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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킹만 폭격 (1964년8월2일)) 영상실록, 오늘N [34회] / YTN2 화면캡쳐
전쟁을 위해 미국은 자작극과 전쟁 유도를 넘어 이제는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 ‘통킹만 사건’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는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이 미군에 의해 날조됐다는 사실이 ‘펜타곤 페이퍼’로 드러났다.
(본문 중에서)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7시 55분, 일본은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 제7함대와 군사시설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한 비행기 350대는 기습 공격으로 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때 항공부대 총지휘관이 진주만 상공에서 “우리는 기습에 성공했다”라고 전한 암호 전문이 ‘도라 도라 도라’다. ‘도라(とら)’는 일본어로 ‘호랑이(虎)’를 뜻한다.
미국은 전함 8척 중 4척이 침몰했고, 3척이 심한 손상을 입었다. 비행기 570대 중 475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미 해군과 육군 사망자는 2,897명에 이르렀고, 시민 사망자도 68명이나 되었다.
소위 ‘태평양전쟁’의 발발이다.
이로 인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유럽 중심이던 전선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 이어 태평양까지 전 세계적 규모의 총력전으로 확대된다.
기습 다음 날인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은 미국 상하 양원이 합동으로 개회한 가운데 의회 연설에서 공격당한 날을 ‘치욕의 날’로 규정하며 대일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당일 미국 상원은 만장일치(82대 0), 하원은 1표의 기권(388대 1)만으로 선전포고 안을 통과시켰다.
태평양전쟁의 발발, 반(反)파시즘 연합전선 형성
일본의 진주만 기습 3일 후인 12월 11일, 일본의 추축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일본과 맺은 삼국동맹 제3조인 ‘체결국 중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으면 서로 돕기로’한 것이 근거였다.
미국 의회도 같은 날 대독일 선전포고를 했는데, 상하원에서 각각 88표대 0표, 393표대 1표로 통과됐다. 대이탈리아 선전포고도 상원 90표대 0표, 하원 394표대 1표로 양원 모두 압도적인 표 차로 가결된다.
강준만은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인물과사상사, 2016)에서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반(反)파시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아시아 전선과 유럽 전선을 하나로 통합시켰으며, 1942년 1월 1일에는 미국·영국·소련·중국·캐나다 등 26개국의 ‘연합국 선언’이 발표되면서 이른바 반(反)파시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이와 관련,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9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시즘은 공공연하게, 다양한 종류의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체제, 소비에트체제를 똑같이 파괴해야 할 적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오래된 영국 격언의 표현을 빌리자면 ‘따로따로 교수형 당하지 않으려면 모두가 단결해야 했다.(They had all to hang together if they did not want to hang separately.)’”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은 미국의 반전 여론과 정치 지형을 순식간에 뒤바꾼 결정적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후유증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다.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당시 대통령은 우드로 윌슨이었다. 윌슨은 미국의 전쟁 중립을 선언했지만, 1917년 영국의 정기 여객선 루시타니아(Lusitania) 호에 대한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 참전을 결정했다.
앞의 저서에서 강준만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윌슨의 전쟁 중립 이유가 미국 민족 구성원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1915년) 5월 7일 영국의 정기 여객선 루시타니아(Lusitania) 호가 아일랜드 해안에서 독일 U보트의 수뢰 공격을 받아 18분 만에 침몰함으로써 승객과 승무원 1,959명 중 1,198명이 숨졌다. 사망자 중에는 미국인도 128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은 배의 격침에 분노한 미국인들의 열화와 같은 전쟁 요구를 묵살하고, 외교 각서를 통해 배상금 및 여객선 공격 중지를 요구하는 협상을 독일과 벌였다.
(중략)
당시 중립은 윌슨의 소신이라기보다는 미국의 민족 구성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100년 전과는 달리 민족 구성이 매우 다양해졌기 때문에 유럽에서의 전쟁은 미국 내 민족 간 갈등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아일랜드계·독일계 미국 이민자의 영국 증오로 윌슨 초기 전쟁 중립 선언
윌슨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계속 중립을 유지했다. 중립 이유는 19세기 미국 민족 구성은 이민자가 많았는데 가장 큰 축이 아일랜드계와 독일계 이민자들로 영국과 독일을 증오했기 때문이다.
