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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만철(남만주 철도) 선로를 스스로 폭파한 뒤 중국 장쉐량(張學良, 1901~2001) 군대의 소행으로 몰아 자작극 류탸오후(柳條溝) 사건을 구실로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일제는 개전 두 달 만인 11월에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하고 다음 해 1932년 3월 괴뢰국 만주국(滿洲國)을 세워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를 확보한다. 이후 일제는 점령지역 철수를 권고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파시즘 체제를 구축하면서 중국 전역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했다.
이후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류거오차오(蘆溝橋) 사건’을 유도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한다. 관동군(關東軍)은 순식간에 베이징, 톈진을 점령하고 장제스 국민정부 수도 난징을 침략하면서 난징대학살을 자행했다.
일제는 중일전쟁에서 점령한 주요 도시 베이징·난징·상하이 등에 일본 독점 자본과 관동군을 결탁시켜 자원 수탈과 노동력 착취를 극대화한다.
관동군은 가는 곳마다 농촌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고 항일 세력의 기반을 뿌리 뽑기 위해 ‘모두 죽이고(살광, 殺光), 모두 빼앗고(창광, 搶光), 모두 불태우는(소광, 燒光)’이라는 악명 높은 ‘삼광작전((三光作戰)’을 펼치며 수십만의 인명을 살육했다.
만주, 20세기 초부터 조선의 독립운동기지
만주는 역사적으로 고구려,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이 번갈아 주도권을 장악했다.
만주의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수탈을 피해 이주한 조선인 삶의 터전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통칭 ‘북간도’는 두만강 북부의 동만 지방이고 ‘서간도’는 압록강 상류 북부의 남만 지방을 일컬었다.
조선 말기 동만(현재의 연변) 지방은 1910년대부터 조선인들에 의해서 개척됐다.
만주는 1907년 안창호, 양기탁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가 국권 회복과 더불어 공화정(共和政) 독립국 수립을 목표로 해외 독립군 기지를 건설했던 곳이고, 그 결실이 신흥무관학교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서간도로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첫 사업으로 처음에는 그 이름이 신흥강습소였다. 이를 위해 우당 이회영 6형제는 모든 명예와 부귀영화를 버렸다. 이들은 전 가산을 처분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재산을 헌납했다. 신흥무관학교는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려고,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사실상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지였다.
북간도 지역에서도 1911년 대종교 계열의 항일운동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이 세워지고 이는 나중에 북로군정서로 발전한다. 또한 1906년 이상설은 만주 용정에 민족교육 기관 서전서숙을 세워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했다. 북간도 등지에서 조직된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이후 청산리 전투를 이끌게 됐다.
중국의 대표적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자 전 베이징대 교수 김경일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2005)에서 1930년 만주 지역의 조선인 인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후 나라를 잃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의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후 일본은 한반도를 중국 침략의 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집단이민의 형식으로 많은 한국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1930년대에 이르러 동북의 한국인 인구는 200만에 달한다. (『延邊日報』,1991. 9. 6.)”
1920년대 활발했던 민족주의 무장 항일단체는 안타깝게도 거의 소멸하게 되지만, 이러한 시련에도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항일투쟁은 계속된다.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돌베개, 2007)에 나오는 만주사변 전 조선인의 수와 조선혁명가에 대한 설명이다.
“조선과 국경을 접한 만주 남부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수는 대략 8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지방은 역사적으로 조선 독립운동의 무대였고, 1920년대 중반부터는 조선인 공산주의운동도 성장하고 있었다. 이홍광, 양림, 이동광, 전광(오성륜), 그리고 김일성 등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이 지역에서 중국 민중과 더불어 항일전을 펼쳤다. 동만(東滿), 곧 간도에서는 대원 대다수가 조선인이었다.”
만주, 조선 항일 빨치산의 출발
만주 지역은 조선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의 진원지였다.
1925년에 창당한 조선공산당은 흑룡강의 영안(寧安)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설치하여 동만, 남만, 북만에 당 조직을 건설했다. 그러나 1928년 코민테른이 일국일당 원칙(一國一黨原則)을 천명하면서 조선공산당은 해체된다.
