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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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1961.2.8-3.2)  가두 시위운동 중인  시위대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1년 2월 체결된 ‘한미경제협정’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양키 고 홈!” 이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1950년대 이후 남한에서 최초의 조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혁신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 및 대학생들은 그 협정이 한국의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하며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게 하는 불평등조약이라고 비판했다.(본문 중에서) 


사회학자이자 ‘세계체제론’을 확립한 이매뉴얼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에 따르면, 패권국가의 세 가지 조건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생산, 유통, 금융’이다. 이 조건에 따라 근대 이후 패권국가가 된 나라는 네덜란드, 영국, 미국 세 나라뿐이었다. 월러스타인은 15~16세기 대항해 시대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교역에서 우위 자리를 지켰지만, 두 나라 모두 생산과 금융이 발전하지 못해 패권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영국은 근대 패권국가의 세 가지 요건에 범죄적인 수탈과 착취를 더 해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대영제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던 영국도 1차 대전에 이어 2차 대전까지 겪으면서 국가의 산업 기반과 인적자원이 고갈하면서 쇠락했다. 특히 약탈당했던 인도, 아프리카 등지의 식민국가들이 자주독립하면서 영국은 몰락해 갔다.

 

현재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미국 트럼프의 운명도 ‘대영제국’의 몰락과 마찬가지로 끝이 보인다. 

 

지난 2월 9일 발간한 뮌헨 안보 보고서는 트럼프를 ‘국제질서의 가장 두드러진 파괴자’로 명명했다. 또한 ‘파괴의 한가운데서(Under Destruction)’에서 세계가 ‘파괴적 정치(wrecking ball politics)’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즉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유럽이 오랜 기간 구축해온 ‘대서양 동맹’을 거대한 철구(鐵球)를 휘두르듯 해체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고 비유했다.

 

사략선(私掠船)의 약탈, 노예 삼각무역, 아편 삼각무역으로 ‘대영제국’을 건설 

 

영국이 ‘대영제국’이라는 패권국가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 볼 수 없는 악랄한 독자적 수익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식민지를 착취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은 월러스타인이 제시한 패권국가의 조건에다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범죄를 저지르면서 약탈했기에 가능했다. 

 

일본 입시학원 강사 우야마 다쿠에이(宇山卓榮)는 『역사로 읽는 경제』(라이프맵, 2017)에서 패권이라는 것은 그 본질상 범죄적인 수탈로 성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영국의 악랄한 수탈시스템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16세기의 사략선(私掠船)의 약탈, 제2단계는 17~18세기의 노예 삼각무역, 제3단계는 19세기의 아편 삼각무역이다.

제1단계인 사략선은 국왕의 특허장을 얻어 외국 배를 포획하는 민간 선박으로, 국왕이나 귀족이 자금 원조를 한 해적선이다. 영국의 사략선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무역선을 끊임없이 습격하였다. 약탈한 화물을 매각한 이익은 국왕이나 귀족 등 출자자에게 환원되어 영국의 초기 자본축적에 기여했다. 이 해적사략선을 지원한 스폰서 목록에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름도 있다.

영국의 수탈시스템 제2단계는 17세기 후반 이후의 흑인 노예무역이다. 영국은 아프리카에 무기를 건네고 흑인 노예와 교환했다. 아프리카의 흑인을 카리브해의 서인도 제도로 끌고 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고, 여기서 생산된 설탕을 영국으로 가져오는 삼각무역을 했다. 흑인은 ‘검은 화물’, 설탕은 ‘하얀 화물’로 불렀다. 영국에 충분히 공급된 설탕은 영국인의 칼로리 공급원이 되었다.
(중략)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1,000만~1,500만 명의 노예들이 아프리카로부터 강제로 옮겨졌다. 이에 따른 결과로 아프리카에서 급격히 줄어든 현지 흑인 노예를 사들이는 비용은 늘고 설탕·면화의 생산량 증대에 의한 판매가격 저하로 흑인 노예무역의 이익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영국 내에서 흑인 노예무역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해져 영국의회는 1807년 노예무역금지법을 제정했다. 그럼에도 노예무역은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원면을 계속 수탈해 공급했고 포르투갈령 브라질에서 설탕의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원면·설탕의 가격이 하락하는 추세가 지속되자, 수익성이 떨어지는 노예무역은 자연 소멸되었다. 노예무역이 없어진 것은 인도적인 이유라기보다 오히려 경제적 이유가 컸다. 영국은 흑인노에를 악착같이 착취했고 더 이상 이윤이 나지 않아 노예무역을 접은 것이다. 영국은 이러한 흑인노예무역을 밑거름으로 삼아 패권국가가 된다.

