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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다. 소련 침공에는 독일을 주축으로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6개국 동맹국 군대 약 410만 명 이상 190사단의 병력과 방대한 기갑부대를 동원했다.(러시아역사 다이제스트100, 나무위키)
이후 1945년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된 이 전쟁을 보통 ‘독소전쟁’이라 부른다. ‘독소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전체 전황의 80%를 차지했던 동부전선의 핵심이었다.
나치 히틀러는 약 330만 독일군 병력을 동원해 북부집단군, 중부집단군, 남부집단군 세 갈래의 집단군으로 나누어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거의 3,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독일은 개전 일주일 만에 북부군은 발트 3국을 거쳐 러시아군을 물리치며 드비나강에 도착했고, 중부군은 벨라루스를 거쳐 스몰렌스크를 공략했다. 한편 남부군은 소련의 국경 부근에서 고전한 끝에 가까스로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키예프 근처까지 전진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기습에 소련은 ‘대조국전쟁’으로 맞선다
기습당한 소련군은 연일 후퇴를 거듭하지만, 러시아의 전통적인 민족정신이 되살아나면서 소련은 반격한다.
소련은 1812년 나폴레옹 침략을 격퇴한 것은 성전(聖戰) ‘조국전쟁’으로, 2차 세계대전의 독소전쟁은 ‘조국전쟁’을 뛰어넘는 민족과 공산주의 혁명의 운명이 걸린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이라 부르며 인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한다. 수백만 명의 소련인들은 붉은 군대에 앞다투어 지원했다.
독일현대사와 국제정치사가 전공인 오키 다케시는 『독소전쟁: 모든 것을 파멸시킨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21)에 나오는 소련의 ‘대조국전쟁’ 명명 설명이다.
“‘대조국전쟁’이라는 명칭은 독일군 침공 다음 날인 1941년 6월 23일 공산당기관지 『프라우다Pravda』에 발표된 논설에서 처음 등장했고, 곧바로 대독전쟁의 공식 호칭이 되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를 향한 혐오를 억제함과 동시에 러시아혁명 이후 공산주의 정권이 달성해온 공업화와 생활 수준 향상 등의 성과를 호소하고 그러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체제와 조국을 동일시하는 메타포였다. 즉 내셔널리즘과 공산주의 체제의 옹호가 융합되었다. (중략)
1941년 6월 22일 독소 개전을 알리는 연설에서 몰로토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들의 대의는 선善이다. 적은 궤멸할 것이다. 승리는 우리들의 것이다.’”
사실 소련은 독소전쟁 발발 전에 독일의 침공 경고를 영국과 소련의 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1895~1944)의 기밀보고서를 통해 알게 된다. 물론 조르게의 정보만이 아니라 독소전쟁 발발이 가까워졌다는 정보는 많았다.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련의 전설적인 공작원 리하르트 조르게는 러시아혁명을 통해 자신도 혁명의 대열에 복무할 것을 결의하며 중국과 일본 첩보 활동에 나선다. 조르게의 임무는 일본의 대소련 정책과 소련 공격 계획의 유무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서경식은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돌베개, 2007)에서 리하르트 조르게의 전설적 정보활동을 간결하게 정리했다.
“조르게 그룹은 많은 귀중한 정보를 모스크바로 유출했는데, 그중에서도 1940년 6월 독일이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할 것을 예고한 정보와 1941년 7월 2일의 어전회의 결정에 근거한 ‘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라는 정보가 결정적이었다.”
리하르트 조르게의 독일의 소련 침공 기밀보고서
스탈린은 독소전쟁 약 3주 전에 독일의 침공이 가깝다는 경고를 전하는 리하르트 조르게의 기밀보고서를 접한다.
오키 다케시의 『독소전쟁』에 나오는 조르게의 기밀보고서 내용이다.
“도쿄 1941년 5월 30일
베를린은 주일 독일대사인 오이겐 오토Eugen Ott에게 독일이 6월 후반에 소비에트를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해왔다. 오토는 95퍼센트의 확률로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해왔다.(후략)
스탈린이 읽은 것은 독일지 『프랑크프루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의 특파원으로 일본에 가서, 당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정권의 핵심부로 깊이 침투해 있던 소련의 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의 기밀보고였다. 독소전쟁 발발 약 3주전에 독일의 침공이 가깝다는 경고를 전하는, 소련으로서는 귀중한 정보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독일이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한다는 정보를 믿지 않았다.
