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ㅡ ‘낀 존재’에서 ‘빠지면 곤란한 나라’로-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2.27
미 B-52 전략 폭격기(아래)와 일본 항공자위대 F-15 전투기들이 동해상에서 공동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png.jpg
미 B-52 전략 폭격기와 일본 항공자위대 F-15 전투기들이 동해상에서 공동 훈련을 하고 있다.

 

2월 18-19일 간 주한미군의 대규모 공군 훈련으로 미·중이 서해상에서 첨예하게 대치한 일이 있었다. 우리는 자세한 내용을 몰랐다. 주권국가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주한 미 공군, 즉 제7공군은 하와이에 소재하는 미 태평양공군(PACAF)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다. 주한미군사령관은 간접적으로 간여한다. 문제는 제7공군을 포함한 주한미군은 훈련이나 작전에 대해 한국의 사전승인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한국에 통보할 의무도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이번 사건에 항의하는 한국 국방부 장관에 대해 주한미군 사령관 재이비어 브런슨은 “한국측이 제대로 통보받지 못한데 대해 유감”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훈련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국 내부의 보고계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내가 비난을 당하고 있음은 불만이다. 그리고 한미관계가 이렇게 된 것은 당신들 책임인데 왜 나한테 항의하느냐’ 라는 뜻일 뿐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실상이다. 분개해도 소용없다. 그러나 분노해야만 한다. 그래야 상황을 바꿀 의지가 생기고 우리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진정한 외교는 남이 우리 땅에서 함부로 못 움직이게 만드는 통제의 기술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우리가 통제는커녕 상황의 존재 자체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나라로 굴러 떨어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우리가 결정은커녕 공유 받지도 못한 군사행동이 우리 영토와 안보환경에서 서해를 넘어 미·중의 대치로 번져도 우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더 치욕적인 건 사후 처리다. 일이 커지자 돌아오는 말은 “우린 할 일 했고, 너희가 내부적으로 못 챙긴 탓”이라는 뜻의 “유감”이었다. 이쯤 되면 외교적 결례가 아니다. 주권의 작동방식이 무너진 것이다.

 

한국은 미국이 벌인 일을 대신 수습하고 변명하는 나라가 됐다. 우리가 미군에 항의한 것은 서해 공중 대치가 우리 의사는 아니었다는 얘기를 중국에 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한국이 미군의 행동을 놓고 중국에 해명하는 제스처를 취해야 하나. 국제정치에서 한 나라의 위상은 그 나라를 우회했을 때 상대가 치러야 할 비용으로 결정된다. 지금 우리는 우회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국가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권국가라면 훈련이든 위기관리든 한국을 거치지 않고는 매끄럽게 굴러가지 않는 구조를 설계해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강대국 사이에 ‘낀’ 나약한 존재로 묘사한다. 수동적인 객체일 뿐이다. 늘 선택을 강요받으며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반면 외양은 같더라도 ‘빠지면 곤란한 나라’가 있다. 상대방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상수가 되는 나라다. 외교의 승부는 기계적인 균형을 계산하는 데에서 갈리지 않는다. 배제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목표를 구체적인 정책 수단으로 구현해야 외교 담론이 내실을 갖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빠지면 시스템이 삐걱거리는 구조의 설계다. 당당하게 해나갈 일이다.

 

주한미군 문제는 이러한 설계의 논리가 예민하게 충돌하는 이슈다. 주한미군이 당분간 이곳 주둔을 계속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한국의 외교적 설계는 주한미군이라는 지렛대를 영리하게 활용하면서 그 운용이 우리의 통제권을 벗어나지 않도록 규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아울러 미군은 이곳에 계속 주둔하기를 바란다면 대한민국의 주권적 정책방향과 지침을 따라야 한다. 미군은 한국의 정책과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핵심은 한국이 미군을 한반도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때 발생하는 전략적 가치다.