노예 삼각무역이 쇠퇴하면서 19세기 영국은 인도의 아편과 중국의 차를 매개하는 삼각무역을 시작했다. (영국의 3단계 수탈).”

 

불법적인 인신매매(노예무역)와 마약판매(아편무역)로 부를 축적하며 ‘대영제국’으로 군림

 

영국의 3단계 수탈의 정점은 아편이었다. 아편은 덜 익은 양귀비 열매에 상처를 내어 유출되는 액즙으로 만든 마약이다. 

 

18세기 말부터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중국 시장에서 영국의 주요 면직물 등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오히려 차를 마시는 습관이 퍼지며 영국은 중국 차를 계속 사들여야 했고 은으로 값을 지급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1784년 영국에서 차세(茶稅)가 인하되면서 중국 차의 소비는 급증했다. 점차 무역 적자가 심화하고 은이 빠져나가자, 영국은 인도에 면직물을 비싸게 수출하여 남긴 이익으로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고 차를 수입하였다.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여 확보한 은으로 중국의 차나 도자기 등을 사들여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영국에서 인도, 인도에서 중국, 그리고 중국에서 영국으로 이어지는 불법적인 소위  ‘삼각무역’으로 ‘대영제국’으로 군림했다.

 

우야마 다쿠에이는 앞의 저서에서 영국의 아편무역과 청의 은(銀) 유출에 대해 정리했다. 

 

“자딘메디슨 상회(Jardine Matheson Co.)와 같은 무역회사가 중국으로의 아편수출을 전담해 큰 이익을 올리자, 이번에는 중국 쪽에서 은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자딘메디슨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별동대 역할을 담당한 민간 무역회사로, 1832년 마카오에 설립되어 아편무역을 전담했다.

당시 청나라의 세제는 지정은 제도였으므로, 납세 역시 은(銀)으로 해야했다. 아편무역으로 은이 대량 유출되며, 중국의 은 가격이 거의 두 배로 급등했다. 당연히 납세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청 왕조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해 아편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아편 흡입자를 사형에 처하는 등 엄중한 조치를 취했다.”

 

청 왕조는 아편중독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편은 이미 사회 곳곳에 침투했고 1830년대 후반 적어도 200만 명 이상이 중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특히 중국 조정 또한 마약에 중독되었다. 

 

황제 도광제(道光帝, 1782~1850)로부터 아편 단속을 명받은 임칙여(林則余, 1785~1850)가 조정의 고관들을 모이게 한 적이 있는데, 아편에 중독된 관리가 두 시간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금단증상 때문에 몸부림을 쳤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1839년 임칙여는 광저우로 가서 영국 상인의 아편 2만 상자를 몰수해 소각하고 영국 상관의 봉쇄를 강행했다. 화가 난 영국은 청나라를 무역으로 제재하기 위해 1840년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인신매매(노예무역)와 마약판매(아편무역)라는 범죄적이고 반사회적인 수법으로 ‘대영제국’이라는 패권을 장악했다. 영국과 같은 극악무도하고 약육강식의 패권 행태가 당시 국제사회의 현실이었다.

