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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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과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항일 게릴라 부대 동북항일연군.  1933년에 결성된 동북인민혁명군을 모태로 한다. 1934년 8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8.1 선언을 통해 모든 민족, 모든 계층의 항일연합군 창설을 결의하였다. 그 결의에 따라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과 다른 항일조직들이 모여서 3로군 11군에 달하는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였다. 출처= 나무위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으로 국제적 비판이 거세지자, 1933년 3월 27일에 국제연맹을 아예 탈퇴해 버린다. 또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자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樞軸國)을 결성한다.

 

1941년 초 일본은 미국, 영국, 중국,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로 구성된 소위 ‘ABCD(American, British, Chinese, Dutch)연합’이 아시아 내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을 포위 고립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ABCD 포위망은 일제가 남방 진출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이용한 선전 선동이었다. 

 

또한 일제는 더 나아가 ‘인종적 구도’를 교묘하게 이용해 백인 권력에 저항하는 아시아인이라는 인종적 구도로 묘사하며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주장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것’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일본을 맹주로 하는 자급자족적 경제·군사 블록을 만들고자 했던 환상이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서구 식민지배 타파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시아 각국에 대한 일제의 독점적 지배와 자원 수탈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다.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대동아공영권’은 1940년 8월 1일 마쓰오카 요스케(松岡 洋右) 외상의 담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는 “황도(皇道)의 대정신에 따라 먼저 일본(한국포함)·만주·중국을 그 일환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의 확립 (중략) 공정한 세계평화의 수립에 공헌”하자는 발언으로 서양의 식민지배를 몰아내자는 명분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했다.

 

강준만은 『한국근대사 산책 10권: 창씨개명에서 8·15해방까지』(인물과사상사, 2008)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원안’을 설명했다.

 

1942년 일본 방위청 산하 총력전연구소가 작성한 ‘대동아공영권 건설원안’에 따르면, “근세 구미 제국은 물질문명의 여위(餘威)를 추구하여 동양을 호이(好餌, 좋은 먹이)로서 침범하여 오고, 도의를 중시하는 동양은 ‘유럽화된 아시아’로 변질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에 대응하여 이를 배제하려면 오직 조국 일본만이 가능하다. ……20년 정도를 목표로 하여 동아의 각 국가·민족으로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세계사적 의의를 파악하여 동아일체의 공동 의식하에 동아를 구미의 질곡에서 해방하고 동양도의에 기초한 신질서를 건설할 공통의 신념을 확립시킬 것을 요한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영국과 프랑스 등은 본국과 식민지를 묶어 폐쇄적인 블록경제(Bloc Economy)를 형성하여 자국 시장을 보호했다. 하지만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은 자원이 부족하고 식민지가 적어 ‘일본·만주·중국 경제 블록’을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기존 열강은 일본을 런던 군축회의 군축조약, 경제제재, 주요 자원 수출 금지 등으로 일본의 식민지 확장과 경제 성장을 강력하게 견제, 봉쇄한다.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워싱턴 군축조약)에서 태평양 지역의 해군력을 미국, 영국, 일본 등의 주력함 보유 톤수를 엄격하게 비율로 제한했다(미·영:5, 일:3). 이 조약은 일본의 군사적 확장을 억제하는 족쇄가 되었다. 이후 워싱턴 군축조약의 후속으로 기존 군축조약에서 미처 합의하지 못한 사항에 대해 1930년 1월에서 4월까지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5대 해군국을 포함한 11개국이 참가하여 런던 군비축소회의를 한다. 이때 1922년의 워싱턴 군축조약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던 보조함(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비율을 영국·미국·일본 3국 간에 대략 10:10:7로 나누면서 일본을 견제 제한했다.