『독소전쟁』에서 오키 다케시는 스탈린의 오판에 대해 기록했다.
“조르게의 보고만 무시된 것이 아니었다.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소련의 스파이 망이 모스크바로 전한 정보는 일설에 의하면 백 수십 건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1941년 초여름, 스탈린은 독소전쟁 개전이 다가왔다고 알리는 정보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고 국경 수비를 맡는 각 군대에 경고는커녕 오히려 도발적 행동을 취하지 말라고 경고 하기만 하였다(중략)
이러한 착오의 대가는 컸다. 스탈린이 채운 족쇄 덕분에 소련군 부대는 무방비이거나 무경계 상태로 독일의 침략과 직면하게 되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일대 기습으로 밀려들었고 소련군은 한때 붕괴를 걱정할 정도로 큰 피해를 당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스탈린의 오판이 참화를 더 크게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시민사회운동가인 이무열의 『러시아역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22)에 나오는 스탈린의 오판이다.
“스탈린은 이상하리만큼 독소불가침조약을 신뢰하고 있었다. 아마도 독일이 유럽 중서부의 지배기반을 채 다지기도 전에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을 공격해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6월 22일의 날짜까지 언급하며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각종 보고들이 쓸데없는 소리라며 일축했고, 전쟁 전날까지도 전선의 소련군에는 독일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할 일체의 행동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하달되고 있었다.”
특히 스탈린은 뮌헨회담 이후 자본주의 제국, 특히 영국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소련의 항전, 레닌그라드를 사수하라!
오키 다케시는 『독소전쟁』에서 스탈린이 독일의 소련 침공 정보를 믿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스탈린이 생각하기에 독소불가침조약(1939년 체결) 이후 독일과의 우호 관계는 비록 나빠지기는 했지만 폴란드 분할을 시작으로 독소 쌍방에 커다란 이익을 주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그 이익을 쉽사리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이 네 나라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할양을 결정한 뮌헨회담(1939년) 이후 서유럽 자본주의 제국, 특히 영국은 소련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적대적 태도를 취해왔다.
적어도 스탈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이 독일을 소련과 전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계략을 꾸미고 있다고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기습을 당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전격전(Blitzkrieg)’이라는 대규모 기계화부대에 밀려 연일 후퇴를 거듭했다. 6개월 만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유럽 러시아의 절반이 히틀러의 수중에 떨어졌다. 스탈린이 경계 조치를 하지 않아 서전(緖戰)에 대패를 초래했고 오판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스탈린은 과거 소련의 수도이자 러시아 혁명의 상징적 장소인 레닌그라드를 독일군이 짓밟게 할 수는 없었다. 레닌그라드는 발틱 함대가 있었고 상당수 군수물자 시설이 있는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전략적인 곳이었다. 당시 레닌그라드에는 약 330만 명의 소련 인민이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잔류하고 있었다.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채로 외부로부터의 보급이 차단된 상태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1941년 9월 8일부터 1943년 1월 27일까지 무려 871일간 독일군의 포위하에 있었다.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레닌그라드 공방전(Leningrader Blockade)’이다.
독일군은 시가전을 피하고 도시를 굶겨 죽이는 레닌그라드 봉쇄전략을 택했다. 레닌그라드 인민들은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도 군수 공장을 계속 가동하여 소총과 포탄을 만들어 독일군에 맞서는 영웅적 투쟁을 벌인다.
이무열은 『러시아역사 다이제스트 100』에서 소련의 항전, 레닌그라드 사수에 관해 설명했다.
항전과 후퇴가 거듭되는 가운데 소련인의 조국애에 불이 붙었다. 전선으로 보내달라는 노동자들의 지원이 쇄도했고, 병사들의 투지도 갈수록 높아갔다. 도시의 방어에는 병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시민이 몸 바쳐 참여했다.
900일간에 걸친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대조국전쟁사에서 영웅적인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941년 9월, 독일군이 시를 포위했다. 비축식량과 연료는 얼마 되지 않았다. 외부와의 연결로는 비행기와 라도가 호를 가로지르는 수로(겨울에는 호수 위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빙판 길이 생긴다)뿐이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도시는 포격과 공습으로 부서져갔다. 그러나 시민과 병사들은 놀라울 정도의 투혼을 발휘하며 제자리를 굳게 지켰다. 독일군은 끝내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리하르트 조르게의 일본 어전회의 정보, ‘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
소련 음악인들은 오케스트라 연주를 통해 레닌그라드 인민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굴하지 않는 정신을 보여주었다.