1931년 10월 12일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위원회에 항일유격대 창설을 지시하면서 만주는 항일무장투쟁의 거점이 된다. 중국공산당은 일국일당 원칙에 근거해 수많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여 항일 역량을 강화한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 군경은 중국공산당과 조선 항일무장세력을 혹독하게 탄압하나 조선인은 이러한 탄압에 대하여 격렬히 저항했다.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1926~2017)은 『일제하 40년사』(풀빛, 1984)에 나오는 간도 조선인의 저항과 탄압이다.
“『조선일보』 1932년 3월 29일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근일 간도에는 처처에서 거의 매일같이 공산당원이 나타나 큰 대(隊)를 지어가지고 폭동을 일으키고 세상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던 중 이십 칠일 밤에는 간도 각지에서 공산당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다수의 군중과 같이 방화를 하는 등 큰 폭동을 일으켜 계속 중에 있다. 간도 일대의 형세는 이에 일층 중대화하였다.’
일본군경의 탄압에 따른 참상(慘狀)에 대해서는 당시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도 매우 조심스러운 용어로 상당한 양의 보도를 하고 있다. 예컨대 1932년 5월 초부터 조선군사령부가 간도지방에서 벌인 토벌작전에 대하여 『조선일보』의 동년 5월 25일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금번 간도토벌로 인하여 간도에서 공산촌을 건설하였다는 부락마다 가옥에다 방화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안을 위하여 근본적으로 소탕한 까닭으로 토벌군에게 처치된 공산당원은 대략 2만 오천명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간도에서 거처할 수 없어 각지로 20세 전후의 청년들은 각각 피난하였으므로 방금 파종기(播種基)를 당하고서도 간도일대의 농가에서는 속수무책 그날그날을 우려하는 중이라고 한다.’
아무리 공산당의 세력이 강하다고 해도 그 당원이 2만 5천여 명이나 되지는 않을 것이다.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무차별하게 죽이고 방화했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일은 동만지방 뿐만 아니라 남만지방도 같은 상황이었다. 조선군은 관동군과 협동하여 장백, 임강, 즙안 관구의 각 현에 출동하여 연속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토벌을 피해 산간지방으로 들어간 민중들이 그곳을 개간하여 해방지구를 만들고 청년을 중심을 자위를 위한 무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진행과정이었다. 이를 적위대나 유격대라고 했다. 이것이 만주에서의 항일빨치산의 출발이었다.”

만주 동북 각지 항일무장 유격대와 주요 지도자
중국공산당은 만주 지역의 항일투쟁을 체계화할 목적으로 1933년 9월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결성했다.
김경일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2005)에서 동북 각지 항일무장 유격대에 대해서 상세히 정리했다.
“1931년 11월 현재 동북 지역 중국공산당 당원 총 2,000여 명 중 한국인이 85%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공산당 만주성 위원회는 동만과 북만, 남만 지역의 각 현에 지속적으로 현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많은 한인들이 현(縣) 위원회의 서기를 역임하였다.
9·18사변이 터지면서 중국공산당은 동북 각지에서 항일 무장부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연변지구의 경우에도 중국공산당 동만 특위(東滿特委)의 지도하에 각지에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933년에는 <중국 노농홍군(勞農紅軍) 제32군 동만 유격대>가 창설되었고 동만 항일근거지에는 각 급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당시 중국 남방의 중국공산당 핵심 근거지를 제외한 지역에 소비에트 정권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사실은 – 물론 러시아를 지척에 두었기 때문에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 동만 일대의 항일투쟁과 중국공산당의 관계를 잘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유명한 항일유격대로는 반석(磐石) 유격대, 동만(東滿) 유격대, 주하(珠河) 유격대, 영안(寧安) 유격대, 탕원(湯原) 유격대, 요하(饒河) 유격대 등이 있었다.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창설된 후 이들 유격대는 각각 항일연군의 제1군, 제2군, 제3군, 제5군, 제6군, 제7군의 모태가 되는데, 약 20여 만명의 병력과 각종의 경무기와 중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자 현 국가정보원 원장인 이종석은 『북한-중국관계(1945~2000)』(2001)에서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언급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공 중앙은 만주성위원회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했다. 이 지시에 근거해 만주 전역에서는 항일유격대 건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의해 중국공산당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이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일찍이 1932년 2월 남만에서 이홍광(李紅光)이 반석공농유격대(盤石工農遊擊隊)를 결성했으며 북만의 요하지방에서는 최용건(崔庸健)이 1933년 4월 김문형 등과 함께 조선족만으로 이루어진 요하공농병(饒河工農兵) 반일유격대를 발족시켰다. 초기 유격대원의 90%가 조선인이었던 동만 각지에서도 1932년 봄부터 유격대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에 편입된 동북지방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만주 항일유격대에 핵심 무력으로 참가하면서 상당수는 중요한 직책을 맡는다.