 

 문명국과 비문명국으로 구분한 ‘만국공법’

 

제1·2차 아편전쟁은 중국이 그동안 예부(禮部)가 당당했던 외교 관련 업무와 양무(광산과 철도 관련 정책 등)를 담당하는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설치하여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하게 했다. 중국은 영국과 같은 패권국가와 주권국으로 대등한 관계를 위해 국제법 ‘만국공법(萬國公法,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국공법’은 미국의 법학자인 헨리 휘튼(Henry Wheaton, 1785~ 1848)이 1836년에 출판한 국제법 책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동아시아에 전문이 소개된 국제법 책으로 당시 서구 문물이 들어오고 있던 동아시아의 정치 및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서구식 주권, 조약, 국제법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서구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맺고 강제적인 국제 규칙을 따라야 했다.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휴머니스트, 2012)에 나오는 한·중·일 3국에 영향을 끼친 국제질서 규칙인 ‘만국공법’이다.

 

“국제법은 만국공법이라고 불리며, 동아시아에서도 널리 전파되었는데, 청·일본·조선(대한제국)은 이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청은 1860년 영·프연합군에 의한 베이징 함락 이후, 서양과의 교섭을 위해 《만국공법》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중략) 그러나 청 정부는 만국공법을 그대로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서양과의 평등한 국제관계를 만들기 위한 전제로 영사재판권, 협정관세권, 편무적 최혜국 조항 등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지 않은 채, 기존의 화이질서를 여전히 유지하면서 공법에 규정된 조항만 준수함으로써 서양 각국의 침략에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일본은 중국에서 《만국공법》이 번역되자마자 수입해 간행했다. (중략) 메이지 정부는 만국공법을 국제적인 보편적 규범으로 받아들여 개국을 정당화하고, 서양과의 조약을 대등한 조건으로 개정하는 데 근거로 활용했다. 또 메이지 정부는 1876년 조선과의 개항 교섭에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만국공법》을 근거로 조선이 자주국임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여전히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고 주장하는 청 정부와 논란을 벌였다.

조선 정부는 1882년 이후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만국공법》에 규정된 주권과 열강 간의 상호 보장이라는 조항을 활용해 국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청의 내정 개입으로 조선의 주권이 침해당하자 만국공법의 실효성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한편, 1897년 대한제국은 블룬칠리의 《공법회통》 조항을 적극 활용해 황제권 강화와 대외 독립의 근거로 삼았다.

이렇듯 중국은 화이질서를 유지하는 가운데 서구 열강에게 침략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잡고 여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만국공법을 활용했다. 한편, 조선은 만국공법을 이용하여 자주독립국으로 인정받으려 했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만국공법은 표면적으로는 만국 즉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평등한 법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서구 열강이 힘을 바탕으로 자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수단으로 작용했다. 즉 만국공법은 주권국가 간의 형식적 평등과 영토 주권을 강조했으나 사실은 문명국과 비문명국을 구분하여 식민 지배와 불평등 조약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서구 열강과 맺은 한·중·일 3국의 불평등 조약들

 

동아시아는 만국공법으로 ‘조공-책봉 체제’의 전통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 국제관계의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불평등한 국제질서 속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중국은 1840년 1차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불평등한 체제에 편입된다. 영국은 1842년 양쯔강 하류 지역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난징까지 이르렀다. 결국 청은 영국에 굴복하고 중국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한다.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에서 정리한 한·중·일 3국의 서양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이다.

 

“중국은 1844년에 미국과 왕샤조약을, 프랑스와는 황푸조약을 체결했다. 1851년에는 러시아와 이리·타르바가타이(塔爾巴哈臺)통상장정을 체결했다. 열강들과 맺은 이러한 불평등 조약은 중국에서 조약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1858년과 1860년 중국과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사이에 톈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에서 열강의 주요 특권이 확립되고, 조약 체제 또한 어느 정도 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중국은 1860~8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중략) 이후 중국이 열강과 맺은 조약은 약간의 조정은 있었지만 기본 틀에는 변화가 없었다.

