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
오피니언
-
오피니언
-
전국노동
-
전국노동
-
오피니언
-
오피니언
-
전국노동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의 집사 스티븐스는 단순한 충복이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하는 것을 ‘집사의 품위’라 믿는다. 주인의 도덕적 결함까지도 의심 없이 수용하고 완벽히 보좌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다. 그의 삶이 비극적인 건 억지로 굴복해서가 아니라, 그 복종을 고결한 덕목으로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 『동물농장』의 복서도 결이 같다. 누구보다 성실한 충성파다. 늘 생각보다 충성이 먼저 나간다. 스티븐스가 엘리트의 세련된 복종을 보여준다면 복서는 체제 순응을 상징한다.
어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도 묘하게 이들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토머스 핀천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때 혁명가였던 인물의 재기를 다룬다. 체제를 바꾸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지치고 길들여지고, 결국은 거대한 권력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방식으로 후퇴하는가를 보여준다. 우리 외교의 문제도 그와 닮았다. 처음부터 복종을 택한 것이 아니다. 오래도록 타자의 판단을 먼저 기준으로 삼다 보니 자기 판단의 근육 자체가 약해진 것이다.
요즘 한국 정부의 대미 안보 태도를 보면 이 세 이미지가 겹친다. 트럼프는 본인이 저지른 대이란 전쟁의 후폭풍을 수습하겠다며 동맹국과 주요 수입국에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 헌장은 무력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유엔 인권전문가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을 “불법적인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이 먼저 전쟁의 불을 질러놓고 이제 와서 다른 나라들에게 해협의 위험을 함께 떠안으라고 하는 모습은 거칠게 말해 강도짓의 뒷수습을 주변에 나눠 맡기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의 지적은 신랄하다. 신문은 “호르무즈의 안전은 군함의 숫자가 아니라 총성이 멎느냐에 달려 있다”고 꼬집었다. 위기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직시하라는 뜻이다. 미국이 자초한 전쟁 리스크를 유엔의 깃발도 아닌 ‘미국식 군사연합’으로 분산하겠다는 건 질서 회복이 아니라 책임 전가에 가깝다. 중국 정부가 군사행동 중단과 긴장 완화를 일관되게 촉구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일은 단호했다. 피스토리우스 국방장관은 “이것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며 불참을 확언했다. 영국의 스타머 총리도 이란 전쟁의 늪에 끌려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고, 프랑스 역시 군사 가담보다는 외교적 해법에 무게를 뒀다. 공통점은 확실하다. ‘자기 기준’과 ‘한계선’을 먼저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호주도 인상적이다. 함정을 파견하지 않겠다면서 덧붙인 말이 압권이다. “요청받은 일도 아니고, 우리가 기여할 일도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래야 한다. 상대가 SNS에 무엇을 올리든 정부는 정부의 원칙을 먼저 말하면 그만이다.
일본과 중국도 우리와는 딴판이었다. 일본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에서 파견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법적 틀 안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독자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중국은 아예 휴전과 대화를 요구하며 미국의 군사행동에 각을 세웠다. 일본은 법률을 방패로 삼았고 중국은 평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둘 다 사고의 출발점은 ‘자기 기준’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그놈의 원칙 대신 “미국과 긴밀히 소통하며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대통령실의 공식 반응이다. 원칙도 없이 그저 상대를 살피는 관리형 문장일 뿐이다. 트럼프는 자기 SNS 계정에 이런저런 나라들이 군함을 파견해 주기를 ‘희망(hope)’한다고 적었을 뿐이다. 공식적인 요청도 아니다. 공개된 것이라고는 트럼프의 압박성 발언과 ‘희망’뿐인데 한국은 상부에서 떨어진 명령을 받아든 하사관이다. 호주가 “안 간다”고 할 때 우리는 같지도 않은 요구 앞에서 “긴밀한 협의”부터 읊조린다. ‘선제적 자기종속’이다.
며칠 전 이재명 대통령이 주한미군 무기의 중동 재배치 문제에 대해 “반대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는 취지로 말한 것도 같은 궤를 그린다. 현실의 벽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현실 앞에서 판단을 미리 접어버리는 것은 천지 차이다. 현실이 부당하다면 바꿀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아직 결론도 안 난 사안에서 “우리의 기준은 이것이다”가 아니라 “관철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면 이미 사고의 중심축이 자주가 아닌 종속에 쏠려 있다는 방증이다.
2월 중순에 공식 출범한 트럼프의 ‘평화위원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라. 초라한 출범식 자체가 이미 좌절이었다. 서방 주요국과 중국, 러시아는 가입조차 안 했고 이란전 이후 동력은 완전히 꺾였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무슨 평화를 논할 수 있겠는가. 요지는 간단하다. 미국이 거창하게 판을 벌린다고 다 굴러가는 게 아니다. 각국이 제 목소리를 내며 선을 그으면 그런 구상은 자연스레 힘이 빠지는 법이다. 호르무즈 파병 요구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이유로 불참을 분명히 하면 굳이 정면충돌하지 않아도 스스로 멈추어 서게 되어 있다.
여기서 집사 스티븐스와 복서의 비유가 다시 뼈저리게 다가온다. 복종을 품위로 착각하고 충성을 판단의 대체물로 삼는 순간 반대는 고작 ‘투정’으로 전락한다. 한국 정부가 전매특허처럼 쓰는 “긴밀한 협의”나 “신중한 검토”는 외교적 수사라기보다 내 판단을 지우고 상대의 의중부터 읽으려는 습관적 굴종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주인공들의 체념이다.
한국 외교의 진짜 문제는 단발적인 유보 결정이 아니다. 우리는 왜 늘 ‘나중’에야 우리 자신의 기준을 찾는가. 왜 자주적 사고는 뒷전이고 미국과의 협의가 늘 우선순위인가. ‘다행스럽게도’ 지금 한국 정부는 다른 나라들의 반대 의견을 듣고 있을 것이니만큼 한국 정부도 ‘안전하게’ 반대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눈치작전 성공인 셈이다. 그러나 파병 요구에 최종적으로 반대한다 해도 그 과정이 종속적이라면 그건 반쪽짜리 자주에 불과하다.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건 과정의 독립성이다. 내 기준을 세우고 그에 맞춰 동맹을 조정해야지, 동맹의 안색을 살피며 내 기준을 뜯어고치는 나라는 끝내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없다.
한미동맹의 재설계? 지금의 사고방식으로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동맹을 신앙이 아닌 계약으로, 은혜가 아닌 이해관계로, 감정이 아닌 헌법과 국익의 눈으로 다시 봐야만 가능하다. 미국의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미국의 판단을 전제로 문장을 고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자주독립은 박제된 구호일 뿐이다. 거창한 제도보다 중요한 건 원칙을 먼저 뱉을 줄 아는 훈련이다. 명분이 없고 국제법에 어긋난다면 “우리의 원칙은 이것이다”라고 먼저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자주성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습관 끝에 비로소 쟁취되는 것이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