김경일은 앞의 저서에서 당시 유명한 항일유격대에서 지도자로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조선인을 조명했다.
“반석유격대는 1932년에 중국인과 한인들이 하마하자(唅馬河子) 일대의 반일 폭동 중에 조직된 것으로, 이 부대를 조직하고 지휘한 사람이 바로 중국공산당원이며 한인인 이홍광(李紅光)이었다. 이홍광은 후에 항일연군 제1군 참모장을 맡았으나 일본군과 위만군(僞滿軍)과의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항일연군 제1군의 한 사단의 사단장(師長)으로 있었다. 동만유격대는 항일연군 제2군의 전신으로 동만 지구의 한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책(金策)은 조상지(짜오샹즈, 趙尙志) 장군 휘하의 항일연군 제3군에서 정치부주임을 맡고 있었으며 이복림(李福林)은 제1사단 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항일연군 제6군 제1사 사단장 마덕일(馬德一), 정치부주임 서광해(徐光海) 등도 한민족 지도자로서 이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다.”
중국공산당 8·1선언과 코민테른 7차대회 그리고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
1935년 8월 1일, 중국공산당은 대장정(大長征) 중에 ‘전국 항일 및 민족 구원을 위한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為抗日救國告全體同胞書)’를 발표하면서 내전 중지와 일본에 대한 광범위한 항일을 위한 전국 민족통일전선을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이 선언문은 1935년 7월 25부터 8월 20일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이 발표한 선언문으로 중국 국민당에게 중국 내전을 종식하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인민을 단결시킬 것을 촉구했다. 또한, 계급이나 정당과 관계없이 전국의 모든 인민이 단결하여 거국적 ‘국방정부(國防政府)’와 ‘국가 구원을 위한 항일 연합군’ 구성을 제안한다.
제7차 코민테른 세계 회의는 세계 공산당 대표와 그 외 정치, 노동운동 조직 대표가 참석한 국제 대회였다. 대회는 유럽에서 나치 독일의 부상과 파시즘의 위협에 대항하여 공산주의와 비공산주의 세력 간의 인민전선 연대를 지지하며, 소련 공산주의와 유럽 자본주의 국가 간 집단안보 협력을 가져왔다. 이는 1928년에 있었던 종전의 제6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지지를 받은 계급투쟁으로부터 극적으로 선회한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은 8·1선언과 제7차 코민테른에서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 노선이 채택된 이후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출범은 중국공산당이 기존의 강경한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를 완화하고, 조선인 혁명가들을 불신하며 숙청했던 ‘민생단 사건’의 오류를 공식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이제 각 당파는 물론 제 민족과 함께 공동전선을 구축해 재만 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도 적극 지원했다.
이종석은 『북한-중국관계(1945~2000)』에서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 민족통일전선이 강조되면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항일투쟁에서 전기를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조중(朝中)연합의 항일유격대를 지도한 것은 중국공산당이었다. 따라서 조선혁명을 궁긍적 목표로 삼고 있던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중국혁명에의 복무를 요구하는 중공과 상당한 갈등을 빚었으며, 그로 인해서 부당한 핍박도 받았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유격대원의 다수가 조선인이었던 동만에서 심했다. 그러다가 1935년 7월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 민족통일전선이 강조되면서 중공이 동만의 유격부대를 조선혁명의 추진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대일투쟁에서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만의 유격부대들은 1936년 3월, 산하에 사(師)를 둔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다. 이 개편에서 김일성은 제3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그의 부대는 조선 해방과 연관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조·중 국경지대인 장백현 일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제3사는 동남만 유격대의 통합편재로 인해서 곧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로 개편되었으며,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 1936년 5월에 결성된 조국광복회의 국내 조직사업을 추진하는 주체가 되었다.
