속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질서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오래된 질문을 떠올려야 한다. 질서는 규칙으로 유지되는가 아니면 힘으로 유지되는가.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질서는 힘이나 규칙만으로는 유지되지 않는다. 힘으로 만들어져 규칙으로 지속된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오늘날 세계관의 각축장인 세 개의 포럼(다보스, 보아오,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ㅡ 다보스: 규칙을 말하지만, 예외를 관리하는 공간

다보스 포럼은 서구 세계가 자기 자신을 설명해 온 담론의 중심이었다. 세계는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점진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묘사된다. 시장은 조정능력을 갖고 있고, 갈등은 정치협상으로 완화되며, 위기 역시 관리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포럼의 토대다. 그러나 트럼프와 평화위원회의 등장은 이 믿음을 통째로 흔든다. ‘힘’, ‘병합’, ‘미국 우선’이라는 제국주의적 어휘에 봉착한 다보스는 이질적인 현상을 자기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당초 AI 세상을 논의하려던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예외의 제도화다. 기존 규범을 방어할 상황이 아니다. 국제법의 약화를 정면으로 비판할 수도 없다. 그 대신 ‘현실주의’, ‘국가 이익’, ‘안보 환경의 변화’라는 말로 현상을 설명하고 흡수하려 애를 쓴다. 규칙을 어긴 행위에 집중하는 대신 기존 시스템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정당화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둘 수밖에 없다.

 

누군가 규칙을 흔들어도 그것을 ‘특수한 상황의 예외’로 포장할 수 있다면 시스템은 유지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예외가 허용되는 순간 규칙은 더 이상 규칙이 아니다. 규칙을 흔든 그 누군가는 앞으로도 계속 유사한 행동을 반복할 거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다보스는 지금 기존 질서를 관리하고 재설계하는 공간에서 난폭한 질서를 합리화하는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다. 다보스의 실패는 아니다. 그 한계일 뿐이다.

 

허리펑(何立峰) 중국 부총리의 1월 20일 개막식 연설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중국이 세계의 제조업 중심일 뿐 아니라 수요의 중심이 될 거라는 비전을 제시한 후, 보호주의 및 일방적 무역 제한 조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모든 국가에 공정한 국제규칙이 적용돼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규범에 기반한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과거 미국이 서 있던 자리에 지금 중국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공수교대(攻守交代)다.

 

ㅡ 보아오: 다자주의라는 이름의 대안 설계

보아오 포럼에서 발설되는 언어는 지금까지 다보스가 행한 언사와 유사하다. 다자주의, 자유무역, 협력, 안정과 같은 익숙한 어휘들이다. 그러나 이 언어들이 향하는 방향은 다르다. 보아오의 다자주의는 단순한 협력원칙이 아니다. 미국 이후의 세계를 상정하는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 미국이 ‘병합’과 ‘독단’으로 질서를 흔들수록 보아오는 주권 존중과 국제법, 지역 협력을 더욱 강조한다. “우리는 규칙을 지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안이다”라는 메시지다.

 

2026년 연례회의는 예년처럼 3월말에 개최된다. 다보스에서 허리펑 부총리가 던진 화두에 따라 불안정한 국제정세 속에서 아시아의 협력, 다자주의 강화를 위한 논의에 초점이 주어질 전망이다. 바야흐로 중국이 세계 다자무역체제와 경제협력의 중심축으로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베네수엘라, 그린란드 문제나 ‘평화위원회’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아시아는 더 이상 기존 질서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질서를 설계해 나가는 주체로 설 수 있다. 물론 보아오의 다자주의 역시 중립적인 것은 아니다. 규칙을 강조하더라도 그 규칙을 누가 만들고 해석할는지는 여전히 권력의 문제다. 따라서 보아오는 중국 중심 질서의 정당화 장치로 기능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보아오 포럼은 오늘날 가장 분명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미국이 규칙을 파괴할 때 세계는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규칙을 제시할 것인가.

 

ㅡ 포르투 알레그레: 관리되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 거부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리는 ‘세계사회포럼’은 ‘이단’의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다. 이곳에는 국가 정상도 글로벌 CEO도 없다. 대신 빈민 활동가, 노동자, 농민, 환경운동가들이 모여 세계를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 자체를 문제 삼는다. 이들에게 트럼프의 평화위원회와 병합 정치는 낯설지 않다. 미국은 본래 그런 나라다. 자본주의란 본래 그런 시스템이다. 평화를 명분으로 한 지배, 안정을 명분으로 한 폭력의 반복된 형태다. 포르투 알레그레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누구의 평화인가? 누구의 안전인가?”

 

이 포럼의 힘은 정책결정 능력에 있지 않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힘은 윤리적 기준을 재설정하는 능력이다. 다보스가 효율을 말하고, 보아오가 안정과 질서를 말할 때, 포르투 알레그레는 존엄과 정의를 말한다. 느리고 불편한데다 당장 체제를 바꾸지도 못하는 언어다. 그러나 권력의 균열이 생길 때마다, 규범의 와해가 일어날 때마다 가장 오래 기억되는 언어다.

 

ㅡ 다극화가 아니라, 다중 질서의 충돌

현재의 세계를 단순히 ‘다극화’라고 부르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권력의 분산이 아니다. 질서에 대한 서로 다른 상상들과 주장들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충돌하고 있는 상태다. 다보스는 관리 가능한 세계를 상정한다. 보아오는 재배치된 중심을 생각한다. 포르투 알레그레는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

 

트럼프의 ‘평화위원회’와 제국주의 정치는 세 개의 사고를 동시에 자극한다. 다보스에는 위기관리의 과제로, 보아오에는 대안 제시의 기회로, 포르투 알레그레에는 기존 질서의 도덕적 파산을 입증하는 사례로 작동할 것이다. 한마디로 트럼프와 마가의 ‘분탕질’이 세계를 들끓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ㅡ 한국의 전략: 편이 아니라 위치의 문제

이러한 다중 질서의 충돌 속에서 한국의 과제는 뚜렷하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무엇을 말할 것이냐다.

 

첫째, 다보스에서는 제도적 신뢰의 관리자로 행동해야 한다. 한국은 규칙 기반 질서의 실질적 수혜국이었다. 자유무역, 기술 규범, 기후 협력에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신뢰를 축적해야 한다. 둘째, 보아오에서는 전략적 자율성을 확장해야 한다. 아시아 협력에 적극 참여하되 특정 국가의 질서 설계에 종속되지 않는 거리 감각이 필요하다. 경제와 안보를 분리해 관리하는 고도의 전략 능력이 요구된다. 셋째, 포르투 알레그레의 문제의식을 외교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불평등, 노동, 기후 정의는 더 이상 시민사회만의 언어가 아니다. 이는 한국이 중견국을 넘어 규범을 매개하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핵심 자산이다.

 

ㅡ 세 개의 거울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가

다보스, 보아오, 포르투 알레그레는 세계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정당화하는지를 비추는 세 개의 거울이다. “규칙 없는 평화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한 포럼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세 거울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시야다. 그 시야를 잃는 순간 선택지는 줄어들고 대응은 늦어진다. 불안정한 세계일수록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 자체가 가장 강력한 힘이다. 진짜 대한민국이 갖추어가야 하는 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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