1847년 아일랜드에서 감자 역병으로 대기근이 발생해 100만여 명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대기근 참사는 아일랜드의 반영국 감정과 투쟁의 기원이 된다.(참조: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북아일랜드 피의 투쟁」(자주시보, 2022.9.21. https://jajusibo.com/60523)
이때 극심한 굶주림과 영국의 수탈을 피해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나는데 이것이 아일랜드인 미국 이민의 시작이다. 이들은 자금이 없다 보니 주로 보스턴, 뉴욕 등 동부의 도시에 정착하면서 철도 건설, 운하 건설 등 고된 육체노동으로 살았다. 이후 아일랜드계 미국 내 강력한 가톨릭 세력을 구축하면서 미국 정치계와 경찰, 소방관 등 공공 부문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들불처럼 번진 혁명이 실패하자, 독일인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 혹은 더 나은 농업 및 경제적 기회를 찾기 위해 미국 이민을 간다. 빈 체제의 보수 반동 정치에 억눌렸던 독일계 이민자들은 자본과 기술을 가진 농부, 장인들이 많아 중서부의 오하이오,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등 내륙 지역에 정착해 대규모 농장을 일구거나 상공업에 종사했다.
이런 이민자들의 구성으로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은 자칫 미국 내 민족 간 갈등을 수반할 수 있어, 윌슨은 처음엔 중립을 선언했다.
강준만은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에서 이 부분에 관해 설명했다.
19세기 내내 미국 이민을 주도한 아일랜드계와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 정부가 영국과 동맹을 체결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일랜드인은 독일인 못지 않게 영국을 증오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대계 미국인들의 상당수가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였다. 이들의 가족이 아직 독일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탄압했던 러시아 제정(帝政)에 도움을 주는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계 미국인들도 러시아의 팽창 정책을 우려해서 미국이 러시아를 돕는 행위에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참전에 결정적 영향을 준 ‘치머만의 전보’ 사건이 터진다.
1917년 1월 16일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치머만(Arthur Zimmerman, 1864~1940)은 멕시코 외무장관에게 전보를 보낸다. 전보 내용은 멕시코가 독일과 동맹을 맺으면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게 해주겠다고 한 것으로 멕시코와 미국 간의 전쟁을 촉발하려는 독일 측 음모였다. 하지만 이 전보를 영국이 2월 말 미국에 넘겨주면서 미국은 독일의 도전으로 보고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앞의 저서에서 강준만은 ‘치머만의 전보’ 사건으로 미국의 대(對)독일 참전을 설명한다.
비록 멕시코 정부가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윌슨은 이 전문을 미국의 안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치머만의 전문을 통보받은 다음날, 윌슨은 미국 상선들을 무장시킬 수 있는 권한을 의회에 요청했으며, 이에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언론에 치머만 전문을 공개했다.
(중략)
4월 4일 상원에서는 라폴레트와 노리스를 비롯한 일부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82 대 6으로, 하원에서는 4월 6일 373 대 50으로 윌슨의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결국 미국은 4월 6일 대(對)독일 참전을 개시했으며, 최초의 미군이 6월 26일 프랑스에 상륙했다.
흑인 인종차별과 반(反)독일 히스테리(Hysterie) 징병 문제
미국의 참전 명분은 분명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백인과 흑인 인종 문제로 자원 입대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강준만의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에 나오는 징병법과 흑인 징병에 따르는 인종차별 내용이다.
100만 명의 군인이 필요했지만 처음 6주 동안 자원한 사람은 7만 3,000명에 불과했다. 결국 의회는 징병법(Selective Servic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으로 20세에서 30세까지, 나중에는 18세에서 45세에 이르는 모든 남성들이 지역 징병위원회에 등록해야 했다.
