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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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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령부는 1월 29일 일본 정부와 유엔군지위협정(SUFA)에 따른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합동회의를 개최했다.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다. 조선의 운명이 조선 없이 결정된 사건이다.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한다는 요지였다. 합의 과정에 대한제국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통보조차 받지 못했다. 그 결과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서명되어 조선은 외교권이 박탈되고 1910년의 한일병합으로 직결된다. 이 사건은 국제정치에서 흔히 말하는 “운명 결정의 외주화”다. 단순한 밀약이 아니라 ‘당사자 배제 + 강대국 간 이해 교환’이라는 구조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비슷한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1월 12일 재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과 일본 국방장관이 하와이에서 만났다. 1월 29일 유엔사와 일본 외무성은 합동이사회를 개최했다. 둘은 단발성 사건이 아니다. 미국의 국가안보 전략 문서들이 예고하고 있는 방향성이 실제 제도와 관행으로 구현되는 과정의 일부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정례적 협의” 혹은 “통상적 교류”로 설명될 수 있는 사안이지만 연결해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드러난다.

 

브런슨 사령관과 일본 국방장관의 하와이 회담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이 일본과 할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회동은 사후적으로 알려져 많은 해석을 낳았다. 하와이는 미 인도태평양사령부가 위치한 전략적 중심지이자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전구를 통합적으로 조망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주한미군사령관이자 유엔군사령관이 일본의 방위 수장을 만났다는 사실은 한미연합사, 유엔사, 인태사가 하나의 전략적 연속선상에 놓여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회동사실을 사후적으로 ‘공개’한 것은 한국을 향해 의도적으로 ‘지시등’을 켠 것이다.

 

“한국은 인도태평양 안보의 중심축”이라는 최근 브런슨의 거듭된 언급과 일본이 방위정책 문서에서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는 ‘지역 안보에 대한 적극적 역할 확대’는 이 회동이 큰 전략적 맥락 속에 있다는 방증이다. 특히 일본 입장에서 유엔사는 헌법적 제약과 과거사 문제라는 정치적 부담을 덜고 지역 안보에 개입할 수 있는 유용한 통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은 1월 29일 개최된 유엔사와 일본 외무성 합동이사회에서 보다 명확해진다. 공식적으로 이 회의는 유엔군 지위협정에 근거한 행정·운영 협의체다. 그러나 합동이사회가 다루는 사안은 단순 행정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 내 유엔군 기지와 시설의 사용, 병력과 장비의 이동, 항공·항만 접근권한 등은 평시에는 관리 문제지만 유사시에는 작전 문제다. 즉, 합동이사회는 일본이 한반도 및 동북아 유사시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제도적으로 정리하는 장치다.

 

두 회의의 연결성은 분명하다. 하와이 회담이 정책 방향과 신뢰를 확인하는 비공식 고위급 조율이었다면, 합동이사회는 그 방향을 법적·제도적으로 고정시키는 공식 절차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한국은 유엔사가 작전을 수행하는 주된 공간이자 그 결과를 가장 직접적으로 감당해야 할 당사국임에도 말이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과 국방전략(NDS)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 수년간 미국의 NSS와 NDS는 일관되게 “중국을 유일한 체계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인도태평양을 전략의 중심 무대로 설정해 왔다.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개념은 ‘통합 억제’(integrated deterrence)다. 단일 동맹이나 단일 전구에 국한된 억제가 아니라 동맹국과 파트너국을 네트워크화해 다층적으로 억제력을 행사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전략에서 일본은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미일동맹은 이미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추다. 일본은 방위비 증액, 반격 능력 보유, 작전 범위 확대 등을 통해 그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문제는 이 ‘통합 억제’ 구상 속에서 한미동맹 역시 자연스럽게 ‘확장된 전구 전략’의 일부로 흡수되고 있다는 점이다. NSS와 NDS는 주한미군의 임무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 “동맹 전력의 유연한 운용”과 “지역 전반에 걸친 대응 능력 강화”를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대만해협 문제는 우연히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주한미군은 동북아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고, 일본의 기지와 결합될 경우 대만해협·동중국해·한반도를 하나의 작전 공간으로 묶는 것이 가능해진다. 유엔사라는 국제적 외피는 이러한 작전 연계를 정치적으로 완충하는 역할을 맡는다. 즉, “한미일 군사동맹”이라는 표현 대신 “유엔군의 임무 수행”이라는 틀로 민감한 정치적 쟁점을 희석하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과 ACSA(상호군수지원협정)나 RAA(원활화협정) 체결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ACSA는 군수·보급·수송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RAA는 병력과 장비의 상호 이동과 법적 지위를 정리해 준다. 이러한 협정이 체결될 경우 한미일 간 군사협력은 위기 시에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로 진입한다. 미국이 지향하는 ‘통합 억제’의 완성형이다. 1월 30일 요코스카에서 개최된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일본은 한미일 3국 간 협력강화에 역점을 두면서 ACSA 체결을 강하게 요구했다. 요코스카는 유엔사 지정 해군기지다.