 

이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확대하자, 국제연맹의 비판과 함께 미국과 영국 등은 항공유, 철강, 고철, 석유 등 군수물자와 주요 자원의 대일 수출을 전면 금지하며 일본의 숨통을 조였다.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한 배경은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가 장기화함에 따라 전쟁물자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항쟁의 일익을 담당

 

1932년 3월 1일 일본관동군의 지배 아래 수립된 괴뢰 만주국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의 보고(寶庫)였다. 표면적으로는 만주의 석탄, 강철 등 중공업 생산과 철도 건설 등은 성장했지만, 그것은 모두 일본의 자원 공급에 이용되었다.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휴머니스트, 2012)에서 일제 괴뢰국 만주국 식민통치에 대한 중국인과 조선인의 저항에 관해 설명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그 괴뢰정권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만주의 중국인들은 장장 14년에 걸쳐 저항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부 동북군 장교와 병사 및 각계 민중이 자발적으로 투쟁을 조직해 헤이룽장, 지린, 랴오닝에서 ‘동북항일유격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32년부터 10여 지대의 항일유격대를 조직했고, 이는 점차 약 3만여 명의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했다. 항일연군에는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도 대거 참가하여, 항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최종 승리를 위해 크게 공헌했다.

 

이후 앞의 같은 책에서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는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도 정리했다.

 

중국과 조선은 만주사변 이후부터 이미 조선의 민족 독립과 중국의 항일을 위해 긴밀히 관계를 맺으면서 항일협력을 이루었다. 김일성 등 조선인이 항일연군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해방을 목적으로 조선항일전선도 구축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중 항일협력은 더욱 긴밀해졌다. 당시 중국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한 조선의 대표적인 저항조직은 김원봉(김약산)이 이끄는 민족혁명당과 김구 등이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민족혁명단은 1938년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1940년 3개 지대로 확대하면서 항일전선에서 중국군과 함께 싸웠다.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옮겨 다닌 끝에 1940년 충칭에 자리 잡고 한국광복군을 발족시켜 산하에 3개 지대를 두고 각각 산시, 쑤이위안, 산둥 등지에서 항일전투를 벌였다.

 

또한 중국의 대표적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자 전 베이징대 김경일 교수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에서 당시 유명한 항일유격대에서 지도자로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조선인을 조명했다.

 

당시 유명한 항일유격대로는 반석(磐石) 유격대, 동만(東滿) 유격대, 주하(珠河) 유격대, 영안(寧安) 유격대, 탕원(湯原) 유격대, 요하(饒河) 유격대 등이 있었다.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창설된 후 이들 유격대는 각각 항일연군의 제1군, 제2군, 제3군, 제5군, 제6군, 제7군의 모태가 되는데, 약 20여만 명의 병력과 각종의 경무기와 중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예컨대 반석유격대는 1932년에 중국인과 한인들이 하마하자(唅馬河子) 일대의 반일 폭동 중에 조직된 것으로, 이 부대를 조직하고 지휘한 사람이 바로 중국공산당원이며 한인인 이홍광(李紅光)이었다. 이홍광은 후에 항일연군 제1군 참모장을 맡았으나 일본군과 위만군(僞滿軍)과의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항일연군 제1군의 한 사단의 사단장(師長)으로 있었다. 

동만유격대는 항일연군 제2군의 전신으로 동만 지구의 한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책(金策)은 조상지(짜오샹즈, 趙尙志) 장군 휘하의 항일연군 제3군에서 정치부주임을 맡고 있었으며 이복림(李福林)은 제1사 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항일연군 제6군 제1사 사단장 마덕일(馬德一), 정치부주임 서광해(徐光海) 등도 한민족 지도자로서 이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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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5일 일본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기념 촬영 중인 대동아회의에 참가한 각국 수뇌부들. 왼쪽으로부터 바 마우(버마국 총리), 장징후이( 만주국 총리), 왕징웨이(난징 국민정부 국가 주석), 도조 히데키(일본 총리), 완 와이타야쿤(태국 왕자), 호세 라우렐(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 수바스 찬드라 보스(자유 인도 임시 정부 국가 주석)  출처=위키백과

 

일제,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까지 ‘대동아공영권’의 권역을 확장 

 

나치 독일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1939년 3월 체코를 점령한 이후 9월 1일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이에 대해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 포고하지만, 독일은 1940년 6월 프랑스를 함락시켰다. 