남부의 여러 정치인들은 흑인들이 군인이 되는 것을 우려해 흑인들의 징병을 반대했지만, 정부에선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전쟁을 흑인 지위 향상의 기회로 본 흑인 지도자와 단체들은 흑인에게 ‘세계의 자유’를 위한 전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군대는 흑인과 백인용 시설을 분리하고, 흑인이 장교가 되는 것을 막았으며, 흑인 병사들에게 주로 천한 일만 시키는 등 인종차별 정책을 썼다.
1917년 텍사스의 휴스턴에서는 백인 병사들이 흑인 병사들의 폭동을 유발시켜 백인 17명과 흑인 2명이 사망한 가운데, 100명 이상의 흑인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돼 13명이 교수형을 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징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전쟁 프로파간다 기구로 공공정보위원회(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가 발족했다.
(중략)
1917년 4월에 출범한 공공정보위원회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 선전 기관으로, 위원장의 이름이 조지 크릴(George Creel, 1876~1953)이어서 ‘크릴 위원회’로 불렸다.
‘크릴 위원회’는 포스터, 영화, 신문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대대적인 선전전을 펼쳤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엉클 샘(Uncle Sam)이 “바로 너야(I WANT YOU)”라며 군입대를 촉구하는 포스터다. 또한 4분 연설단(Four Minute Men) 약 7만 5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조직해, 영화 상영 시 필름을 교체하는 짧은 시간(4분) 동안 관객들에게 전쟁 참여와 채권 구매를 호소하는 짧은 연설을 진행했다.
그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론 및 출판을 통제하고 반(反)독일 감정을 고취하는 보도자료와 출판물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하지만 이민 온 독일계 최대 이민자들을 어떻게 설득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미국은 독일계 이민자들을 하루아침에 ‘내부의 적’이자 ‘마녀사냥의 표적’으로 전락시켰다.
1917년 미국이 참전한 후, 사회 전반에 퍼진 극단적인 반독일 광풍은 독일어 사용이 공공장소에서 금지되었고, 심지어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 독일어 교육이 중단되거나 독일 서적을 불태우기도 했다. 독일식 햄버거는 ‘리버티 샌드위치(Liberty sandwich)’로, 사우어크라우트는 ‘리버티 캐비지(Liberty cabbage)’로 개명되었다. 50만 명에 달하는 독일계는 ‘적성국 외국인(enemy alien)’으로 등록되어 지문을 채취당하고 감시받았다.
이러한 독일계에 대한 사회적 탄압과 애국주의의 광기는 이민자들의 자유와 다양성을 억압하는 흑역사로 기록된다.
강준만은 앞의 저서에서 반독일 히스테리에 관해 설명했다.
‘100퍼센트 아메리카니즘(100 Per Cent Americanism)’이라는 구호로 압축돼 표현되었다. 예컨대,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한 국공채를 판매하는 포스터는 “당신은 100% 미국인인가? 그렇다면 입증하시오!(Are You 100% American? Prove It!)”라고 외쳤다.
그런 맥락에서 반(反) 독일 히스테리가 거세게 밀어닥쳤다. 독일어로 된 신문들을 폐간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또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 교육 과정에서 독일어를 빼야 한다는 캠페인이 일어났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 학교도 있었다. 도서관들은 소장 독일어 책을 불태우기도 했다. 델라웨어 주, 몬태나 주 등 몇 개 주에서는 아예 주 전체가 독일어 교습을 금지했다. 이에 많은 독일인이 앵글로색슨식 이름으로 개명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음모설, 일본의 진주만 기습
1910년의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독일계는 250만 명이었고, 부모 어느 한쪽의 독일계까지 합하면 그 두 배에 이르는 사람들이 독일계였다. 독일계는 수도 많은 데다 이민자 그룹 가운데 가장 존경받고 높은 지위를 누리던 집단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제1차 세계대전 하나로 뒤집어진다.
그런데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또 다른 광기를 만든다.
강준만은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에서 일본계 이민자들에 대한 광기를 기술한다.
치욕은 이성을 멀게 하는가?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폭격에 분노한 미국의 한 하원의원은 “나는 현재 미국, 알래스카, 하와이에 살고 있는 모든 일본인들을 붙잡아서 강제수용소에 처넣는 데 동의합니다. 그들을 박멸합시다.”라고 외쳤다. 그의 외침은 다수의 정서였다.
