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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민주노총이 경사노위(경제사회노동위원회) 조건부 참여의 세 가지 조건으로 내건 ‘합의제 운영’, ‘산별 참여 보장’, ‘명칭 변경’ 중 두 번째 요구인 ‘산별 참여 보장’은 언뜻 노동자 교섭력 강화를 위한 진일보한 요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실질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경사노위의 구조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오히려 산별 참여 보장은 총연맹 중심 구조를 산별 중심 구조로 재편하자는 요구에 불과하며, 정부와 사용자의 합의를 전제로 운영되는 경사노위의 틀 안에서 노동자 교섭력이 자동으로 강화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아가 조선업 노사정 협의체의 사례에서 보듯, 산별 참여가 제도적 틀로 자리 잡는다 해도 그것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1. ‘산별 참여 보장’의 내용과 그 한계
경사노위의 현행 법적 구성은 노동자 대표 5명, 사용자 대표 5명, 정부 대표 2명, 공익 대표 4명 등 총 16명 안팎의 본위원회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노동자 측 위원은 “전국적 규모의 총연합단체인 노동단체 대표자”와 그 추천을 받은 사람으로 대통령이 위촉하는 구조다. 문제는 본위원회의 노동자 대표가 총연맹(한국노총, 민주노총) 중심으로 구성되고, 개별 산별노조나 업종별 노조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공식 통로는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민주노총이 “산별 참여 보장”을 조건으로 내건 배경에는 초기업 교섭으로의 확장이라는 목표가 있다. 총연맹이 정부·사용자와 큰 틀의 합의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동차·조선·금융·공공 등 실제 산업 현장에서 교섭력을 가진 산별 조직이 경사노위 산하 업종별 위원회나 의제별 논의에 직접 참여하여 해당 업종의 현안을 교섭 의제로 올리고 실질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요구가 관철되면 업종 단위의 교섭 의제를 제기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긴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다. 기업별 교섭에 갇혀 있으면 원청·하청 구조나 업종 전체의 임금·고용 조건을 다루기 어렵지만, 산별 참여가 보장되면 조선업 전체의 하청노동자 고용 문제나 금융업의 성과급·구조조정 문제를 업종 단위에서 제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계 또한 분명하다. 첫째, 경사노위의 의사결정 구조 자체가 ‘합의제’가 아닌 한, 산별 대표가 참여하더라도 정부와 사용자 측이 반대하면 의제가 관철되기 어렵다. 민주노총이 ‘합의제 운영’을 별도 조건으로 내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업종별 위원회의 논의 결과가 구속력 있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으면 산별 참여는 ‘대화 창구’에 그칠 수 있다. 셋째, 총연맹과 산별노조 사이의 대표성 갈등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를 수 있다.
2. 조선업 노사정 협의체: 제도적 틀 확보에 그친 ‘성과’
산별 참여 보장의 실질적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조선업 노사정 협의체다. 금속노조는 2026년 7월 13일 출범한 조선업 노사정 협의체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이 1999년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이후 금속노조가 정부가 참여하는 협의체에 앉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때문에 노동측은 이를 “합의문”이 아니라 “의제 설정권과 참여 자체”로 규정한다. 즉 아직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노동측은 ‘무엇을 논의할 것인가’를 정하는 권한과 협의체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성과로 보겠다는 뜻이다.
박상만 금속노조 위원장은 출범식에서 “조선업은 비정규직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은 업종”이라면서 “협의체 발족을 통해 심화하는 불평등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길 바란다”고 말했고, 김준영 금속노련 위원장은 “원하청 이중구조의 근본적 개선과 실효성 있는 안전 대책”을 요구했다. 결국 원·하청 격차와 안전 문제를 노사정 테이블의 공식 의제로 올린 것이 현재까지의 성과다.