 

지금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전략적 유연성은 우리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레드라인이다. 이번 서해 훈련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가지는 위험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주한미군이 한반도 방위라는 본연의 목적을 넘어 역외 분쟁에 개입하는 통로가 될 경우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중 간의 무력 충돌에 휘말리게 된다. 단순한 선택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생존이 걸린 위협이다. 우리 영토가 타국의 전쟁을 지원하는 전초기지로 전락하는 것을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된다. 미국이 정녕 그걸 원한다면 주한미군은 나가야만 한다.

 

만약 한국이 미군을 풀어주어 전략적 유연성이 전면화 되면 동북아에는 미·중 사이의 물리적 충돌을 걸러낼 완충장치가 사라진다. 한국이라는 ‘잠금장치’가 뽑힘과 동시에 미국과 중국은 직접적으로 맞부딪치는 파국적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대로 두면 주한미군의 공군 훈련으로 미·중이 서해상에서 대치한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일본은 주일미군의 유연성을 이미 기정사실화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시아 본토의 유일한 미군을 한반도 방어의 ‘붙박이’로 묶어두는 것은 우리 안보를 지키는 동시에 미·중의 직충돌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다.

 

이러한 접근법은 과거 ‘동북아 균형자론’이 지향했던 전략적 가치를 실질적으로 계승한다. 당시 균형자론은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는 능동적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우리의 자산을 구체적으로 조건화하지 못해 이상론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 본질적인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멋진 이론의 자랑보다 기능적인 설계가 긴요하다. 주한미군의 임무 범위를 국익에 맞게 제한하고 명문화해야 한다. 이로써 미국에게는 대중 충돌을 관리하는 거점으로, 중국에게는 미국과의 직충돌을 방지하는 안전판으로 한국을 인식시켜야 한다.

 

한미동맹의 성격 또한 재정의해야 한다. 동맹은 그 자체로 신성시되는 절대 가치가 아니라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다. 만약 동맹이 한국을 원치 않는 분쟁으로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동맹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다. 우리가 동맹에 기여하는 만큼 미국도 한국을 함부로 건너뛰기 어려워지도록 설계를 해야 한다. 빠질 수 없는 파트너가 되는 것, 그게 ‘동맹 현대화’의 실질이다. 반대로 한국의 우려가 반복적으로 무시되고 일방적 요구만 누적된다면 동맹은 결국 비용이 된다. 그때는 ‘헤어질 결심’을 굳힐 일이다.

 

과거의 ‘한반도 운전자론’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운전자론의 핵심은 한반도 정세 변화의 모든 과정에 한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프로세스 자체가 작동하지 않도록 구조화하는 것이었다. 그간의 실패는 담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관리 메커니즘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북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긴장을 관리하는 모든 경로가 결국은 한국을 통과할 수밖에 없도록 군사적, 외교적 접점을 촘촘히 짜놓아야 한다. 예컨대 5·24조치의 해제와 9·19 군사합의의 복원은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결국 미·중 경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고민할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빠졌을 때 상대방이 치러야 할 비용을 어떻게 높일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의 부재가 곧 미국의 동북아 전략 마비로 직결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전략적 마비란 주한미군의 유연한 이동을 허용해주는 것으로 풀 사안이 아니다. 미군의 한국 ‘상주’가 미군의 ‘출동’보다 안보 관리 비용을 현저히 낮춘다고 증명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이 동북아 안보 구도에서 빠지면 미국과 중국은 거침없이 직접 충돌하게 된다. 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것은 선언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주한미군 운용의 엄격한 제한과 완충 지대로서의 위상 확보라는 구체적 설계의 문제다. 강대국 사이에 ‘낀’ 나라는 언제든 밀린다. 하지만 ‘빠지면 곤란한 나라’는 계산된다. 우리 외교가 가야 할 방향이다. 문제는 용기와 설계 능력이다. 우리의 허락도 없이 주한미군이 함부로 움직이는 일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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