김일성의 제6사는 국내 진공작전의 일환으로 1937년 6월에 보천보전투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부대가 주도한 조국광복회의 국내 조직과 장백현 일대의 조직은 1937년 10월과 1938년 7월 등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일제의 검거작전에서 조직원 739명이 체포됨으로써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 만주에 대한 일제의 대토벌
만주는 조선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였다.
동북항일연군은 넓은 면을 완전히 통제하기 어려운 일제의 취약점을 파고들었다. 이들은 기동성을 살려 주요 보급로인 철도를 파괴하고, 점령지 도시를 기습 타격하여 관동군을 교란했다.
특히 동북항일연군은 농민들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소작료 감면 및 토지 분배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를 통해 식량과 병력을 안정적으로 조달했다. 동북항일연군은 게릴라 전술을 통해 관동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만주 전역을 완벽하게 식민화하려던 일제의 침략 계획을 꺾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군장과 근거지는 다음과 같다.
제1군 양징위(楊靖宇), 지린과 통화 일대의 남만주지역 /제2군 왕더타이(王德泰), 옌볜(연변) /제3군 자오상즈(趙尙志), 주허(주하) /제4군 리엔루(이연록), 미산(밀산) /제5군 저우바오중(周保中), 지린 동쪽 /제6군 샤원제(하운걸), 헤이룽장성(흑룡강성) 동북쪽 /제7군 천릉주(진영구), 헤이룽장성 동쪽.
동북항일연군에서 조선인이 많았던 부대는 제1군과 제2군 그중에서도 제2군은 조선인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던 동만주 연변 일대로 절반 가까이가 조선인이었다. 이때 김일성은 2군 3사를 이끌고 대부분이 조선인이었고 사실상 조선혁명군이었다.
이후 제1군과 제2군은 합쳐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개편된다. 제1로군 총사령관인 왕징위(1905~1940)는 기본 부대가 6,000여 명에 달했고, ‘동변도’로 불리는 남만주의 퉁화성과 지린성의 산악지대에는 한때 ‘낮에는 만주국, 밤에는 양징위의 나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군세가 강했다. 또한 양징위는 중국과 조선의 인민이 단결해서 공동의 원수인 일제에 맞서 싸우자는 <중한민족연합가(中韓民族連合歌)>를 지어 양 민족을 고취했다.
하지만 이들 일곱 군장 중 일제 패망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동북을 떠나 활동한 리엔루를 빼면 저우바오중 뿐일 정도로 희생은 컸다.
김경일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에서 1937년 일제의 4개 사단 병력을 동원한 ‘삼강성(만주국 동북지방 행정구역 14개 성 중 하나) 대소탕’전을 기록했다.
“1939년에 이르기까지의 반(反)소탕 전쟁에서 항일연군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 감소되고 30여 명의 사단장 이상의 간부가 희생되는 등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후 항일 연군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은 더욱 잔혹해졌으며 양징우와 같은 항일연군의 고급 장교들이 차례차례 희생되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한 동북항일연군은 1942년 여름 주보증과 이조린(리자오린, 李兆麟)은 일단 부대를 보존한 후 일본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부대를 소련 경내에 이동시켜 군사훈련을 할 게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항일연군의 세 주력부대는 중소 변경지구에 야영지를 설치하고 집중적인 훈련을 하게 되었는데, 그 해 가을에 코민테른의 동의를 거쳐 중국 동북 지방의 항일연군 부대들은 항련교도여단(抗聯敎導旅, 일명 국제여 또는 88여단)으로 개편되었다.”
일제의 무차벌 대토벌로 동북항일연군은 항련교도여단으로 개편
1939년 가을부터 전개된 일제의 대토벌로 만주 전역의 유격 대원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일제의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토벌작전은 대규모 군사력 동원과 주민 강제 이주 및 격리 그리고 가혹한 보복과 초토화 전술을 사용했다. 또한 관동군은 유격대의 보급과 은신을 막기 위해 산악지대를 집중 포격하고 불태웠다. 그뿐 아니라 일제는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민간인을 특정 지역에 모아두고 성벽과 철조망으로 둘러쳐 유격대와의 접촉을 원천 봉쇄하는 집단부락을 만들었다.