군인 출신 서천규는 『클래식과 전쟁사』 (북코리아, 2025)에서 당시 레닌그라드 상황을 정리했다.
식량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배급제를 시행했으나 이것마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한을 받아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1942년 1~2월에는 하루에 700~1,000명의 사람이 기아로 죽어갔다. 가죽을 삶아 먹거나 쥐, 새, 애완동물은 물론, 인육을 거래하는 상황까지 갔다. 당시 레닌그라드 경찰은 식인종을 단속하는 특별단속반을 운영했고, 200여 명을 판결했다고 한다.
특히,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까지 혹한에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는데, 톱밥이 다량 함유된 혼화제 성분의 빵을 배급받았으며 그마저 군인과 노동자만 받는 기간도 있었다.
겨울이라 영하 30°C가 넘는 혹한에 에너지가 문제였다. 혹한에 동사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시내 여기저기에 시체가 즐비했다. 기간 중 군인이 150만 명 이상, 노약자와 여성 등 민간인 140만 명 이상이 대피 중 포격 또는 기아로 인해 사망했다고 한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레닌그라드 시민의 저항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희망의 빛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가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7번 교향곡은 시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기폭제가 되었고, 레닌그라드의 참혹한 상황을 외부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스탈린은 리하르트 조르게의 1941년 7월 2일의 일본 어전회의 결정에 근거한 ‘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라는 정보를 접수하고 대조국전쟁 반격에 나선다.
서경식은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에서 리하르트 조르게의 일본 어전회의 정보 – 남진 정책 –가 스탈린이 극동 병력을 대독일 반격에 투입할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일본이 ‘북진’할 것인가, 아니면 ‘남진’을 선택할 것인가. 독일과 미국을 경유하여 신분을 위장한 조르게는 1933년 9월 6일 요코하마에 상륙했다. 조르게 정보조직의 활동은 이때부터 그가 검거되던 1941년 10월 18일까지 약 8년여 동안 지속되었다.
(중략)
스탈린은 독일의 소련 침공 정보는 믿지 않았지만, 일본이 북진하지 않는다는 정보 덕분에 소련은 극동 병력을 대독일전에 투임함으로써 모스크바 방위에서 대독일 반격으로 국면을 전환할 수 있었고,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체 전황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리하르트 조르게의 일본 공산주의 동지 오자키 호쓰미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 정권 중추에 잠입해 있던 공산주의 동지인 오자키 호쓰미(尾崎 秀実, 1901~1944)를 통해 많은 귀중한 정보와 정세 분석을 받았다.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에서 서경식은 리하르트 조르게와 오자키 호쓰미가 이념적 동지로 만나 ‘세계적 공산주의 대동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제국과 맞서 싸웠다고 강조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에 대한 학살에 충격을 받은 오자키는 1925년경부터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경도하여 좌익운동의 동조자가 되었다.
1928년부터 3년여 동안 특파원으로 상하이에 체류했는데, 이 시기부터 루쉰을 비롯한 중국의 진보적 인사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중국 혁명의 질풍노도를 온몸으로 경험한다. 1929년에는 아그네스 스메들리와, 이듬해인 1930년에는 스메들리의 주선으로 리하르트 조르게와 만나 동지가 되었다. 검사신문조서에 ‘진정한 의미에서 동지인 조르게’에 대해 ‘이 사건이 발각된 이후에도 추호도 그 동지애를 누그러뜨리지 않고’라는 진술을 볼 수 있다.
1932년에 일본으로 귀국한 오자키는 중국 문제 전문가로 알려지게 된다. 1933년부터 『아사히신문』의 동아문제조사회에서 일하고, 1937년부터는 쇼와연구회의 멤버로 참가했다.
(중략)
일본에 온 조르게가 오자키와 재회한 것은 1934년의 일이었다. 그 뒤로 치안유지법, 군기보호법, 국방보안법 위반 혐의로 1941년 10월 15일 검거될 때까지 조르게의 정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많은 귀중한 정보와 정세 분석을 제공했다.
일본 정권의 중추에 잠입해 있던 오자키의 정보는 그 자체가 일급 기밀이었다. 그러나 오자키는 단순한 정보 제공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난 일본, 중국 공산당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중국, 그리고 소련이라는 3자의 긴밀한 결합을 중심으로 구미 제국주의 대항하는 아시아 제민족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독자적 구상을 키우고 있었다.