1942년 2월 루스벨트는 군대에 서부 해안(태평양 연안)에 살고 있던 남녀노소를 불문한 일본계 미국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일본계 이민자 12만 명 중에 4분의 3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일본계 이민자들은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미국 쪽으로 한참 기울어진 1944년 12월 17일까지 감옥과도 같은 강제수용소에서 2년 반 동안 갇혀 지내야 했다. 미국 정부는 나치 독일이 만든 유태인 강제수용소와 같은 표현인 ‘concentration camp’라고 불리길 꺼려 단순한 주거 이전이라는 의미가 강한 ‘relocation camp’라고 불렀지만, ‘강제수용소’인 건 분명했다.
진주만 기습 직전까지 미국 여론은 전쟁에 반대했지만, 이젠 사태가 역전되었다.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는 구호가 미국을 단결시켰다.
하지만 이 참전을 두고 ‘루스벨트 음모설’을 강준만은 앞의 저서에서 기록한다.
모든 매체를 뒤덮다시피 한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슬로건의 위력은 컸다.
그런데 이게 바로 미국의 ‘기습 유도설’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을 설득해 미국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가능하도록 경계 태세를 허술하게 했다.” 1948년 역사가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가 이런 주장을 편 이후로 다양한 ‘루스벨트 음모설’이 제기되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 교수 도널드 골드스타인(Donald Goldstein)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당시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재난이 필요했다. 그것도 작은 피해가 아니라 큰 피해가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해군 출신 언론인 로버트 스틴넷(Robert Stinnet)도 『거짓의 날(Day of Deceit)』이라는 책에서 루스벨트와 그의 참모들은 공습 전 하와이 주변 해상 정찰을 중지시켜 일본의 대규모 공격을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왜 당시 하와이 주둔 미 해군 사령관 허즈밴드 키멜(Husband E. Kimmel, 1882~1968) 제독과 육군의 월터 쇼트(Walter C. Short, 1880~1949) 장군이 기습을 당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이를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세 차례나 열렸지만, 미국이 과연 일본의 기습을 유도했는가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미국은 이미 한 달 전인 11월에 일본의 암호문을 입수함으로써 전쟁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공격지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하와이의 진주만과 필리핀의 마닐라 기지에 경계 명령만을 내리고 있었다는 게 그간의 정설이었다.
미국-스페인 전쟁의 도화선 메인함(USS Maine) 자작극 음모론
최근 비밀이 해제된 문건 등은 미국의 ‘진주만 기습 유도설’ 쪽을 더 뒷받침해주고 있다.
강준만은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에 나오는 일본의 ‘기습 유도설’ 내용이다.
루스벨트는 이미 11월 25일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 1867~1950)에게 다음 주 월요일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어 너무 큰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부각해 국민들에게서 전폭적인 전쟁 지지를 얻어낼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11월 26일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일본 항공모함이 하와이 동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내용의 긴급 전문을 루스벨트에게 보냈으며, 같은 날 코델 헐(Cordell Hull, 1871~1955) 국무장관은 두 나라 사이의 호혜 평등을 요청한 일본 천황의 서신을 들고 온 주미 일본 대사에게 의도적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일본의 전쟁 도발을 부추긴 게 아니냐는 것이다. 또 헐 국무장관은 11월 29일 처칠의 전문을 UP통신 기자 조 레이브(Joe Leib)에게 보여주며,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12월 7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관해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다음 날 보도한 「공격 미리 알았다」라는 헤드라인 기사에서, “미국 정부는 최소 일주일 전부터 일본의 진주만 공습 계획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며, 헐 국무장관으로부터 이 정보를 전해들은 사람이 레이브 기자 외에도 여럿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자작극도 서슴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도화선이 된 메인함 폭발 사건이다.
앞의 저서에서 강준만은 미국-스페인 전쟁의 도화선이 된 메인함의 자작극 음모설이다.
1898년 1월 25일 메인호는 아바나항에 입항했는데, 2월 15일 정체불명의 폭발로 파괴되었고 그 와중에서 미군 26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심지어 조선에서까지 신문 호외를 발행할 정도였다. 『독립신문』 1898년 2월 19일자가 발행한 호외는 한국인 발행 신문 최초의 호외로 기록되고 있다.