일본은 1940년 히틀러의 유럽 전선의 연전연승에 흥분한다. 그리고 일제는 본격적인 총력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파시즘 통제 정책을 단행한다.

 

강준만은 『한국근대사 산책 10권: 창씨개명에서 8·15해방까지』(인물과사상사, 2008)에서 당시 일제의 통제 정책을 설명했다.

 

일제는 나치식 일국일당의 실현을 목표로 정당 등을 해산시켰고, 10월에 유일 정당인 대정익찬회를 발족시켰다. 또한 노동조합을 해산시키고 파업 등을 전면 금지시키는 동시에 전쟁협력을 목표로 하는 ‘대일본산업보국회’를 설립했다.

독일파시즘과 일본 파시즘의 상호 상승작용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자 주로 유럽에 주목했다. 1941년 3월 미국은 ‘무기대여법(Act of Lend-Lease’에 서명하여 영국에 무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4월에 미·일교섭을 한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일소중립조약’을 무시하고 대소 개전을 주장했지만, 7월 2일 어전회의에서 ‘남방 진출’을 결정하고 ‘영·미와의 개전 불사‘를 결정했다. 일제는 남방 진출에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웠지만, 속셈은 독일의 전승으로 유럽 구도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동아시아에서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동남아시아 식민지까지 ‘대동아공영권’의 권역을 확장한다. 

 

『한국근대사 산책 10권』에서 강준만은 일제의 동남아시아 침공과 미국 제재에 대해 정리한다.

 

1941년 7월 일본군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수도를 장악했으며, 이어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동인도제도를 정복하고자 했다. 암호를 입수하여 해독한 미국은 이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지만 일본은 듣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7월 25일 미국 내의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8월 2일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일본정부가 미국과 협상하려는 자세를 취하자, 일본 내 강경파가 들고 일어났다. 10월 도쿄의 호전파는 온건파 수상을 축출하고 군부 지도자인 도조 히데키(東条 英機, 1884~1948)를 내세웠다. 전쟁의 길로 일로매진하겠다는 발악이었다.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에서 일제는 삼국동맹을 강화하여 전쟁을 통해 세계를 재분할하려고, 먼저 중국의 항일 근거지 섬멸 작전에 돌입하나 중국인민의 항일 의식에는 타격을 주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9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로 진격하고 일본·독일·이탈리아의 3국동맹을 체결했다. 이에 대해 9월 말 미국은 고철 등의 일본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11월부터 12월까지 대중국 차관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중략)
당시 중국의 항일전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팔로군이 1940년 여름 화북 지역에서 백단대전(百團大戰)을 벌여 허베이와 산시의 일본군 교통망을 파괴했다. 이후 일본군은 항일 근거지 섬멸 작전에 돌입했다. 항일 역량을 뿌리 뽑기 위해 일본군은 중국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고, 팔로군이 출몰하는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중국은 일본군의 이런 행위를 ‘모조리 태우고, 죽이며, 약탈한다’는 의미로 삼광작전이라 부른다. 일본군은 충칭으로 옮겨간 국민정부를 굴복시키려고 1939년 봄부터 1941년 여름까지 충칭을 무차별 폭격했다. 이로 인해 중국 민간인이 대규모로 희생되었지만,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이 중국의 항일 의식에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중국 인민의 항일투쟁과 마찬가지로 조선인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항쟁의 일익을 담당한다.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1926~2017)도 『일제하 40년사』(풀빛, 1984)에서 나오는 조선 인민의 항쟁 내용이다.

 

일제의 황민화(민족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혁명가들은 국내의 지하와 옥중에서 혹은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또한 일본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특히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민족해방운동이 극히 어려운 상황에 빠져 정치결사(政治結社), 또는 어느 특정한 개인이 운동 전체를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운동이 국내에서 해외로까지 확산되어 개별적으로 처한 상황에서 다원적으로 그러나 굴함이 없이 진행되어 갔다.