일제는 항일 세력 가족이나 협조자를 색출해 처형하고, 마을 전체에 책임을 묻는 공포 정치 시행했다. 또한 식량, 의복, 무기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통제하여 빨치산을 고립시켰다. 특히 조선인 중심의 특설부대인 간도특설대를 만들어 잔혹한 게릴라 소탕과 귀순 공작을 병행했다.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에 나오는 양징위 사령관에 대한 일제의 구체적이고 악랄한 ‘동변도’ 토벌작전 내용이다.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일본과 만주국 군경은 총 7만 5,000명을 투입해 ‘동변도 치안 숙정공작’을 전개했다. (중략) 1,200명으로 편성된 통화성 경찰토벌대는 양징위의 추적에 전력을 기울였다.
‘비민분리(匪民分離)’를 목적으로 일반 민중을 ‘집단 부락’안에 가두어두고, 영하 40도라는 혹한의 산악지대에 빨치산을 몰아넣어 집요하게 추적하는 작전이었다. 빨치산은 전투 자체보다도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극도로 체력이 소모되었다. 그 결과 1938년에 1,000여 명 정도였던 양징위의 부대도 1940년 1월 이후로는 수십 명으로 줄었다. 2월 18일에는 마지막 남은 두 대원마저 식량 공작을 떠났다가 희생되고, 양징위만이 홀로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서른다섯 살의 젊은 나이였다.
(중략)
토벌대는 양징위의 사체의 배를 갈랐다. ‘비적을 잡으면 늘 하던 일’이었다고 한다. 무엇을 먹고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밝혀내 비적들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양징위의 위장에서는 단 한 톨의 곡식도 발견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나무껍질과 풀뿌리, 그리고 솜옷에 사용되는 솜만 나왔을 뿐이었다. 양징위의 목은 효수되었다. 얼어붙어 쉽게 잘리지 않았기 때문에 작두를 썼다고 전한다.”
이러한 가혹한 탄압과 혹한 속에서 세력이 크게 약화한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연군 부대들은 항련교도여단으로 개편된다. 김경일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에서 항일연군이 국제여단으로 개편된 것에 관해 기록했다.
“소련의 극동지구에 세워진 국제여단(國際旅團)에는 동북 중국공산당의 주요 수뇌부와 동북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해온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핵심이 집결하여 있었다. 두 민족의 공산주의자들은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을 함께 전개하였으며, 국제여단에서도 소부대를 조직하고 중국의 동북 지방에 침투하여 정찰활동 등을 전개하였는데, 주보중, 이조린, 김일성 등이 이런 소부대활동을 직접 지휘하였다고 한다.
당시 주보중은 소련측 책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일성이 남만 제1로군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간부이며 양정우, 위증민 두 동지가 희생된 후 그가 남만 유격운동을 지도하면서 남만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계속 책임질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국제여단이 조직, 창설되던 시기에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지도권 문제에 관해 중국 측과 소련 측의 갈등이 있었다. 처음 소련 극동 홍군 사령부와 당 위원회에서는 동북항일연군 각 부대와 당 조직을 통합하여 이를 소련 극동 홍군의 관할권에 두고 소련이 중국 측 항일연군의 총 사령관을 맡고자 하였다.
이에 주보중은 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며 중국공산당의 항일노선을 집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소련은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다른 나라 인민혁명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각국 공산당의 독립성을 보다 더 존중해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동북 항일연군 총 사령관은 절대로 소련 측이 맡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주보중이 중국 혁명을 소련 혁명에 복종시키거나 소련 혁명의 부속물로 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지지 입장을 표명하였다.”
조선 독립운동 각 진영의 갈등과 대결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 독립운동 각 진영은 활기를 띤다.
김경일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에서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조선 독립운동 지지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장개석 정부가 공개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국민당의 관련 인사들이 고문의 신분으로 임시 정부 내 각파의 분쟁을 조정하기 시작하였으며 임시 정부 내 고급 직책의 인선과 정원배분 등 중요한 문제에도 관여하기 시작하였는데, 장개석 자신도 정견이 다른 김구와 김약산(金若山)을 각각 접견하여 한국 독립운동 좌우파의 합작을 권유한 바 있다.