매킨리는 1898년 4월 11일 억압받는 쿠바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무장 개입을 승인하라고 의회에 촉구하고 나섰다. 대(對)스페인 선전포고안은 311대 6으로 하원을 통과했으며, 상원에서는 42대 35로 통과되었다. 미국은 4월 25일 스페인에 대해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을 촉발시킨 메인호의 폭발 원인은 무엇일까? 당시 스페인이 한사코 전쟁을 피하려고 발버둥친 걸로 보아 스페인이 저지른 것 같지는 않다. 1년 뒤 메인호가 엔진 고장으로 폭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미국 역사서들은 대부분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반면 쿠바의 역사 교과서는 “모든 정황은 이 사건이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을 보여준다. 백인 장교들이 폭발 당시 배에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참사를 피했다는 사실은 미국에 책임이 있다는 이론에 설득력을 더했다”고 말한다. 필리핀 교과서도 “메인호 폭발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미국 스파이들이 저지른 사건”으로 단정 짓는다.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명분을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
미국은 전쟁이 만든 나라였다.
전쟁을 위해 미국은 자작극과 전쟁 유도를 넘어 이제는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 ‘통킹만 사건’이다.
2023년 6월 16일 타계한 전 국방성 소속 대니얼 엘즈버그(Daniel Ellsberg, 1931~2023)는 미군이 베트남전 개입 명분을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언론사에 폭로한다.(참조: 「민중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울산함성, 2024.8.9. http://www.ulham.net/opinion/21894?page=3&category=22411)
‘펜타곤 페이퍼’는 1급 비밀문서로 분류된 「미국의 베트남정책 결정과정」, 「통킹만 사건의 명령과 통제에 관한 연구」 등 7,000쪽 분량의 보고서로 베트남전 관련 정책 결정·수행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사실을 은폐하고 의회와 국민을 오도해 전쟁에 개입하고 확대해 온 과정을 담았다.
특히 미국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는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이 미군에 의해 날조됐다는 사실이 ‘펜타곤 페이퍼’로 드러났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 미군 구축함 매덕스호가 통킹만 일대에서 북베트남군 어뢰정으로부터 공격받은 데 이어 이틀 뒤인 4일 공해상에서 2차 공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자 미국 의회는 8월 7일 통킹만 결의를 통해 존슨 대통령에게 군사행동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미 공군의 북베트남 폭격이 본격화되었고, 이듬해 3월 최초로 미 해병대 3,500명이 다낭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지상전이 이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급격히 확대되었다.(참조: 「베트남 전쟁은 “혁명 도덕성”과 “제국주의 범죄”와의 전쟁 - 통킹만 사건 59주년에 부쳐 -」 (통일시대, 2023.8.3. https://www.tongil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09)
강준만은 『미국사 산책 10: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인물과사상사, 2010)에서 미국 의회가 통킹만 결의 전에 이미 의회 결의 보고서를 사전 작성한 것을 이야기했다.
이 보고서에는 트루먼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기만, 백악관 참모진들의 의견 차이, 노골적인 거짓말의 역사가 죄다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미국 정부에 치명적이었던 내용은 CIA의 사주로 베트남의 고 딘 디엠(Ngô Ðình Diệm, 1901~1963) 수상이 실각하고 처형되기 몇 주 전에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에서 본국으로 보낸 전문이었다.
이 전문에 따르면 통킹만 의회 결의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이미 초안이 잡혀 있었다.