이러한 한국민중의 투쟁은 국제적인 반파쇼연합전선의 일익, 구체적으로 말하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파시즘 진영 중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항쟁의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정녕 그렇기 때문에 1943년 11월 27일의 카이로선언(미국·영국·중국)에서는 “우리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독립시킬 것”임을 천명하였고 독일이 항복한 후인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미국·영국·중국·소련)에서도 그것을 재확인했던 것이다.

1943년 8월 9일, 소련이 대일참전을 선포했을 때 소수이지만 한국인 무장대가 이에 호응했음은 물론이다. 일본과 한국의 민족적 모순은 일본의 패전이 곧 한국의 해방이란 형태로 최종적인 해결을 볼 수 있었다.

 

일제의 ‘남진 전략’과 동남아시아 침공

 

1940년 일본 정계는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 주도하에 ‘신체제운동’을 전개하며 군부 파시즘 체제를 완성했다. 그리고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와의 삼국동맹을 주도하는 등 친독·추축국 중심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앞의 책에서 일제의 ‘남진 전략’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 대본영 연락회의는 1940년 7월 27일 ‘세계 정세 추이에 따른 시국 처리 요강’을 결의하고 “지나사변의 해결을 촉진하는 동시에 기회를 포착하여 남방 문제를 해결한다”라고 밝혔다.

일본의 ‘남진 (南進)’전략은 말레이 반도의 고무, 주석, 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석유, 오스트레일리아의 철광석, 석탄, 밀, 양모 등 자국에서 부족한 전략적 자원의 약탈에 목적이 있었다. 또한 미얀마 등지를 점령하여 남방에서 중국의 대외 연락과 외부 원조 채널을 단절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새로운 전쟁을 통해 대 중국 전쟁의 교착 국면을 벗어나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남진 전략을 바탕으로 일본은 중일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소련을 끌어들여 일본·독일·이탈리아·소련의 4국동맹을 결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1940년 말 독일이 대소 작전 태세에 들어가면서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어쨌든 일본은 남진을 위해 잠시 소련과의 전쟁을 회피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 마쓰오카 요스케 외상은 1941년 봄 소련을 방문하여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다.

 

1941년 10월 출범한 도조 히데키 내각은 대미 개전 작전 계획을 재검토했고, 11월 어전회의에서 12월 1일까지 영국, 미국 등과의 외교교섭이 타결되지 않으면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전쟁을 돌입할 것을 결정했다. 결국 12월 1일 일본 왕은 남방 공격 명령을 승인한다.

 

동남아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거나 영국은 유럽 전선에 집중하느라 식민지를 방어할 여력이 없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제는 ABCD 포위망으로 인해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석유, 고철 등의 전략물자 수급이 전면 차단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이 경제적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자원 지대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남방작전(南方作戰)을 계획한다. 남방작전은 1941년 말에서 1942년 중엽에 걸친 일본군의 남방군을 필두로 한 동남아시아 점령전으로 소위 말레이 전역 (Malayan campaign)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남방 작전과 태평양 전역 1, 그림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8』 (자오리성 외 글 · 쑹젠서 외 그림)에 나오는 일본의 말레이 반도와 필리핀 점령 내용이다.

 

1941년 12월 8일, 일본 제국주의는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는 동시에 극동에 위치한 영국의 식민지인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기습 공격한다. 일본군은 2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말레이 반도와 반도 남단에 있는 싱가포르 전체를 점령해 이후에 있을 침략 전쟁을 위해 기지를 탈취하고 유리한 공격 조건을 마련한다. 이로부터 태평양 지역 국가와 각 나라 국민에게는 엄청난 재난이 몰아닥친다.
(중략)
필리핀은 중요한 해상 교통로로 미국과 일본이 극동에서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은 필리핀 제도를 점령하기 위해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평화의 깃발을 내걸고 미 당국을 현혹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일본군의 계획은 전쟁이 시작되고 9일 안에 필리핀의 미국 공군을 섬멸해 미국 해군이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일본군이 필리핀에 쉽게 상륙하는 동시에 극동에서 미국의 해군·공군을 완전히 섬멸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상황을 잘 못 판단한 미군은 일본군에 계속 밀리게 되고, 필리핀은 일본군에 점령되고 만다.

