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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가 아닌 현실이 기준이다" — 전 세계 긱 워커 보호의 새 국제 기준, 한국은 어디쯤 서 있나?
1. 협약 전문 주요 조항별 핵심 내용
ILO 《플랫폼 경제 체면 노동 협약》(CNP/D.4, 2026년 6월 11일 최종 문안)은 총 10개 장으로 구성된다. 각 장은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고 회원국과 플랫폼 기업에 구체적인 의무를 부과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I장 · 정의 (제1조) — "누가 적용 대상인가"
협약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핵심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었다. '디지털 노무 플랫폼'이란 자동화 의사결정 시스템을 통해 보수를 받는 노무를 조직·중개하는 법인 또는 자연인을 가리킨다. '디지털 플랫폼 종사자'는 고용 지위 분류에 관계없이 플랫폼을 통해 보수를 받고 노무를 제공하는 모든 사람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고용 지위 분류에 관계없이"라는 문구가 핵심이다. 기업이 종사자를 독립계약자로 분류하더라도 협약의 보호 대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플랫폼과 종사자 사이의 계약 관계 또는 하도급 체인에 있는 '중개인(intermediary)'도 별도로 정의하여 책임 회피의 우회로를 차단했다.
II장 · 적용 범위 (제2조) — "예외 없는 보편 적용"
협약의 적용 범위는 의도적으로 넓게 설정되었다. 모든 디지털 노무 플랫폼과 공식·비공식 경제 영역의 모든 종사자가 적용 대상이다. 다만 사용자·근로자 대표 단체와 협의를 거친 경우에 한해 일부 범주를 일시적으로 제외할 수 있는 유연성을 두었다. 그러나 이 예외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단계적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해야 하는 의무가 함께 부과된다. 사실상 어떤 플랫폼도 협약의 적용에서 영구히 벗어날 수 없도록 설계된 셈이다.
III장 · 기본 원칙 및 권리 (제3조) — "ILO 5대 핵심 원칙 전면 적용"
이 장은 플랫폼 종사자에게 ILO 핵심 협약의 5대 원칙을 명시적으로 보장한다. 결사의 자유 및 단체교섭권, 강제노동 철폐, 아동노동 철폐, 고용·직업상 차별 금지, 그리고 안전하고 건강한 근무 환경이 그것이다. 이는 플랫폼 종사자가 전통적 근로자와 동일한 수준의 기본권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국제 규범으로 못 박은 것이다.
IV장 · 산업안전보건 (제4~5조)
회원국은 플랫폼 종사자의 직업성 사고와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히 주목할 조항은 종사자의 업무 중단권이다. 생명이나 건강에 임박한 위험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종사자는 어떠한 불이익도 받지 않고 업무를 중단할 수 있다. 배달 라이더가 폭우나 폭설 속에서도 배달을 강행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 조항의 실질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V장 · 폭력·괴롭힘 (제6조)
협약은 온라인 폭력은 물론 고객·의뢰인 등 제3자에 의한 폭력과 괴롭힘으로부터 모든 종사자를 보호하도록 규정한다. 중요한 것은 이 보호 의무의 주체가 플랫폼 기업이라는 점이다. 종사자가 고객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플랫폼이 이를 방치하거나 오히려 종사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관행이 국제 규범 위반이 된다.
VI장 · 양질의 노동 촉진 (제7~8조)
단순한 보호를 넘어 적극적인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장이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경력·기술 개발 촉진이 회원국의 의무로 명시되며, 자영업자 등록을 포함한 노동의 공식화(formalization) 촉진도 포함된다. 비공식 경제 영역에 머물러 있는 플랫폼 종사자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취지다.
⭐ VII장 · 고용 지위 분류 (제9조) — 협약의 심장부
협약 전체에서 가장 파급력이 큰 조항이다. 플랫폼 종사자의 고용 관계 존재 여부는 계약서에 적힌 형식이 아니라 실제 노무 제공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한다. 이른바 '오분류(misclassification)' 방지가 이 조항의 핵심 목적이다. 플랫폼 기업이 종사자를 독립계약자로 계약서에 명시하더라도, 실질적인 지휘·감독 관계가 존재한다면 고용관계로 인정해야 한다. 우버·도어대시 등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이 이 조항에 가장 강하게 반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VIII장 · 보수 (제10~11조)
보수는 전액, 적시에, 합법적 수단으로 지급되어야 한다. 고용관계에 있는 종사자에게는 법정·협약 최저임금 이상의 보수가 보장되며, 업무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도 플랫폼이 보상해야 한다. 비고용관계 종사자에 대해서도 최저 보수 적용 여부를 검토할 의무가 부과된다. 아울러 플랫폼은 보수 산정 방식과 각종 공제 내역을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사전에 고지해야 한다. 종사자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 알 권리를 보장한 것이다.