일본은 1858년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었는데, 이를 안세이 5개국 조약이라 통칭한다. 조약은 통상 항구 개방, 영사재판권, 협정관세 등 외국에 특권을 부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과 평등한 관계를 실현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1871년부터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일본은 1876년 조선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해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다.

조선은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서구 열강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조선은 일본과 수호조규 속약을 체결했으며, 다시 영국, 독일과 각각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84년과 1886년에는 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와도 통상조약을 맺었다. 열강은 조선에서 영사재판권, 협정관세권, 내륙 통상과 최혜국 대우 등의 특권을 얻었다. 이렇게 조선도 일본을 포함한 서구 열강의 불평등 조약 체제 속에 편입되었다.”

 

조약 체제(Treaty System)는 국가 간 서면 합의(조약)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국제질서이다. 그러나 근대 조약 체제의 문제점은 불평등한 교역 조건과 더불어 소위 ‘치외법권(extraterritoriality)’의 행사였다. 

‘치외법권’은 외국인이 주재국의 국내법 적용을 면제받고 자국 또는 국제법상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즉 주재국 영사가 자국의 법률에 따라 자국민을 대상으로 사법 관할권을 행사하는 영사재판권(consular jurisdiction)을 가리키는데 열강이 불평등 조약을 통해 누리는 일방적 특권이었다.

 

 일제의 불평등 조약의 일방적 특권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

 

1875년 9월 일본은 식수 보급 및 해안측량을 핑계로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강화도에 무단 침투시켜 조선 수비대와 교전을 유도하고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이듬해 1876년 2월 조선의 개항과 식민지화의 발판을 마련하는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 이는 일본이 미국에 당한 포함외교(砲艦外交)를 재연한 것으로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이었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장으로 선정하고 일본의 조계(租界)가 설치되고 치외법권과 해안측량권도 부여되었다. 이때 조선은 일본에 치외법권의 일환인 영사재판권을 내어주면서 일본인이 조선에서 죄를 지어도 조선 법원이 아닌 일본이 재판토록 했다. 

 

치외법권은 일본이 피지배 국가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보호하고, 체류 국가의 법질서에 복종하지 않는 현재의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처럼 무법적 불평등 장치였다. 특히 치외법권을 악용하여 1880년 4월 서울에 일본공사관이 개설되자, 일제는 공사관 수비를 구실로 일본군을 들여놓는다. 그뿐 아니라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핑계로 ‘한국주차군’ 사령부를 설치한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난 후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1910년 강제 병합 때까지 조선을 간접 지배한다. 조선은 형식적으로 주권은 있지만, 껍데기에 불과하였고 사실상 일본의 통감이 통치했다. 또한 일본은 통감부와 함께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하여 일본 거류민의 보호·감독을 명목으로 경찰권과 재판권을 행사하며, 조선의 사법권을 배제하고 치외법권을 부여받았다. 

 

치외법권 행사로 조선은 사실상의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박해와 학대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태의 범죄를 저질렀다. 일본 민간인들은 조선인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살인·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물론 일본 군인 또한 민간인 못지않게 절도·강도·토지점탈·살인·구타 등의 범죄를 자행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혁명선언’에서 일본을 강도로 못 박으면서 1910년 8월 22일 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된 강제 병합 전후의 만행을 폭로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내와 못(川澤)·철도·광산·어장…및(乃至) 소(小)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세·연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기타 각종 잡세(雜稅)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중략)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지푸라기(草芥)로 보아, 을사(乙巳) 이후 13도의 의병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의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露領)·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사는 사람들(居民)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태운다(燒火한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욕보인다(汚辱한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몸(一身)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도다”

(신채호 『조선혁명선언』(앎과 함1, 1974)

 

 점령군 미국의 치외법권 특권과 주한미군 주둔 

 

치외법권은 일본이 국권 침탈의 도구로 이용되어 조선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줬다. 이후 치외법권은 일본과 조선의 강제 병합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없어진다. 

 

그러나 없어진 치외법권이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진군한 미군에게 또다시 치외법권의 특권이 부여된다. 

