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3.16
트럼프 통상 압박 규탄, 대미투자특별법 절회 촉구 기자회견이 지난 2월 11일 미대사관 앞에서 개최됐다.png.jpg

 

3월 12일 국회가 통과시킨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 전략적투자의 운영 및 관리를 위한 특별법」(대미투자특별법)은 냉정히 말해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다. 대미 관세 협상 결과가 일본이나 유럽에 비해 매우 열악함에도 그에 상응하는 제동장치나 재검토 장치는 끝내 담기지 않았다. 일본은 5,500억 달러 투자 약속의 대부분이 보증과 대출이고, 유럽은 6,000억 달러 합의의 구속력을 놓고 여전히 내부 검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반면 우리는 거액 투자를 이행하겠다는 약속만 법으로 굳혔을 뿐 정작 판이 틀어졌을 때 멈춰 세울 손잡이는 달지 못했다.

 

법의 내용은 명료하다. 정부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전략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도록 한미전략투자공사와 기금을 만들고 위원회들을 두어 집행 절차를 제도화한 것이다. 상업적 합리성을 원칙으로 하되 안보나 공급망 등 급박한 상황에선 수익성이 좀 떨어져도 국회 상임위 동의를 거쳐 추진하겠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이 법은 공포 3개월 뒤면 곧장 시행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투자 대상사업들이 우리가 먼저 골라 미국에 제안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해 정부가 공개한 내용을 뜯어보면 투자 사업은 미국 대통령이 상무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투자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다. 우리 측 협의위원회는 그저 그전에 의견을 내는 수준에서 멈춘다. 결국 좁은 의미의 사업 선정권은 미국에 있고, 이번 특별법은 미국이 골라준 사업에 우리가 돈을 넣을지, 어떤 조건으로 집행할지를 국내에서 심사하는 장치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 터진다. 미국이 메뉴를 고르면 우리 행정부가 먼저 검토하고 국회는 한참 뒤에야 등장한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정부 내 위원회들이 1차 검토와 의결을 마치고, 국회는 상업성이 없는 예외적 투자에 대해서만 ‘사전 동의’라는 이름으로 개입한다. 국회가 주도적으로 사업을 선별하는 게 아니라 미국이 고르고 우리 정부가 걸러낸 안건을 마지못해 승인하는 기관으로 전락하는 셈이다. 행정부가 “이건 상업적으로 합당하다”고 판단해버리면 수많은 사안이 동의 절차 없이 단순 보고만으로 통과될 수 있다. 국회의 통제가 실효적일 리 만무하다.

 

더 큰 문제는 이 법에 ‘비상 브레이크’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연간 송금 한도나 외환시장 조정 요청, 현금흐름 배분 협의 같은 것들을 안전판이라고 내세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속도 조절 장치일 뿐이다. 미국이 약속을 뒤집거나 통상 환경이 요동칠 때 법 전체의 효력을 멈추거나 투자를 자동 정지시키는 일반 조항은 눈 씻고 봐도 없다. 법은 살아 움직이는데 멈출 수단은 없고, 투자 열차는 굴러가는데 되돌릴 장치는 부족하다. 제도라기보다 집행을 정당화하는 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느슨한 구조는 지금의 차가운 통상 현실과도 맞지 않는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이미 한국을 포함한 16개국을 상대로 불공정 관행에 관한 301조 조사에 착수했다. 우리 정부도 이 위협적인 일정을 확인하며 대응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특별법의 초점은 “어떻게 약속을 잘 지킬까”가 아니라 “상대가 합의의 균형을 깨면 어떻게 즉각 멈출 것인가”에 맞춰졌어야 했다. 이번 법은 전자에만 충실하고 후자엔 허술한 내용이다. 외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낙관 자체가 아니라 낙관을 상수로 고정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이 법에는 몇 가지 조항이 반드시 박혀 있어야 했다. 먼저 원금 손실 위험이 큰 투자는 예외 없이 국회 동의를 받게 했어야 한다. 또 미국의 신규 관세 부과나 합의 조건의 변동, 수익성 악화 같은 사태가 터지면 투자를 자동 정지하고 국회 재승인을 받게 하는 조항도 필수였다. 아울러 국회 보고 역시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니라 손실 가능성과 철회 비용까지 포함한 상세 평가서를 의무화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큰돈은 동의를 받고, 상황이 바뀌면 다시 묻고, 손해가 예상되면 집행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대처는 두 갈래다. 가장 깔끔한  길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에 재의를 요구하고, 자동 정지와 재원 통제 조항을 보강한 개정안을 다시 논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민석 총리가 3월 13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특별법 통과를 자랑하고 있던 마당에 거부권 행사는 물 건너 간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발효 전 3개월 동안 하위 규정에서라도 수익성 판단 기준과 외환 불안 시 집행 보류 절차를 강력하게 짜야 한다. 법이 허술하다면 시행령이라도 촘촘해야 한다. 법률에 정지 조항이 없다고 해서 하위 규범의 안전판까지 느슨하게 둘 이유는 전혀 없다.

 

다음은 미국의 301조 조사 결과에 따른 국회의 행동이다. 미국이 추가 관세를 때린다면 그건 이미 합의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신호다. 이때 국회는 투자에 대한 동의를 거부하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 기금 예산을 삭감하거나 조건부로 묶고, 국정조사와 후속 입법을 통해 투자를 멈춰 세워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미국만 일방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한미 FTA를 폐기하는 것이 답이다. 미국이 상호관세를 부과했을 때 진작 했어야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국가 간 합의는 상호성이 깨지는 순간 재검토 되어야 한다. 동맹과의 약속이라고 예외일 순 없다.

 

결국 이 문제의 뿌리에는 낡은 인식이 놓여 있다.  한미동맹이란 건드려선 안 될 성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대들면 나라가 망한다는 무한 공포다. 스페인은 미국에 군 기지를 제공치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무역거래를 끊겠다는 트럼프의 협박을 받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산체스 총리는 3월 4일 대국민 연설에서 “우리는 보복이 두려워 세계에 해로운 일에 공모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런 결기를 우리라고 못 보일 이유가 없다. 요는 자존이다. 우리는 보복이 두려워 국익에 해로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동맹은 국익을 위해 활용하는 도구이지 국익을 제물로 바치며 받들 대상은 아니다. 이 인식의 전환이 분명해야 행정부도 ‘상업적 합리성’이라는 말을 똑바로 쓸 수 있다. 동맹을 고려한다는 핑계로 불리한 투자를 합리화할 필요도, 동맹이 흔들릴까 봐 협상에서 먼저 굽힐 이유도 없다. 냉정한 계산 위에 선 동맹은 건강해지지만 굴복 위에 세워진 동맹은 상대의 요구만 키울 뿐이다. 이번 특별법은 결국 동맹에의 굴복선언이다. 다시 생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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