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ㅡ 한미동맹 재검토를 향하여 (3)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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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아틀라스의 어깨에서 내려올 시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80년간 세계 질서를 지탱해온 ‘미국 세기(American Century)’가 수명을 다하고 있다. 과거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수호자이자 ‘규칙 기반 질서’의 관리자로 규정하며 그 비용을 감당해왔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은 미국의 ‘아틀라스(Atlas)적 역할’이 완전히 끝났음을 선포했다. 2025년 12월 5일 공개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 National Security Strategy)의 핵심 요지다. 사흘 후 공개된 ‘오버매치 브리프’(Overmatch Brief)는 미군이 중국과의 재래식 전쟁에서 반복적으로 패배한다고 인정했다.

 

미국은 더 이상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의 리더가 아니다. 베네수엘라를 침공하고 그린란드 병합을 추구하며 평택 미군기지의 ‘소유권’에 눈독을 들이는 야수다. 이제 그들에게 동맹은 미국의 경제적 결손을 메우고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거래의 대상’이자 ‘비용 전가의 통로’일 뿐이다. 이는 대한민국 외교·안보의 최우선 축이었던 한미동맹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순히 정책의 변화를 넘어선, 국가 존립을 위한 ‘체제 전환’ 수준의 대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절박한 기로에 서 있다.

 

ㅡ 동맹의 질적 변이: 규범에서 수탈로

한미동맹은 현재 단순한 갈등을 넘어 네 가지 차원에서 근본적인 질적 변이를 일으키고 있다.

 

첫째, 규범적 정당성의 완전한 붕괴다. 민주주의, 인권, 국제법이라는 기존의 동맹 정당화 논리는 이제 수사(rhetoric)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동맹의 유일한 잣대는 ‘힘’과 ‘거래 가능성’이다. 이는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가 지배하는 교실의 풍경과 흡사하다. 우정과 의리는 무의미한 덕목이다. 동맹국은 파트너가 아니라 힘 앞에 순응하고 이익을 상납해야 하는 ‘하위 주체’다. 도덕적 권위가 사라진 자리를 약탈적 현실주의가 채우고 있다.

 

둘째, ‘부담 공유’(burden sharing)에서 ‘부담 이전’(burden shifting)으로의 수탈 구조다. 과거의 방위비 분담(SMA)이 안보를 위한 공동 비용 분담이었다면, 현재는 미국의 재정 적자와 산업 공동화를 동맹국에 전가하는 ‘수탈적 구조’다. 방위비 증액과 국방예산 확대 요구는 서막에 불과하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자동차 공장 유치를 강요하고 관세인하를 볼모로 우리 기업의 기술과 이익을 통제한다.

 

이는 안보를 빌미로 동맹국의 경제적 핵심 역량을 빨아들이는 ‘약탈적 경제동맹’의 전형이다. 엄석대의 보호를 받으려면 충분한 ‘상납’이 불가피하다.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의 수출경쟁력은 미국의 정책적 변덕에 따라 언제든 파괴될 수 있는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셋째, 동맹의 등급화와 ‘한반도 패싱’의 일상화다. 미국 외교의 우선순위에서 한반도의 가치는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영토 방어와 서반구 중심의 고립주의로 회귀하고 있으며 한국이 지불해야 할 고정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정작 유사시 미국의 자동 개입이나 확장억제 공약은 거래의 조건에 따라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가변요소가 되었다.

 

미국에 ‘상납’을 늘였음에도 실제적으로 받는 관심과 보호는 약해지는 결과다. 엄석대가 자기 휘하의 ‘꼬붕’들을 그룹화하고 후순위 그룹에 대한 서비스를 소홀히 하고 있는 형국이다. 또 북핵은 방치된다. 북한과의 직거래 가능성이 상시화되면서 한국의 머리 위에서 북한의 핵 보유를 묵인하는 방식의 ‘군축 협상’이 전개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넷째, 인도·태평양 전략도 ‘최소 비용, 최대 억제’라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미국은 중국을 이념과 체제의 적으로 규정해온 과거의 강대국 경쟁 프레임을 포기했다. 베네수엘라 작전을 감행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대만 개입 여부는 중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언급했다. 확실히 과거보다는 아시아에서 한 발 뺀 태도다. 미국은 군사적 핵심 이익만을 선별적으로 방어하는 현실주의적 접근을 취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중 간 거래 가능성은 확대된다. 하지만 동맹국의 이해를 자동적으로 고려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ㅡ 한국이 직면한 3대 구조적 딜레마

미국 우선주의는 한국 외교의 세 가지 전제(미국 리더십의 지속성, 한미 이익의 일치, 국제질서의 안정성)를 파괴하며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첫째, 비용-수익의 반비례 딜레마다.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수록 한국의 국가재정은 파탄 나고 산업경쟁력은 약화된다. 그렇다고 안보의 불확실성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둘째, 자율성-신뢰의 상충 딜레마다. 한국이 생존을 위해 독자적 핵무장이나 제3의 길을 모색할 경우, 미국은 이를 즉각적인 ‘배신’으로 간주하여 보복을 가하려 할 것이다. 셋째, 안보-경제의 분절 딜레마다. 과거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분리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안보와 통상이 완전히 결합된 ‘지경학(Geoeconomics)’의 시대다.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한 축이 무너지는 제로섬 게임에 빠져들었다.