⭐ IX장 · 사회보장 (제12조)
긱 이코노미 종사자들이 가장 오랫동안 배제되어 온 영역이 바로 사회보장이다. 협약은 동일한 고용 지위의 다른 근로자와 동등한 수준의 사회보장 보호를 플랫폼 종사자에게도 보장하도록 요구한다. 연금·실업보험·산재보험 등 그동안 사각지대로 남아 있던 영역을 해소하는 것이 비준 국가의 의무가 된다. 이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법적 구속력을 가진 요구사항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ILO 권고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 X장 · 자동화 시스템의 영향 (제13조~)
디지털 플랫폼 노동의 가장 독특한 특성인 알고리즘 지배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장이다. 플랫폼은 배차·평가·페널티 등 자동화 의사결정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종사자에게 고지해야 한다. 알고리즘에 의한 일방적 계약 해지도 제한된다. 종사자가 왜 배차에서 밀리는지, 왜 계정이 정지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불투명한 구조에 처음으로 국제 규범이 개입하는 것이다.
2. 한국 현행법 vs. ILO 협약 비교
한국은 2022년 「플랫폼 종사자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며 플랫폼 노동 보호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ILO 협약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여전히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한국은 산재보험·고용보험·보수 고지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제도적 기반을 갖추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고용 지위 분류·최저 보수 보장·알고리즘 투명성 세 영역은 현행법과 ILO 협약 사이의 간극이 가장 크며, 협약 비준을 위한 선결 과제로 꼽힌다.
3. 한국 배달 라이더·기사에게 미칠 영향
한국은 ILO 회원국으로서 협약 비준 의무는 없다. 그러나 비준을 선택할 경우 현행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의 대폭 강화가 불가피하며, 그 파급 영향은 수십만 명의 배달 라이더와 차량 호출 기사에게 직접 미친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고용 지위 재분류에서 비롯된다. 현재 쿠팡이츠·배달의민족 라이더 대부분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로 분류되어 근로기준법의 적용 밖에 놓여 있다. 협약 제9조가 적용되면 계약서의 형식이 아니라 실제 지휘·감독 관계를 기준으로 고용 관계를 판단하게 되므로, 사실상 근로자 지위 인정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 이는 단순한 법적 지위의 변화가 아니라 이후 모든 보호 조항의 적용 여부를 결정하는 출발점이 된다.
고용 지위가 재분류되면 최저 보수 보장 문제가 곧바로 뒤따른다. 현재 배달 라이더는 건당 수수료 구조로 운영되어 실질 시급이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협약 제10조는 고용관계 종사자에게 법정 최저임금 이상의 보수를 보장하도록 규정하므로, 플랫폼 기업들의 수수료 산정 구조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해진다.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도 중요한 변화 영역이다. 한국의 특고 종사자는 2022년 전속성 요건 폐지 이후 산재보험 적용이 개선되었고, 2021년부터 고용보험도 단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여전히 사각지대가 넓다. 협약 제12조는 동일한 고용 지위의 다른 근로자와 동등한 수준의 사회보장을 요구하므로, 국민연금 편입 문제가 정책 의제로 본격 부상할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 라이더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할 변화는 알고리즘 투명성 확보일 것이다. 협약 제13조는 배차·평가·페널티 등 자동화 의사결정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종사자에게 고지하도록 의무화한다. 왜 자신이 배차에서 밀리는지, 왜 계정 이용이 제한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불투명한 구조가 처음으로 규범적 제약을 받게 된다. 배달 플랫폼의 불투명한 배차 알고리즘과 일방적 페널티 시스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조항이다.
마지막으로 고객 등 제3자로부터의 보호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협약 제6조는 고객·의뢰인 등 제3자에 의한 폭력과 괴롭힘으로부터 종사자를 보호할 의무를 플랫폼에 부과한다. 현행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은 플랫폼 노동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이 조항의 적용은 라이더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객 갑질 문제에 새로운 법적 대응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ㅡ 종합 시사점
한국의 플랫폼 노동 보호 제도는 2022년 이후 빠르게 발전해 왔지만, ILO 협약이 제시하는 기준과의 격차는 여전히 뚜렷하다. 특히 고용 지위 분류·최저 보수·알고리즘 투명성 세 영역은 현행법의 구조적 한계가 집중된 지점이다. 협약의 법적 구속력이 각국의 비준을 통해 실효성을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플랫폼 노동의 현실을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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