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길성 (노동운동가)
등록일 : 202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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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들어가며: 전임자 임금도 못 주는 노조

 

얼마 전 한국 대공장 노조의 대표주자인 기아자동차 노조가 전임자(간부) 임금 28억 원을 지급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만 5천여 명 조합원을 거느린 거대 노조가 자체 간부 급여조차 감당하지 못하게 된 이 상황은, 단순한 재정 위기를 넘어 한국 대공장 정규직 노조운동이 처한 구조적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조합비 인하와 정년퇴직으로 인한 조합원 감소의 결합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변혁적 지향을 상실한 채 내부 집행권력 장악에만 골몰하는 현장조직들의 타락, 노동자 대단결 원칙을 망각한 채 대공장 이기주의에 안주하는 조합원 의식, 그리고 다가오는 산업 대전환에 대한 무대응이라는 더 깊은 병폐가 자리하고 있다.

 

1. 사태의 경위: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나?

 

ㅡ 조합비 인하와 조합원 감소의 악순환
기아차 노조는 조합비 요율을 기존 1.2%에서 1.0%로 인하했다. 그 결과 노조 전임자 급여 전용 재원인 '조합비2' 계좌가 고갈되었고, 28대 집행부 간부들의 2025년 12월 성과급과 연·월차 수당 약 14억 원이 미지급되었다. 현 29대 집행부 역시 2026년 2월 설 상여금부터 지급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며, 총 미지급액은 28억 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그렇다면 조합비 인하는 어떻게 결정되었나? 보도에 입각해 필자가 추측컨대, 현장조직들이 선거를 위한 '선심성 공약'으로 조합비 인하를 내걸었고, 이것이 실제로 관철된 결과이다. 조합원 감소 추세를 냉정하게 분석하지 못한 채, 집행권력 장악을 위한 인기영합주의적 공약 경쟁에 몰두한 결과인 것이다. 어느덧 노동조합도 기존 제도정치권의 작태를 흉내 내는 지경에 이른 듯하여 입맛을 씁쓸하게 한다.

 

여기에 구조적인 조합원 감소가 겹쳤다. 기아차는 매년 정년퇴직자가 약 1000 여명씩 발생하지만 신규 채용은 연 300~500명 수준에 그친다. 정년을 넘긴 직원은 촉탁직 계약을 통해 62세까지 근무할 수 있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노조 가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재직 조합원들의 반대' 때문이라고 한다.

 

ㅡ 자구책이라는 이름의 미봉책
노조는 현재 85명인 무급 전임자를 75명으로 10명 감축하고, 선출직 임원 임금을 월 400만 원으로 결정했다. 또한 상급단체인 금속노조에 올리는 분담금 비율을 조정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구책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노조 내부에서 "결국 회사로부터 더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뜻 아니냐"는 태도가 나온다는 점이다. 얼핏 회사를 상대로 한 투쟁이 거세질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는 것 같지만, 그간의 관행으로 볼 때 이는 투쟁을 통한 '쟁취'가 아니라 밀실 타협과 사측에 대한 굴종의 방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노조의 사측 의존도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자아내게 하는 대목이다.

 

2.  변혁성을 상실한 대공장 노동운동

 

ㅡ 선거를 위한 조합비 인하: 인기영합주의의 극치
조합비 인하를 선거 공약으로 내건 현장조직들의 행태는 현 대공장 정규직 노동운동이 얼마나 변혁적 성격을 상실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노동조합의 재정은 투쟁의 물적 토대이자, 조직의 독립성을 담보하는 생명줄이다. 그런데 집행권력 장악을 위해 이 생명줄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이다.

 

조합원 감소 추세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고령화와 신규 채용 감소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장조직들은 이러한 객관적 조건을 외면한 채, 단기적 인기에 영합하는 공약을 남발했다. 이는 제도정치권에서 재정 건전성을 무시한 채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대공장 노조가 더 이상 자본과 투쟁하는 변혁적 조직이 아닌, 내부 집행권력을 둘러싼 파벌 투쟁의 장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어떻게 하면 조합원의 계급의식을 고양하고 투쟁력을 강화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음 선거에서 이길 것인가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ㅡ 현대기아차 재벌의 '연성 구조조정'에 대한 무대응
이러한 현장조직들의 생태 속에서, 근본적 원인인 현대기아차 재벌의 '연성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의 결의가 나올 수 있겠는가? 매년 1000 여명의 정년퇴직자가 발생하는데 신규 채용은 300~500명에 그친다는 것은, 회사가 인력 감축을 정년퇴직이라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명백한 구조조정이다!

 

그러나 기아차 노조는 이에 대해 제대로 된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조합비 인하 경쟁이나 벌이면서 자체 재정을 고갈시키는 실정이다. 앞으로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 등 자동차산업의 대전환기를 맞이하면 이러한 구조조정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조합비를 내지 않는' 로봇이 늘어나고, 신규 채용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공장 노동운동의 곤란은 더해질 수밖에 없다.