엘즈버그는 정부산하 랜드연구소(RAND: Research and Development) 소속 군사분석 전문가로 ‘펜타곤 페이퍼’ 작성에 참여했지만, 마지막에는 ‘양심’에 따라 행동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조작된 전쟁의 문서를 공개했고, 『뉴욕타임스』는 1971년 6월 ‘펜타곤 페이퍼’를 인용해 당시 2차 공격이 베트남전 본격 개입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13일부터 3일 동안 요약·연재했다.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의 전기물을 쓴 데이비스 조이스(Davis Joyce)의 『하워드 진: 오만한 제국, 미국의 신화와 허울 벗기기』(열대림, 2006)에서 하워드 진은 베트남전쟁을 인상적으로 요약했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가 작은 농업국가의 민족주의적 혁명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원자폭탄을 제외한 모든 군사적 역량을 총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의 베트남전쟁은 ‘조직화된 현대적 기술과 조직화된 인간의 싸움이었는데, 승자는 인간이었다.’ 이 전쟁은 또한 ‘미국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반전운동을 초래했고, 이것이 전쟁의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략)
통킹만 사건은 순전히 ‘날조’된 것이었다. 결국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미국 제국이 최초로 경험한 패배’로 기록될 것이다.”
‘민족의 자주’를 주장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미국은 전쟁을 위해 자작극과 전쟁 유도 그리고 조작도 서슴지 않은 전쟁으로 세운 나라이다.
올해 미국이 저지른 베네수엘라 국가지도자 체포와 이란 지도자 살해 그리고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중동전쟁으로 세계는 이제 미국에 대한 ‘동맹국’이란 환상을 버리고 ‘반미’로 돌아서고 있다.
지난 6월 10일자 SBS는 “유럽서 팽배한 반미 정서…10중 1명만 ‘미국은 동맹’”이라는 충격적인 기사이다.
유럽인 10명 중 1명 정도만 미국을 동맹국으로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현지 시각 10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싱크탱크 유럽외교협회(ECFR)가 지난달 유럽인 19,481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에 대한 유럽인들의 깊은 불신이 드러났습니다.
이번 조사는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불가리아,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헝가리 등 15개국에서 이뤄졌습니다. 조사 대상국을 통틀어 현재 미국을 동맹국으로 보는 응답자는 평균 11%에 그쳤습니다. 이는 6개월 전 16%, 2024년 11월 22%보다도 크게 낮아진 수치입니다.
응답자의 절반은 미국을 동맹이 아닌 '필요한 파트너'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13%는 ‘경쟁국’으로, 12%는 ‘직접적인 적대국’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최근 유럽서 팽배한 ‘반미 정서’와 마찬가지로 이미 66년 전 4월혁명 공간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과 4·9통일열사들은 ‘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했다.
도예종은 4월혁명 공간에서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경북맹부 간사장,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 중앙상무집행위원회 조직부책으로 한미경제협정 반대, 일본경제인 입국반대, 2대악법반대 등에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4월혁명은 학생혁명이었지만, 혁명을 구체적으로 진전시키고자 했던 곳은 혁신정당과 청년단체였다. 특히 도예종과 4·9통일열사들이 참여한 청년단체인 민민청은 ‘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통일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도예종을 비롯한 4·9통일열사들이 주축인 민민청과 민자통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2·8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61년 2월 20일 도예종 선생 등이 참여한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의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한미경제협정 비준거부촉구 공개장」 일부이다.
“국회의원 제공!
제공은 지금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제공 자신을 위하여 준엄한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금반 속개되는 회기초에 논의될 2·8한미경제협정의 심의 결과 조국의 주권을 피해당함으로써 민족의 자주성을 영영 상실하느냐? 그렇잖으면 비록 불완전한 현상이지만 가일층의 예속은 방지하면서 조속한 시일내에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의 쟁취를 기하느냐? 이 양자택일이 바로 제공들 앞에 역력히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이 조약의 비준 심의에 있어서 순간적 착각으로 표 하나 손 한번 잘못 들면 조국의 운명을 비극 속에 몰아넣게 될 것이며 제공 자신이 자손만대에 역사적 죄인이 되는 추상같은 심판을 제공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중략)
무릇 주권국가의 모든 조약 협정은 호혜평등의 원칙 밑에 이루어지는 것이 국제법상으로나 국제도의상으로 관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월 8일 한미간에 체결된 협정 내용은 완전히 주권국 자격을 무시한 것으로서 마치 종주국과 식민지간의 있었던 전근대적인 내용의 협정을 강요당하고 있으니 이는 민족사상 일대수치와 오점이 아닐 수 없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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