 

네덜란드는 본국이 독일에 빼앗기면서 식민지인 인도네시아는 사실상 통제력을 상실하자, 일본이 진주하여 네덜란드군을 몰아내고 점령했다. 인도차이나(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비시 프랑스 정권이 일본의 진주를 묵인했고, 이후 일제는 1940년 9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직접 통치한다. 

 

베트남민주공화국과 프랑스와의 제1차 인도차이나 8년 전쟁

 

프랑스는 늦게 동남아시아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하나같이 제국들은 식민지 개척에 종교를 이용했다. 프랑스 또한 가톨릭 포교를 구실로 베트남에 들어갔다. 1884년 프랑스는 청·프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하나로 묶어 인도차이나라는 형태로 식민 지배했다. 그리고 베트남을 북부 통킹(Tongking)과 중부 안남(Annam), 남부 코친차이나(Cochinchina)로 나누어 분할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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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胡志明, 1890~1969)  출처=나무위키

 

그러나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일본은 그 기회를 이용해 인도차이나를 손아귀에 넣고 프랑스 대신 베트남을 식민 지배한다. 이후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호찌민(胡志明, 1890~1969)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1941년 5월에 결성한 베트민(Viet Minh, 베트남독립동맹, 越盟)과 결집해 ‘8월혁명’을 일으킨다.

 

‘8월혁명’은 대중적인 정치 운동으로 베트민의 무장세력,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친일 정치조직에 가담했던 사람, 어떠한 정치조직에도 관여하지 않고 있던 다양한 인민이 광범하게 참여했고, 그 결과 베트남은 일본 식민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연합군이 진주해 오기 전에 바딘광장(Ba Dinh Square)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호찌민은 ‘낡은 카키색의 옷과 샌들’로 인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수수한 복장은 그 후의 호찌민을 상징하게 된다. 위풍당당한 혁명가의 모습이 아니라, 베트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상복을 입은’ 시골 노인의 모습이었다. 베트남 인민은 그런 그를 ‘호 아저씨’라 부르며 불멸의 최고지도자로 존경했다. 

 

베트남은 민족주의자 호찌민의 지도하에 독자적 길을 걸어가다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휘말린다. 1947년 9월 코민포름(Communist Information Bureau)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전정(專政)의 구현 중 하나인 인민민주주의혁명론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처럼 베트남도 채택하면서 ‘냉전’에 대처한다. 그러나 구 식민지 종주국 프랑스는 식민 지배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1946년 10월에 베트남 북부 항구도시 하이퐁을 폭격함으로써 재침략한다. 이른바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8년 전쟁이 벌어진다.

 

도쿄대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역사 속의 베트남 전쟁』(일조각, 2007)에서 프랑스의 재침략과 제1차 인도차이나 8년 전쟁에 관해 설명했다.

 

프랑스는 8월혁명 이후에도 식민지 시대의 발상으로 베트남을 보고, 8월혁명을 거치면서 형성된 베트남의 ‘자각한 민족’의 힘을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프랑스의 예측과는 반대로 현지 사람들의 저항은 강력했고 그에 따라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더욱이 1949년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어 인도차이나 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웃에 중국이라는 동맹국을 얻게 되자 베트남의 군사력은 급격히 강화되었는데, 프랑스는 이에 맞서 미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인도차이나 전쟁은 동서 냉전구조 속에서 열전(熱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미국이 개입했음에도 프랑스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베트남 공산당(1951년에 베트남 노동당으로 개칭)과 베트민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로 효과적인 동원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1953년에는 더욱 강력한 동원태세를 갖추기 위해 지주제를 폐지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토지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농민은 ‘내 땅’이라는 구체적인 성과를 통해 ‘민족 독립’의 기쁨을 맛보면서 항전(抗戰)에 더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중략)
프랑스는 1953년 말 베트남 북서쪽 라오스와의 국경 가까이에 있는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지역에 진지를 설치하고 이곳에 베트남 주력부대를 유인해 대타격을 가해보려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는 베트남군에게 공격 목표를 제공하는 셈이 되어 프랑스군은 결국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인도차이나를 군사적으로 지배하려던 프랑스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예속 정권과 싸우는 민중에 기반을 둔 베트남 인민혁명당

 

베트남의 제1차 인도차이나 8년 전쟁 승리에는 베트남 민족주의 혁명 세력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안겨 주었던 중국혁명의 성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쿄대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2021)에서 중국혁명이 베트남에 준 영향을 설명했다.