그 구상이야말로 미래의 ‘세계적 공산주의 대동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검사신문조서’). 이러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오자키는 ‘고독한 단독 혁명가’(노무라 고이치)로서 대일본제국과 맞서 싸웠다.”
1941년 7월 2일, ‘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라는 일본 어전회의 남진정책(南進政策) 결정은 동남아 식민지 건설과 자원 약탈에 있었다. 일본은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독일에 항복하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에 눈독을 들인다. 일본은 1940년 9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1941년 7월에는 남부를 점령하여 교두보를 마련했다. 특히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석유에 주목했다.
또한 일본은 1939년 할힌골 전투(Battle of Khalkhin Gol, 노몬한 전투) 패배의 후유증도 컸다. 노몬한 전투(1939년 5월~9월)는 몽골 인민공화국 영토에서 발생한 소련군·몽골 인민군과 일본 관동군·만주군 사이의 무력 충돌이었다. 일본은 노몬한 전투 패배로 북진에서 남진 즉 남방과 미국으로 전략이 수정된다.
오자키 호쓰미가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전달한 정보는 스탈린이 독일과의 ‘대조국전쟁’에 전념할 수 있는 세계사 흐름을 바꾼 결정적 정보였다. 스탈린은 극동·시베리아 부대를 모스크바로 이동시켰다. 그 규모는 18개 사단, 전차 1,700대, 전투기 1,500대였다.
오자키 호쓰미의 위장전향, ‘상신서’
리하르트 조르게와 오자키 호쓰미의 영웅적 첩보 활동은 ‘독소전쟁’의 전체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오자키는 10월 15일에, 조르게는 1941년 10월 18일에 검거된다.
이때 그 유명한 오자키의 ‘상신서’에 대한 해석이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에서 나온다.
“오자키는 두 번에 걸쳐 천황제에 대한 전향 성명서로도 해석될 수 있는 ‘상신서’上申書를 작성한다. 이는 어떻게 해서든 오자키를 살려내려 했던 친구들과 가족의 간청을 받아들인 위장 전향이었다는 정설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타이완 출신의 역사학자 다이궈후이戴國煇의 말처럼, 그가 천황 숭배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정신적으로 천황의 수인囚人이 아니었다는 두 사실은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황제라는 음습한 감옥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투쟁은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만 겨우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오자키 호쓰미는 코뮤니즘과 내셔널리즘의 대립을 보기 드문 기량 안에 품으며 싸워나간 ‘단독혁명가’인 동시에 ‘특이한 에외자’였다.”
필자는 비전향장기수 신현칠(1917~2012) 선생으로부터 리하르트 조르게와 오자키 호쓰미에 관한 비전향과 위장전향에 대화한 적이 있다. 이 대화 내용은 신현칠 선생이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변하고 있다』, (삼인, 2009)에서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내게 내면적으로 확인된 것은, 확실히 그는 위장전향을 했다는 것이다. 위장전향 그 자체도 비난하려고 들면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형사(刑死)하게 되어있는데, 위장전향이 없었다면 더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차피 형사하게 되어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았던 듯싶다.
그의 정세판단으로 볼 때 일본의 패망은 목전에 임박했다. 1944년 들어서 일본의 패망은 확정적이었다. 오자키의 사상적 입장과 조르게에게 준 일본 상층부의 정보들을 종합해본다면, 더욱이나 체포 이전에 이미 일본 패망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기에 그 패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로서 또한 애국자로서 – 일본이 패망해야 일본 인민이 해방되고 일본이란 나라가 참되게 발전한다는 애국심으로 - 그 영웅적인 첩보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상신서를 쓰는 순간에도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그렇다면 위장전향으로 목숨을 연장하여 일본 패망 후, 다시 말하면 소위 종존 후에 공산주의자로서 일본 재건을 위해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법하다.”
하지만 신현칠 선생은 필자에게 “전향을 하면 이제는 다시 당원으로서 일할 자격이 없게 된다. 아니, 그것은 내가 더 이상 살아갈 자격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날 자기를 형성하기 위하여 바쳐진 일체의 생활도 없어진다. 곧 자기가 없어진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필자에게 신현칠 선생은 “지난날 자기를 형성하기 위하여 바쳐진 일체의 생활도 없어진다”라고 강조하셨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운 사람들
신현칠 선생은 오자키의 애석한 처신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변하고 있다』에서 상세히 서술한다.
