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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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럼 당서기장-국가주석과 베트남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한민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사진=베트남통신사)
 

1979년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는 ‘맛이 간’ 특공대장 커츠 대령이 자기를 암살하러 온 사자에게 자기가 무엇 때문에 문명세계와 단절하고 정글 속으로 들어왔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마디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다. 마치 다이아몬드 총알이 이마 정 가운데 박힌 느낌이었다고 커츠는 말한다. 베트콩 마을을 소탕하고 주민을 모아 콜레라 예방주사를 놓고 철수한 며칠 후 다시 마을을 찾은 커츠는 마을 어귀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어린 아이의 것을 포함해 그때 주사를 맞은 썰린 팔들임을 발견한다. 그 때 커츠가 본 것은 인간의 완전무결한 순백색 의지였다. 픽션이다.

 

2005년 하노이에서의 일이다. 의형제를 맺은 세 명의 베트남 절친과의 만찬 자리다. 루아머이(베트남 보드카)가 두어 순배 돌자 한 친구가 입을 뗀다. “한국은 고위 인사들이 올 때마다 과거사를 사과하는데 이제 그만해라.” 한국이 오고 싶어서 왔던 게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다고 덧붙인다. 서너 순배가 더 돌자 누군가 거든다. “한국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지.” 그리고 다들 취할 때쯤 마지막 녀석이 툭 한마디를 던진다. “우린 너희와 싸운 적이 없어.” 술이 확 깨는 말이었다.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얘기로 들렸다. 논픽션이다.

 

한국과 베트남 관계는 숫자만 봐도 특별하다. 연간 교역액은 950억 달러에 가깝고 베트남 진출 한국 기업은 만 개가 넘는다. 베트남에 사는 한국인이 20만 명, 한국에 사는 베트남인이 30만 명이다. 박닌과 타이응우옌 공단에는 한국 부품업체 간판이 끝도 없이 줄지어 있고, 하노이와 호치민의 한국 학교와 병원, 식당과 아파트는 이미 그곳의 일상이다. 한국의 읍내 마트나 공단 식당에서 베트남어가 들리는 풍경도 전혀 낯설지 않다. 박항서와 김상식 감독이 만든 베트남의 축구 열기는 도시 곳곳의 한국어 학원과 치킨집과 함께 베트남의 풍경이 됐다.

 

베트남 청년들에게 한국은 단순한 삼성 공장이 아니라 K드라마와 K팝, 유학과 취업, 나아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경로와 연결된 나라다. 한국 남성이 결혼하는 외국인 아내 중 베트남 여성이 제일 많다. 국가 간의 딱딱한 협정 위에 대중의 호감과 일상의 접점이 이토록 두텁게 쌓인 관계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이 정도면 외교관계를 넘어 거의 ‘공생관계’라 불러도 무방하다. 한·베트남 관계가 가진 저력이다.

 

양국은 1992년 수교와 더불어 급속히 깊어졌다. 한국은 과거사에 대해 사과한 유일한 나라다. 과거에 몰두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베트남은 한국의 사과를 정성으로 받았다. 하지만 관계를 밀어올린 실질적인 힘은 결국 현장에서 나왔다. 한국 기업들과 교민들은 베트남을 잠시 돈 벌고 떠날 곳이 아니라 오래 머물 거처로 삼았고 현지에서 삶을 일궜다. 한국의 개발협력(ODA) 역시 구호에 그치지 않고 도로와 전력, 산업 인력과 도시 기반 시설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로 남았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고 사과는 신뢰로 이어졌다.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위기도 있었다. 2004년 베트남 정부의 특별한 배려로 극비리에 500명에 가까운 탈북자가 서울로 이송된 후 한국 외무장관은 비밀 유지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베트남으로서는 당연히 한국의 신의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2007년 한국 농촌에 걸린 국제결혼 홍보 현수막에는 “베트남 처녀들은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란 저열한 문구가 나붙었다. 베트남 국민들의 존엄은 깊은 상처를 입어야 했다. 또 2008년 참전 용사들에 관한 보훈 입법에 포함된 문안에 반발하는 베트남을 무시하다가 예정된 정상외교 일정이 흔들린 사건도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식의 문장이 문제였고, 그렇다면 당시 베트남은 민주주의를 파괴한 주체가 되고 마는 것이라는 정당한 논리였다.

 

베트남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놀라운 자존의식이 흐른다. 그들은 숱한 침략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의 굴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를 몰아내고 곧바로 미국과 싸우게 되는 상황에서 호치민 주석이 국민들에게 말한다. “미국과의 전쟁이 1년 안에 끝날지, 10년이 갈는지, 100년이 걸릴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국 이긴다는 사실입니다.” 커츠 대령을 돌아버리게 만든 순백색의 의지다. 술자리에서 들었던 “우린 너희와 싸운 적이 없어”라는 말 역시 결과 궤가 같다. 위대한 국민이다.

 

한·베 관계 융성의 핵심은 베트남이 과거를 잊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현재의 행동으로 판단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한국은 수교 뒤 진지하게 공장을 세우고 일자리를 만들었고, 사회 인프라와 인재 양성에도 오래도록 돈과 사람을 넣었다. 이제 한국은 베트남인들에게 전쟁의 한 장면으로만 남아 있는 나라가 아니다. 과거의 상처가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결코 과거에 발목을 잡히지 않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존엄과 자율성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청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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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오전 착공한 호치민시 행정센터와 주요 사업 개요(사진=베트남통신사)

 

우리 두 나라 관계가 지금 어느 수준인지는 이재명 대통령의 4월 21-24간 국빈 방문이 잘 보여준다. 정상회담의 의제는 더 이상 추상적인 우호 증진이 아니다. 반도체와 배터리, 공급망, 전자정부와 데이터, 스마트시티, 호치민 철도 같은 구체적인 미래형 사업들이 두 정상 앞에 올려졌다. 호치민 철도 사업은 단순한 시공을 넘어 차량과 신호, 운영과 금융까지 묶은 종합 패키지다. 디지털 협력 또한 문화 교류를 넘어 인재 양성과 데이터 활용 단계로 진입했다.

 

작년 8월 서울을 찾고 10월 평양을 방문했으며 올해 4월 초 베이징을 찾았던 또 럼 주석의 행보를 종합해 보면, 베트남은 한국에게 경제, 통상, 투자 및 문화의 파트너를 넘어 중국과 북한을 읽어내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외교 동반자라는 점이 선명해진다. 서울에서는 기술을 챙기고 평양과 베이징에서는 외교 지평을 넓히는 베트남의 움직임은 매우 전략적이다. 한국으로서는 베트남인의 배포와 함께 외교적 자율성을 깊이 배우고 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 외교가 오직 한미관계에만 매달리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한미동맹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도와 베트남, 아세안과 글로벌 사우스를 향한 다변화 전략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베트남은 경제와 안보, 문화가 한데 얽혀 있어 그 전략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상대다. 한국이 진정으로 외교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면 베트남은 일시적 협력 파트너나 산업적 하청 기지가 아니다. 미래를 함께 설계할 동반자다. 한·베관계는 성장할 여지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모델로 정성껏 키울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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