 

류사오치는 1949년 11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오세아니아 노동조합회의에서 중국혁명의 경험을 ① 광범한 민족통일전선, ② 통일전선에 대한 공산당의 지도, ③ 강고한 공산당, ④ 무장투쟁과 근거지라는 4가지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러한 중국모델 내지는 ‘마오쩌둥의 길’은 스탈린으로부터도 아시아혁명의 보편적인 모델로 인정받았다. 
(중략) 
중국의 경험은 아시아 각국 공산당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중국모델을 수용하는 데 유달리 빠르고 명확한 자세를 취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은 1950년 1월 18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국가로 승인했고 소련도 같은 달 30일 이를 승인했다. 1951년 2월 11일 개최된 인도차이나공산당 제2차 대회에서 호찌민은 당주석으로 선출되고 당면 혁명을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했다.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에서 “혁명을 민족해방, 봉건적 착취의 일소, 사회주의 이행의 기초 형성이라는 세 가지 임무를 가진 혁명”으로 정의했다. 이때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을 ‘아시아혁명의 총사령관’으로 불렀다.

 

이런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8년 전쟁은 4월혁명 공간의 혁신계에 깊은 인상을 주었으리라 필자는 생각한다.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이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다.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남한 내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밝히며 도예종 등 47명을 체포한다.

 

그러나 중정의 발표와 달리 송치받은 검찰은 18일간의 철야 수사에도 기소할 만한 증거와 혐의점을 찾지 못했으며 사건 관련자들이 중정의 조사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음을 밝혀냈다. 결국 사건 담당 검사 중 최대현 검사를 제외한 부장검사 이용훈, 김병금, 장원찬 검사는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라는 이유로 기소 거부와 함께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정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김형욱은 숙직 담당 검사에게 압력을 넣어 서명토록 해 간신히 기소했다.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었고 관련자들의 전기고문, 물고문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자 검찰은 서울 고검 한옥신 검사에게 재수사를 지시했다. 그 결과 당초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된 26명 중 학생 등 14명에 대한 공소를 취하했고 도예종 등 나머지 12명의 피고에 대해서도 국보법 위반에서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했으며 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3년에서 1년까지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다.(나무위키)

 

4월혁명 공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전창일은 도예종의 재판을 빠지지 않고 방청하였다 한다.

김상구 편저 전창일 감수 『호산 전창일과 통일운동 77년사』 (책과나무, 2023)에 나오는 인민혁명당 당명과 월남(베트남) 내용이다.

 

-판사: 인민혁명당이란 조직을 만든 것이 사실인가?

-도예종: 아니다. 우리의 모임은 당 조직이 아니다. 다만 시국관을 같이 하는 동지들끼리 가끔 모여 토론하고 정세에 대한 견해와 정보도 교환하는 친교 서클 모임이다.

-판사: 인민혁명당이란 이름은 어떻게 돼서 나오게 된 것인가?

-도예종: 언제인가 우리들이 4·19묘지에 모여앉아 영령들을 추모하며 자연스럽게 토론한 적이 있다. 그 토론에서 누군가 말하기를 ‘오늘의 한국 정치 정세하에서 가장 올바른 정당이 생긴다면 그 정당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져야 알맞을까? 하는 질문을 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답이 나왔는데, 그중 한 가지 답이 왈 인민혁명당이다. 그것은 월남이 우리처럼 국토가 분단되어 있고, 남과 북 동족 간에는 통일하려고 염원하고, 남쪽에서는 외세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예속 정권과 싸우는 민중에 기반을 두고 있는 당이 바로 인민혁명당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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