 

여기에 6·25전쟁 발발 후 한 달도 안 돼 7월 12일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지휘권을 귀하에게 양도한다”라고 통고한다. 이승만은 미국에 치외법권의 특권뿐만 아니라 군 통수권마저 내주는 굴종적 사대매국을 저지른다. 

 

이는 1948년 8월 단독정부 수립 이후, 미국이 경제적 부담과 군사 전략적 이유로 1948년 9월부터 단계적 철수를 시작하여 1949년 6월 30일 고문단을 제외한 전투 병력 전원을 철수하면서 미군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한 지 1년여 만의 일이었다. 이승만은 국회의 동의 없이 일사천리로 처리한 것이다. 

 

또한 이승만은 한국군 총참모장 정일권에게는 “귀관은 이후 유엔군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라고 명령했다. 이승만의 통고와 명령은 조약이나 협정으로 성문화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회의 비준도 받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당시 한국의 임시수도 대전에서 한국과 미국 간에 체결된 주한 미군의 지위 및 재판 관할권에 관한 협정으로 소위 ‘대전협정’이라고 불린다. 

 

이후 1954년 11월 18일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10월 1일 체결)에 의해 주한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국은 한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내정에도 더욱 깊숙이 간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은 미국을 긴장시켰다. 

4월 19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에 직면해 이승만 정부는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국은 4·19혁명으로 국익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재봉 교수는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네잎클로바, 2018)에 당시 급박한 미국의 상황을 설명했다.

주한미군 당국은 유엔군사령부 이름으로 한국 군대가 시위에 대처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월터 매카노기(Walter McConaughy) 주한 미국대사는 이승만을 찾아가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이 가담하고 있지 않지만 신속한 대응책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폭발적인 현 상황을 이용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군사령부의 책임이 “(한반도에서) 안전하고 안정된 작전기지를 유지하는 중대한 이익을 미국에 제공하는 것”인데 이것이 위험에 빠져 있다는 점을 부각하며, 신속한 수습 정책을 취하라고 요청했다.

 

 4월혁명 이후 반미감정의 확산 주범, 주한미군 치외법권

 

이승만이 하야한 4월 27일부터 6월 14일까지 혁명에 숨죽이고 눈치를 보던 보수 기득권 세력이 과도정부를 장악했다. 먼저 대통령 권한 직무대행에 수석 국무위원인 허정 외무장관이 취임했다. 허정은 4월 28일 가장 먼저 미국 대사 매카나기를 만나, 눈도장을 찍고 미국의 지지를 약속받는다. 그리고 5월 3일 허정은 시정방침을 발표한다. 첫 번째가 확고한 ‘반공 정책’으로 이승만의 ‘반공 정책’을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4·19혁명 이후 7·29 민·참의원 선거로 탄생한 제2공화국(1960년 6월 15일 ~ 1963년 12월 16일,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의 실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 있었다.

 

앞의 저서에서 이재봉 교수는 4월혁명의 영향으로 장면 내각과 미국이 반미감정의 확산으로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장면 내각이 들어선 뒤 장면과 미국을 가장 곤란하게 만든 것은 4월혁명의 영향으로 불붙은 민족통일운동과 반미감정의 확산이었다. 1960년 6월 재미동포 김용중과 일본에서 귀국한 김삼규에 의해 시작된 통일논의는 7·29 총선을 계기로 진보적인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아가 언론과 문단 및 학원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 통일론은 대부분 자주와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한 교류나 중립화를 표방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의 자주는 외세의 배격을 의미했고, 외세의 배격은 주한미군 철수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1954년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주한미군이 주둔하였지만 1967년 2월 9일 ‘주한미군지위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 SOFA, 1966년 7월 9일 체결)’이 발효되기 이전까지의 미군 범죄는 오로지 미군 당국이 단독으로 사법권을 행사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주한미군의 특수 지위 즉 치외법권을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주한미군의 특권 치외법권이 4월혁명 이후 미국에 대한 불만이 반미구호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재봉 교수는 같은 저서에서 1961년 2·8한미경제협정에서 나온 ‘양키 고 홈!’ 구호가 공개적으로 나온 것은 불평등조약 때문이라고 했다.