(중략)
중국에서의 한국임시 정부의 주요 활동 경비는 해외 독립단체들의 원조, 중국 사회민간 단체들의 찬조와 국민당 정부의 재정 지원으로 충당되었다. 1940년대부터 한국임시 정부는 재정적으로 주로 국민당 정부의 지원에 의지하였다.”
조선 독립운동의 주요 진영인 민족주의(임시정부)와 사회주의(의열단·조선의용대 등) 계열은 중국 관내에서 갈등과 대결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물론 항일무장 유격대는 주로 동북 지방의 깊은 밀림 속에서 게릴라전으로 일본군과 싸웠고 뒤에 소련 국제여단으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후방 도시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와는 접촉과 소통은 있을 수 없었다.
앞의 저서에서 김경일은 조선 독립운동 두 진영의 갈등과 대립이 경력과 이념 차이에 있다고 정리했다.
“무엇보다도 경력과 이념의 차이가 이미 그들을 갈라놓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국민당의 중심부 중경과 중국공산당의 중심부 연안에 자리한 한국임시 정부와 조선독립동맹도 비록 항일전쟁시기에 공동의 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하여 그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이 두 진영은 조선의용군 총사령이었던 무정(武亭)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연계를 가지 않았으며’ 어떤 형식의 합작도 이루어보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 한국 독립 운동 두 진영은 두 차레의 합작을 이루었던 중국의 국공 양 진영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항일전쟁 기간 중 연안의 중국공산당과 중경의 국민당이 서로 다른 이념을 대표한 것과 마찬가지로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동북의 공산주의자들과 중경의 한국임시 정부는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을 성취하자는 데에 있어서는 목표를 같이 하였지만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어 이미 갈등 요소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는 이념을 극복하고 일제에 맞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순국선열과 열사들을 찾아내야 한다. 일제가 의병이나 독립운동가를 일반 범죄자로 위장해 처벌한 기록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사라진 의병과 무명 항일 투사들의 행적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또한 냉전 시기에 가려졌던 사상적 편견을 극복하여 통합적인 독립운동사를 재구성해야 한다. 특히 사회주의 계열이나 항일빨치산 등 특정 노선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된 독립운동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운동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강준만은 『한국 근대사 산책 8권: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에서 독립운동사에서 ‘침략사’가 아닌 ‘항거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5년 8월 EBS는 광복 60주년 특집으로 제작란 10부작 다큐멘터리 <한국독립운동사> 9부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다룬 <올기강은 흐른다>를 방영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연출·출연·편집·내레이션까지 맡은 도올 김용옥은 방영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 동안 알려진 우리 독립운동사는 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독립운동사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정직하게 국민들과 공유하고 싶어 이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됐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제 ‘침략사’가 아닌 ‘항거사’를 써야 한다”면서 “‘누가 일제 강점기에 친일했다더라’는 식의 폭로로는 역사가 바로 잡힐 수 없다. 우리 역사의 0.1퍼센트도 되지 않는 친일파보다는 의식을 가지고 항거했던 99.9퍼센트의 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현대사도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사대친일친미행위자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외세와 독재에 맞선 자주·민주·통일 인사들을 적극 발굴해 기록해야 한다.
대구, 미군정 치하의 민중항쟁의 중심지
만주가 일제강점기 조선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였다면, 대구는 미군정 치하의 민중항쟁과 4월혁명공간 민중운동의 중심지였다.
대구·경북지역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투사를 많이 배출한 곳으로 다른 지역보다 정치의식이 높고 진보세력의 역량이 뛰어난 곳이었다. 특히 격동의 해방공간에서 ‘조선의 모스크바’ 불렸던 대구는 그 어느 곳보다 혁명의 열기가 높았다.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김상숙은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10월 항쟁』(2013)에서 대구·경북지역 진보세력의 힘이 쎘던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당시 대구· 경북지역에서 진보세력의 힘이 강했던 이유는 우선 대중의 지지도가 높았다는 데 있다. 보수세력은 친일 경력을 지닌 인사가 많았으나, 진보세력은 항일운동 경력을 지닌 인사가 많았으므로 대중은 이들을 지지함으로써 건국운동 의지와 사회 참여 열기를 표현했다.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토지개혁을 통해 봉건적 신분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진보세력을 지지했다.