협의체는 운영협의체와 실무협의체로 나뉘어 ▲조선업 지속 가능한 성장 생태계 구축 ▲청년 조기 입직 및 장기근속 지원 ▲AI 기반 사업장 안전체계 구축 등을 의제로 논의하기로 했다. 실무협의체는 다음 회의 때 노사가 각각 의제를 가져오기로 했고, 단기 과제로 산업안전을 우선 논의하기로 했다. 원·하청 격차 문제는 이 중 “지속 가능한 성장 생태계 구축” 의제의 핵심 사안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협의체 출범 보도들에서는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의될 것인지, 어떤 안건이 상정될 것인지에 대한 세부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협의체가 출범한 것은 2026년 7월이지만, 이후 원·하청 격차 관련 논의가 어떤 진전을 보였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보도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지난 7월 이후 몇 개월이 지났지만, 이런 정도 추상적 의제 설정에 그치고, 언제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질지, 조선업종 노동자들의 절실한 문제를 다룰지에 대해선 기약이 없다. 노조법 2·3조 개정 이후 최대 현안인 원청과 하청 직접 교섭과 같은 첨예한 문제는 피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는 한편으로 협의체가 상설 대화기구로서 장기간에 걸쳐 논의를 진행하는 구조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더라도 언제 성과가 나올지, 구체적인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간의 선례로 볼 때 결국 이번에도 용두사미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결국 한국의 재벌체제 하에서 원하청 문제를 대화로 해결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러한 논의 틀을 통한 해결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노조법 2·3조 개정과 시행령이 이미 나온 상황에서 재벌(원청)들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변화되는 것이 감지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재벌들은 전혀 이 문제에서 한 치도 양보할 조짐이 없다. 정부 또한 이러한 재벌들에게 손을 놓고 있는 상태이며, 한발 더 나아가 노동부는 ‘복수노조 대표성’ 문제에 있어서 오히려 노동자 측에 불리한 행정지침까지 내렸다. 그렇기에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이 며칠 전 다시금 고공농성을 시작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렇듯 현장의 치열한 투쟁과 밑으로부터의 요구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완고한 재벌들이, 아무런 실권도 없는 노사정 협의체에서 순순히 양보안을 내놓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참고로, 조선업 원·하청 문제는 이번이 처음 논의되는 것이 아니다. 2022년 11월에도 ‘조선업 상생협의체’가 발족되어 2023년 2월 ‘조선업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 협약’을 체결한 바 있지만, 당시에도 임금체불 방지를 위한 에스크로 제도 도입, 공동근로복지기금 확대 등 약간의 생색내는 정도에 그쳤으며, 현재의 원·하청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3. 금융 산별 교섭의 ‘성과’는 일반화할 수 없다
물론, 금융 부문에서는 얼마간의 근로조건 개선 성과가 나왔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과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는 얼마 전 9월 28일 산별 중앙교섭을 잠정 타결했다. 지난 4월 교섭 시작 후 5개월 만이다. 구체적 합의 내용은 ▲은행 영업시간 30분 단축(내년 4월부터 개점 시간을 현행 오전 9시에서 오전 9시 30분으로 조정) ▲총액 임금 3% 인상 ▲자율출근제 신설 ▲금요일 라스트콜 제도 및 보상휴가안 ▲배우자 출산휴가 확대, 미스터리 쇼핑 경영평가 제외 등이다.
그러나 이번 합의는 금융노조가 총파업과 철야농성을 진행한 끝에 이끌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금융노조는 당초 9월 30일 2차 총파업을 예고했으나 잠정 합의로 철회했다. 즉 투쟁이 전제되지 않는 교섭이란 무력하고 무의미하다는 평범한 원칙에서 별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금융업종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들의 대우가 상대적으로 높고, 또한 여기서는 원·하청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와 같은 재벌체제의 근원적인 문제가 별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금융 산별 교섭의 성과를 조선업이나 다른 제조 업종에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결론: '산별 참여 보장'은 참여의 외양에 그칠 위험
정리하자면, ‘산별 참여 보장’은 총연맹 중심의 경사노위 구조를 산별·업종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요구다. 이 요구가 관철될 경우 업종 단위의 교섭 의제를 다룰 통로가 생긴다는 점에서는 노동계에 일정 부분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경사노위 자체가 정부 및 사용자와의 ‘합의’를 전제로 운영되는 기구인 이상, 산별 참여만으로 노동자의 교섭력이 자동으로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조선업 노사정 협의체 사례가 보여주듯, 산별 참여가 제도적 틀로 자리 잡더라도 구체적인 합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한가한 ‘대화 창구’에 그칠 따름이다. 금융 산별 교섭의 성과 역시 총파업이라는 강력한 투쟁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결과이며, 원·하청 이중구조가 핵심 문제로 얽혀 있는 여타 산업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결국 ‘산별 참여 보장’은 경사노위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돌파하는 요구가 아니다. 이는 총연맹 중심의 구조를 산별 중심 구조로 바꾸는 형식적 재편에 불과하며, 정부와 자본의 합의를 전제로 작동하는 경사노위라는 틀 안에서 노동자의 실질적 교섭력이 저절로 강화되기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문제의 본질은 확실하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는 강력한 투쟁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엄혹한 노동 현실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당장 정부가 연말까지 이른바 ‘메가특구특별법’ 통과를 공언한 상황에서, 노동계에 시급한 과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현장의 투쟁 동력을 조직하는 일이다.
민주노총은 지금 1996~1997년 '노개투(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투쟁)' 시절처럼 구속을 각오한 지도부의 단호한 투쟁 결의를 보여주어야 한다. 위원장과 간부들이 즉시 현장 순회에 나서고, 조합원 교육과 대국민 선전전을 준비하더라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양경수 집행부는 ‘경사노위 조건부 참여안’을 제출한 채 실효성 없는 내부 논쟁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는 투쟁 동력을 분산시키려는 자본과 정권의 노림수에 스스로 말려드는 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본과 정권은 이미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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