 

1월 28일 한국 공군 블랙이글스 비행팀이 사우디아라비아 방산박람회로 가던 중 일본 나하 기지에 기항해 급유를 받았다. 단순한 기술적 경유가 아니다. 일측은 “일한 방위협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일한 군사 교류를 매개로 미일한 3국 군사협력이 ‘원 씨어터(one theater)’ 작전 체계로 연결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일의 군사동맹에 한국이 그 하급체계로 묶이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한국이 어디까지 동의했고, 어디까지 인지하고 있으며,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지 여하다. 브런슨 사령관과 일본 국방장관의 회담, 유엔사-일본 합동이사회, 미일 간의 전략 문서와 협의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국회와 정부가 그 전체 그림을 공유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2년 반 전 윤석열이 캠프데이비드에서 무조건 미국과 일본에 이면합의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그림을 이재명 대통령이 충분히 인지하고 외교·안보 전략을 짜고 있는 것일까. 한국의 주권과 전략적 자율성에 직결된 사안이다.

 

2023년 8월 18일 한·미·일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가 있었고, 결과로 나온 캠프데이비드 ‘원칙’과 ‘정신’이라는 문서가 있다. 두 가지가 핵심이었다. 하나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간 전략적 공조를 심화해 3국 안보협력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선언이었다. 또 하나는 법치와 국제규범 존중, 자유롭고 열린 국제질서 지지를 위한 공조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후자를 완벽하게 파기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캠프데이비드 원칙과 정신은 무효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미국은 3국 전략공조는 엄연히 살아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3국 안보협력의 흐름은 한중관계에도 중차대한 영향을 미친다. 중국은 이미 한미일 군사협력의 제도화를 자국을 겨냥한 봉쇄 전략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과의 군사 협정을 확대하고 주한미군이 대만해협 유사시 역할을 맡는 구조가 굳어질수록 중국은 한국을 ‘적대적 진영의 일원’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는 한국외교의 선택지를 좁히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국의 대처 방향은 셋이다. 첫째, 한미일 협력의 범위와 조건, 통제장치를 명확히 해야 한다. 특히 유엔사와 관련된 협의에서 한국의 참여와 발언권을 확보해야 한다. 둘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의 명확한 반대 입장을 설정해야 한다. 최소한 대만해협과 같은 사안에 있어 자동 개입이 아니라 사전 협의와 정치적 결정이 필수적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셋째, 한중관계의 완전한 복원을 통해 한국의 안보 선택이 중국을 겨냥한 적대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은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한·미·일 정상회의와 미국의 NSS, NDS에 이미 설계도가 제시돼 있었다. 그리고 그 설계도가 현재 유엔사, 일본, 주한미군이라는 구체적 장치를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숭미와 숭일을 정책기조로 삼고 미국이 원하는 대로 뭣도 모르고 움직인 전 내란정권을 탓하고 있을 수만도 없다.

 

요는 앞으로 우리가 우리 운명을 결정지을 판단을 내릴 주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설계된 구조에 편입되는 객체가 될 것인지 여부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미루면 미룰수록 한국의 선택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신 차려야 한다.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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