대구의 진보세력은 분파 갈등이 거의 없었고, 조선인민당과 조선공산당 사이의 갈등도 거의 없었다. 심지어 보수세력과도 노선 차이를 앞세우기보다는 항일운동을 함께했다는 공감대 속에서 지역 문제를 협의하고 몇 차례 좌우 합작을 실현했다. 대구의 진보세력은 이러한 유연성 때문에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의 열기가 높은 만큼 민중항쟁으로 희생도 컸다.
대표적인 것이 대구 10월 인민항쟁이었다. 10월 인민항쟁의 원인은 브루스 커밍스가 지적했듯이 대부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면서 켜켜이 쌓인 농민들의 분노가 봉기의 기폭제가 됐다. 여기에 조속히 통일국가가 수립되지 못한 것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김상숙은 앞의 저서에서 대구·경북 9월 총파업 위력과 이후 10월 민중항쟁을 정리했다.
“1946년 9월 23일, 부산철도노조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평 주도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중략) 대구에서는 파업과 시위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정해구는 대구에서 9월 총파업이 강력했던 이유에 대해 첫째, 대구의 노동운동이 비교적 탄압을 덜 받으면서 주요 노조의 쟁의를 통해 대구노평이 조직 역량을 키울 수 있었던 점, 둘째, 대구의 파업은 서울의 파업처럼 강력한 경찰이나 우익에 의해 일찍 분쇄되지 않았던 점, 셋째, 대구 지역 진보세력이 분열되지 않았던 점을 들고 있다. 더불어 9월 총파업이 일어나기 전부터 노동자·학생·청년·시민들이 함께 민전 주도로 연대집회와 시위를, 미조직 빈민들은 식량 요구 시위를, 농민들은 공출 반대 시위를 계속 벌이면서, 여러 계층·계급 대중의 반복된 투쟁 경험이 대중정치 투쟁의 역량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이는 10월 1일 후 대규모 민중항쟁으로 나타난다.”
김낙중은 『한국노동운동사-해방후 편』(1982)에서 대규모 항쟁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서 분석했다.
“많은 노동자 농민들이 좌익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성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평의 저항투쟁에 호응하여 동조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사회 경제적 기반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첫째로 시민 대중의 생활난의 문제였다. 생산의 부진과 수요의 급격한 증대 그리고 악성 인플레에서 초래된 천정부지(天井不知)의 물가고, 도시민의 식량난과 취직난, 농민들에 대한 양곡 공출제도에 대한 반발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8·15 직후, 일제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건국준비위원회 계통 인사들의 주동으로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전국에 걸쳐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미군정 당국이 전적으로 무시하고 오히려 일제시대에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민중을 탄압하던 경찰을 위시한 행정조직을 그대로 유지 보존하려고 한 데 대한 반발 등은 9월 철도 파업이 전국적인 규모로 폭력화하면서 확산된 배경이 되었다.”
약 3개월 동안 계속된 10월 인민항쟁은 미군정의 가혹한 탄압에 수많은 민중이 학살당하며 끝나고 말았다. 경북 22개 군 가운데 대부분 지역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브루스 커밍스는 “12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된 10월항쟁에는 약 300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 200명 이상이 피살되었고, 죽은 관리, 시위자 및 민간인 수는 1천 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라고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밝혔다.
10월 인민항쟁으로부터 사실상 집단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대구, 4·19혁명의 도화선이자 4월혁명공간 민중운동 중심지
6·25전쟁으로 또다시 대규모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전쟁 이후 집단학살은 주로 낙동강 방어선 이남의 인민군 미점령 지역인 대구 가창골, 경남 마산 앞바다를 포함한 낙동강 전선 이남 지역 등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4·19혁명의 도화선인 2·28대구학생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승만 친미독재가 무너지자, 곳곳에서 6·25전쟁 전후 집단학살의 진상규명 운동이 대중적으로 분출된다. 그동안 숨죽였던 피학살 유족들의 억눌렸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피학살자 유족들은 각 지역별로 유족회를 결성하고, 대중운동으로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 운동에 나서기 시작한 곳이 대구·경북이었다. 4월 혁명공간의 대표적 대중운동으로 ‘전국피학살자유족회’ 결성을 대구 유족이 주도했다.