“한마디로 오자키의 모든 판단,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를 모두 이해한 토대 위에서 결국 그의 처신은 사심에서 나온 것임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심-이것은 모든 원칙적인 행동을 그르치게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되새기게 된다. 그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웠고, 나는 그 상황에서 어찌했을 것이라 장담은 물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심을 책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그가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심에서만 나온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말해버리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혁명적 활동가였다. 그 점은 인정하기로 하자. 그러나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사심을 어찌 완전히 극복했다고 하랴. 더구나 아내와 자식에 대한 은애가 이에 가세하였다.
둘째, 그보다도 더 있음직한 사심은 종전 때까지 목숨을 보전하여 일본 인민과 혁명에 봉사하고 싶다는 열정이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사심에 견주면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사심이다. 그러기에 그도 걸려든 것인데, 그 생각도 역시 사심임에 틀림없다. 자기가 자기 역량을 바쳐서 혁명에 봉사해야겠다는, 이른바 ‘자기가 ~’의 생각이 바로 사심이 아니겠는가.
혁명은 자기 없이도 발전한다. 자기는 이 시점에서 혁명적으로 처신하면 될 일이지(그의 경우는 사형) 그 이후의 것에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은 사심이 아닐 수 없다. 그 사심 때문에 그는 진정 그 순간에 혁명적이어야 할 처신을 놓쳐버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한 무제 때 장수 이릉(李陵)의 투항을 두고 내가 1950년대 중반 옥중에서 생각하던 문제이다.)
사실 그는 그러한 처신-상신서 작성-에도 불구하고 사형되었으니 망정이지 (이릉처럼 자신의 사심대로 죽지 않고) 살아서 종전을 맞이한 뒤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혁명적 활동을 성취하지 못하고 녹록하게 삶을 마쳤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만일 그런 경우 그 처신의 욕됨은 어찌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신동숙 여사는 부군 도예종 선생이 불의에 굴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남편은 이념을 떠나 불의에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면회 한 번 못하고 편지 내왕도 전혀 못 했습니다. 영치금과 옷도 몇 달 지나서야 받아주었으며 변호사 면회도 제한하였습니다. 우리 변호사 황계룡씨는 그래도 몇 번 접견했다 했으나 다른 변호사는 피고인과 면회도 못 했다 합니다. 그리고 변호사집에 돌멩이 세례를 받아 공포에 싸여 우리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황변호사가 면회하고서는 ‘정책적인 일이니 너무 걱정말고 오히려 내가 건강이 좋지 못하니 건강에 조심하라’며 걱정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당신답게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서 행동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기억납니다.”
도예종 선생과 4·9통일열사들은 박정희 파쇼 정권의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고 4·19혁명 이후부터 쉬지 않고 활동했다. 또한 선생과 4·9통일열사들은 나라와 민족의 고난 앞에서 역사적 책무를 인식하며 생각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도예종 선생과 4·9통일열사들은 어떤 고문과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사형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역사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싸웠다.
그리고 도예종 선생과 4·9통일열사들은 아무리 강력한 국가 권력도 인간의 양심을 지배할 수 없음을 죽음으로 지켜냈다.
비전향장기수가 “민족의 운명이 고난에 처했을 때 역사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싸웠던 사람”처럼 도예종 선생과 4·9통일열사들도 민족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몸을 던져 투쟁했다.
도예종 선생과 4·9통일열사들도 비전향장기수처럼 “자기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운 사람들”이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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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23) 만주, 조선 독립운동과 항일 무장투쟁의 근거지 - 대구, 4·19혁명의 도화선이자 4월혁명공간 민중운동 중심지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8.02
신동숙(22)자작극·유도·조작 전쟁으로 만든 나라, 미국 - ‘민족의 자주’를 주장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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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6.16
신동숙(20)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와 스탈린 국제무대 부상 - 소련과 중국의 변화를 주목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5.20
신동숙(19) 소련의 대조국전쟁, 레닌그라드를 사수하라! - 자기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운 사람들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5.02
신동숙(18) 나치 독일의 파멸을 부른 소련의‘대조국전쟁' - 피학살자 유족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동지애로 보듬은 신동숙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4.07
신동숙(17) 만주를 장악하라!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장 만주 - 독립을 위해 순국한 안 의사와 통일을 염원하다 목숨을 잃은 남편의 뜻은 같다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3.19
신동숙(16) 영·일·미제국 식민통치 수단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 자주통일을 외쳤던 도예종과 4·9통일열사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2.24
신동숙(15)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 유고 빨치산과 간도 빨치산 그리고 군인들 세상에 저항하는 도예종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