 

3.  노동자 대단결 원칙을 망각한 ‘자업자득’의 결과

 

이번 사태에서 가장 씁쓸한 대목은 정년퇴직자에 대해서 노조 가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보도에 따르면 그 이유는 '재직 조합원들의 반대' 때문이라고 한다. 조합원 수가 구조적으로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정년을 넘긴 동료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을 막는다는 것은 스스로 조직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여기에 이르러서 필자는 '자업자득!'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조합원 감소로 재정난에 허덕이면서도, 정작 조합원을 늘릴 수 있는 가장 명백한 방법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다. 이는 노동조합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노동자 대단결' 정신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행위다.

 

실상은 일반 조합원의 반대보다도 현장조직들의 당파적 이해가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년퇴직자들이 노조에 가입하면 기존 현장조직들의 세력 판도가 바뀔 수 있고,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퇴직자의 조합원 가입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측의 눈치도 봐야 한다. 따라서 현장조직들은 자신들의 집행권력 유지를 위해 정년퇴직자 가입을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연대보다 파벌 이익을 우선시하는 천박한 계산이다.

 

더 나아가, 이번 사태는 대공장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대기업·정규직 노조 사이에서는 "노란봉투법 등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위한 정책은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만 정년 연장이나 주4.5일제 도입처럼 정규직 노조가 혜택을 볼 수 있는 정책은 정부가 한발 빼는 모양새"라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정년연장을 원한다면 이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할 일이다. 현대차 노조는 4만여 명, 기아차 노조는 25,800여 명의 조합원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이 앞장선다면 정년연장은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요구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이를 위해 한 일이 거의 없다.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하청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노조법 2·3조 개정을 줄기차게 요구하며 지난한 투쟁을 해왔다. 따라서 정부가 자신들의 바람을 안 들어주고 비정규직들의 요구만 들어준다고 한탄하는 것은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다. 지금은 볼멘소리 할 때가 아니다.

 

4.  연대와 투쟁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정규직의 이익이다!

 

지금이라도 대공장 정규직 노조는 적극적으로 비정규직과의 연대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정규직 자신들의 이익도 찾을 수 있고, 다가오는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 등 산업 대격변에 대응할 수 있다.

 

자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분할하여 지배한다. 정규직에게는 상대적으로 나은 임금과 고용안정을 주면서 비정규직에 대한 연대를 차단하고, 비정규직을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하면서 정규직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러한 분할 지배 전략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이다.

 

정년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하청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 이것이 대공장 노조가 살아남는 길이다. 조합원 수를 늘리고, 투쟁력을 강화하며, 산업 전체의 노동조건을 향상시켜야 정규직 자신들의 조건도 지킬 수 있다.

 

현장조직들이 신노사협조주의 속에 변혁적 정신을 상실해 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일반 조합원 역시 대공장 이기주의에 물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장조직들의 노선 전환이 시급하다.

 

내부 집행권력 장악을 위한 파벌 투쟁을 중단하고, 자본과의 투쟁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선심성 공약 경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조합원의 계급의식을 고양하고 투쟁력을 강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밀실 타협과 사측 의존이 아니라, 대중투쟁을 통한 쟁취의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현대기아차 재벌의 연성 구조조정에 맞서 신규 채용 확대를 요구하고, 정년연장을 쟁취하며,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에 대해서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 없이는 대공장 노조의 미래도 없다.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 등 자동차산업의 대전환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는 대량 실업과 노동조건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대공장 노조는 이에 대한 선제적 대응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기술변화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변화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는 투쟁을 통해 결정할 수 있다. 자동화로 인한 생산성 향상의 과실을 자본이 독점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으로 노동자들이 나눠 가질 것인가? 일자리 감소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신규 채용 확대와 정년연장을 쟁취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세우고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청년 노동자들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대공장 정규직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협소한 노선으로는 산업 대전환을 헤쳐나갈 수 없다.

 

■  나가며: 위기를 전환의 계기로

 

기아차 노조의 재정난은 한국 대공장 노조운동이 처한 총체적 위기의 한 단면이다. 변혁적 지향의 상실, 내부 파벌 투쟁, 노동자 연대 원칙의 망각, 신노사협조주의, 대공장 이기주의 등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병폐들이 재정 위기라는 형태로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대공장 노조가 자신의 노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다. 조합비 인하 경쟁과 같은 인기영합주의를 중단하고, 정년퇴직자와 비정규직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연대를 구축하며, 밀실 타협이 아니라 대중 투쟁을 통해 요구를 쟁취하는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

 

4만, 3만의 조합원을 거느린 현대차·기아차 노조가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투쟁적 조직으로 거듭난다면, 한국 노동운동 전체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막대할 것이다. 반대로 지금처럼 대공장 이기주의와 신노사협조주의에 안주한다면, 산업 대전환의 파고 속에서 대공장 노조 자체가 존립 위기에 처할 것이다.

 

 연대와 투쟁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고립과 쇠퇴의 길로 갈 것인가? 선택은 명확하다. 기아차 노조 재정난은 이 선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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