1960년 5월 30일 경북지구피학살자합동위령제준비위원회가 제일 먼저 결성됐다.
이어서 6월 15일에 대구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이하 경북유족회)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경북유족회는 선언문을 통하여 “우리들은 민주 건국 발전사상에 있어 유례없는 오점과 반민족적 죄과를 범한 동족 대학살에 희생된 원혼의 유가족들에 의하여 조직된 피의 결합체”로 규정했다. 그리고 당면 과업으로 ① 헌법에 규정된 기본 인권 보장, ② 예방 학살의 정치 도의 확립, ③ 학살 피해에 대한 국가 형사보상, ④ 합법적 절차를 통하여 관련자에 대한 집단 고발 및 처단, ⑤ 피학살자 원혼탑 건립, ⑥ 불법적 반민족 현상에 대한 비판 시정 등을 삼부에 건의·요구하고 전 동포들에게 학살과 대결하는 국민운동 전개 등을 제시했다.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과 서도원 등은 대구가 배출한 4월혁명공간 민중운동의 이론가이자 활동가였다. 이들이 주도한 4월혁명 공간의 청년 전위조직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경상북도연맹은 피학살자유족회 운동뿐만 아니라 4·19혁명 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투쟁인 ‘2대악법(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반대투쟁’을 선도한다.
물론 ‘2대악법 반대투쟁’을 제일 먼저 한 곳도 대구 교원들이었다.
1961년 3월 5일 대구·경북지구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원노조)는 ‘2대악법’ 반대 결의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전국에서 제일 먼저 3월 18일, 대구 반민주악법반대 공동투쟁위원회가 주최한 ‘2대악법 빈대 시민궐기대회’를 민중과 학생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하고, 시가행진과 횃불 데모를 한다.
이때도 민민청 경북연맹 성원이 주도했다.
하지만 도예종과 대구 인사들의 4월혁명공간 민민청 활동 등 쉬지 않는 투쟁은, 박정희 정권이 1974년 유신 체제 반대 투쟁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주로 둔갑시키기 위해 가혹한 고문과 조작으로 소위 ‘2차인혁당 사건’이란 공안사건을 만들어낸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 확정한 뒤 바로 다음 날 9일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을 국가가 살인한다.
필자는 ‘사법살인’이라고 하면 국가의 책임보다 사법에 책임을 묻게 되기에 ‘국가살인’이라고 주장한다. 재심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국가가 사형을 집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구는 집단학살 하면 총살·암매장한 ‘가창골’로 상징됐던 곳이었는데, 소위 ‘2차인혁당 사건’으로 또다시 국가 학살지로 오명을 덮어쓰게 된다.
신동숙 여사는 여성으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부군 도예종의 죽음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대구는 이런 기막힌 희생이 많다 보니 남편의 신원(伸寃)과 진실규명을 위해 온 생을 받쳐 활동한 열녀들이 많았다. 신동숙은 이들과 의지하며 도예종의 진상규명을 위해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헌신한다.
이후 신동숙은 4월혁명공간 경북피학살자유족회 원호부장 이복녕, 학생위원 김현구, 부녀부장 최찬 여사와 민가협 양청자 여사와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이형락의 아내인 한기명 그리고 장기수 이준원과 김병길과 함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간직한 유족을 동지애로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함께 살아갔다.
대구지구피학살자 유족 대표 이원식이 작사하고 권태호가 작곡한 전국유족회 결성대회에서 채택된 회가 〈맹서하는 깃빨〉 가사이다.
사나운 바람 불어 이 마음 쏘고 외치는 분노의 피 물결치면서
자장가도 구슬픈 추억이 아~ 새하얀 밤을 흐르고 있네
가자 대열아 피를 마시고 자라난 우리는 피학살자의 아들 딸이다.
민족의 원수들 손에 무참히 죽어 간 님들의 이름은 자유의 벗
빛나는 역사 태양과 함께 돌꽃이 되어서 피게 하소서
가자 검은 기 맹서하는 깃빨 우리는 피학살자의 아내들이다.
무덤도 흔적도 없는 원혼들이여 천년을 두고 두고 울어 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가자 서로가 아는 것이 큰 힘 우리는 피학살자의 부모들이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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