 

통일운동은 날로 확산되어 1961년 초까지 전국의 각 대학교 및 고등학교 20여 곳에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고, 사대당을 비롯한 일부 혁신세력은 여전히 한국의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거나 남북교류를 촉구했다. 특히 미국과 직접 관련된 문제로 1961년 2월 체결된 ‘한미경제협정’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양키 고 홈!” 이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1950년대 이후 남한에서 최초의 조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혁신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 및 대학생들은 그 협정이 한국의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하며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게 하는 불평등조약이라고 비판했다. 전국적으로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그 협정의 즉각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하기도 했다. 수천 명의 주한미군부대 종업원들 역시 한미행정협정(SOFA) 체결을 촉구하는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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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에게 보내는 촉구공개장(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

 

 자주통일을 외쳤던 도예종과 4·9통일열사

 

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 1960년대 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반미구호가 나온 것은 주한미군의 횡포와 범죄였다고 설명했다. 

 

1961년 3월 22일 혁신계 30여 단체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한 궐기대회에선 “장면 정권 타도하자”라는 수준을 넘어서 “외세에 의존하는 장 정권 물러나라” “미국놈들 물러가라” 등의 반미 구호가 공개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반미구호엔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주한미군의 횡포였다. 57~60년간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민간인이 7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미군은 한국인의 목숨을 가볍게 여겼는데, 이에 대해 누적된 분노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4월혁명을 겪으면서 6·25전쟁 이후 최초의 반미구호가 나온 것은 주한미군이 그동안 저질렀던 횡포와 범죄였다. 하지만 1961년 2월 8일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과 3월 22일 ‘2대악법반대투쟁’은 또 다른 이유 즉 경제 예속과 외세에 의존한 장면 정부 때문이었다. 

 

이때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과‘2대악법반대투쟁’에 나섰던 분은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과 청년단체인 민민청과 통민청의 성원인 4·9통일열사였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의 도예종 선생의 ‘민주화운동관련자 인정’에 나오는 이력이다.

 

도예종(1924. 12. 25. 생)은 대구대학을 졸업한 후 1958. 상주고교 교원으로 근무하였고, 1960. 4·19 당시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하면서 같은 해 5월경 영주교육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민주당정권에서 발령을 내지않아 동직을 수행하지 못하였고, 1960. 10.경 당시의 혁신계활동에 참여하여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에 가입, 민민청 경북맹부 간사장, 1961. 4.경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 중앙상무집행위원회 조직부책이 되어 한미경제협정 반대, 일본경제인 입국반대, 이대악법반대 등에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5.16쿠데타 이후 당국에서 수배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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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민청 성명서

 

신동숙 여사가 남편 도예종 선생이 4·19혁명 후 활동에 대한 증언이다.

 

4·19혁명 후 남편은 교원노조가 대구에서 결성되자, 자기가 교육계를 혁신하겠다고 경북 영주군 교육감 선거에 나가 당선됩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정부가 미는 후보가 낙선되었고, 남편은 교육경력도 짧다는 등 이런저런 핑계로 발령을 내지 않아서 교육감에는 취임하지 못합니다.

이후 민주민족청년동맹이라는 합법적인 혁신청년단체에서 남편은 경북간사장 일을 맡아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1961년 4·19 난 후 첫 삼일절 행사 때 대구 달성공원에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앞에서 남편이 연설하시는데 청중을 끌어들이는 힘이 엄청났어요. 청중들이 감동하는데 저의 남편이지만 새삼 대단한 분이라 느꼈습니다. 

저에게는 그 강연이 처음이자 마지막 대중강연으로 기억됩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저가 안타까운 것이 자기가 가진 생각, 특히 자주통일에 대한 연설을 잘하시는 장기를 살리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마음이 더 애통하고 아픕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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