 

NSS에 따라 국무부가 수립한 전략계획(ASP: Agency Strategic Plan)이 1월 15일 공개되었다. 우리와 관계되는 부분만 짧게 정리하자면, 미국은 앞으로 한국이 매년 방위비 100억 달러를 지불하고, 유사시 주한미군이 대만해협으로 출동하도록 협조해야 하며, 대중국 기술을 전면 차단하면서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해야 하고, 대미 무역 흑자를 해소하면서 미국의 재산업화에 전심을 다해 기여하는 국가가 되기를 요구하겠다는 얘기다. 수용하기 어려운 얘기다.

 

ㅡ 대한민국 외교의 대전환: 실전적 5대 제언

이제 한국은 ‘맹목적 숭미’의 최면에서 깨어나야 한다. 미국이 돌아섰다면 우리도 동맹을 재고하는 것이 주권 국가의 마땅한 도리다.

 

첫째, 한미동맹을 성역화된 ‘절대 가치’가 아니라 국익을 위한 ‘상대적 도구’로 재정의해야 한다. 동맹의 유지비용이 그로 인해 얻는 효용을 초과한다면 과감히 동맹의 성격 전환이나 축소, 나아가 파기까지도 검토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미국의 ‘미국 우선주의’에 대항할 우리의 무기는 ‘대한민국 우선주의’뿐이다. 우리는 미국의 ‘머니 머신’이 아니다. 한미 FTA는 폐기해야 하고 미 연방법원의 상호관세 위헌판정이 나오면 한미 관세협상의 결과 역시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 왜 우리는 선택권 없는 동맹의 말단에 머물러야 하는가.

 

둘째, 중국 및 러시아와의 완전한 관계 복원이다. 그러자면 중국에 대해서는 ‘사드 3불’(사드 추가 배치 불허, MD(미사일 방어) 불용,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과 대만해협 유사 시 주한미군 출동 불허 정책을 선언해야 한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상호존중의 원칙을 확인하고 직항로를 조속히 재개한 후 실질 경제협력을 위해 긴밀히 협의해 나아가야 한다. 관계복원은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재개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한반도 문제에서 그들의 역할을 견인하는 자주적 인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셋째, 다극화 질서로의 과감한 편입이다. 변화하는 세계질서에 적응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략 보험’이다.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에 가입해야 한다. 두 기구는 구매력 기준 GDP에서 이미 G7을 앞질렀고 그 격차를 점점 더 벌리고 있다. 브릭스는 전 세계 GDP의 약 40%, SCO가 36%, G7이 29%다. 이 거대한 잠재 시장과 에너지 네트워크에서 고립되는 것이야말로 국가적 자살 행위다. 미국조차 중국과 러시아를 향한 적대적 수사를 줄이며 실리를 탐색하는 판국에 우리가 먼저 ‘미국의 심기’를 걱정하며 행동반경을 제약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넷째, 남북 관계의 주도적 복원과 ‘한반도 운전자론’ 재가동이다. 한반도 문제는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이 중심이 되어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미국이 북한과 직거래를 시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남북 관계의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군사훈련을 축소 내지 중단하고 전작권 회수를 가속화해야 한다. 과거 ‘한미 워킹그룹’처럼 미국의 승인만을 기다리다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한반도의 평화는 미국의 ‘윤허’를 기다릴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쟁취해야 할 영역이다.

 

다섯째, 내부 응집력 강화와 산업 안보 확립이다. 외교적 자율성은 강력한 국력에서 나온다. 국내 정치, 경제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압박이 느껴지는 강도는 외교 문제뿐만 아니라 산업, 기술, 사회 통합 역량과도 직결된다. 중산층 붕괴와 산업공동화에 대한 대응 없이는 대외전략의 자율성도 확보될 수 없다. “모든 정치는 지역정치다.”(All politics is local.) 미국 하원의장을 지낸 팁 오닐의 격언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외교는 국내 정치다. 국민적인 지지가 없는 외교정책은 현실화되기 어려운 것이다.

 

ㅡ 주권 국가 대한민국의 길

미국은 더 이상 ‘언덕 위의 저 집’도 선한 이웃도 아니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동맹을 사지로 몰아넣을 준비가 된 냉혹한 현실주의자로 변모했다. 동맹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오직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이다. 미국이 우리를 버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길을 찾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환상에서 깨어나 냉철한 눈으로 세계를 보라. 한미동맹의 재고는 반미가 아니라 주권 국가로서의 당연한 권리이자 시대적 소명이다. [끝]

 

[저자 소개] 이경렬 (李京烈)

 

대한민국 외교관. 1962년생이며, 1985년 외무고시 19회로 외교부에 입부한 직업 외교관으로 약 33년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외교부 인사로 보건복지부 국제협력관을 역임한 뒤 주앙골라 대사로 발탁된 이력이 있습니다.

 

▶저술 및 활동: 외교관 퇴임 이후 ‘창천(蒼天)’이라는 필명으로 다양한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명품외교의 길>과 <브라보 한미동맹> 등이 있으며, 한국 외교와 한미 관계 등에 대해 비판적이고 독창적인 견해를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 외교부(외무부)의 구조와 관행을 강하게 비판하고, 한미동맹과 외교 방향에 대해 근본적 성찰을 촉구하는 등 전통적 외교 관행에 대한 대체적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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