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논평
등록일 :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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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련과 동구권 붕괴 이후 한때 한국 사회에선 거대 담론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제국주의’ 문제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자 이 담론은 점차 부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라는 논쟁이 고개를 들었다. 1980년대 한 때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와 함께 노동해방문학 활동을 주도했던 조정환씨는 “미국을 단일하게 행동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이해하기보다 여러 종속국 혹은 동맹국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제국”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후 중국의 급부상과 함께 ‘G2’란 말에 우리는 더 익숙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개념 또한 두 패권국가 간의 경쟁,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존 패권국가와 잠재적 패권국가 간의 경쟁이란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제국주의’ 담론은 아직 전면적인 부상을 하지 못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제 국내외 진보 진영은 ‘제국주의’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기존 국제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이 세계사적 사건 앞에 적어도 정치세력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입장을 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2. 되돌아보면 제국주의 담론이 부활하는 과정은 자본주의 모순의 전세계적인 심화와 맥을 같이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발을 계기로 그동안 맹위를 떨쳤던 ‘신자유주의’ 신화가 종말을 고했다. 또한 이 무렵 사회주의 중국이 급부상 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수습은 지연되었으며, 축적체계의 재구축 작업은 시간이 갈수록 꼬여 갔다. 


이 같은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반적 위기론’을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현실에서 자본주의 위기와 그 표현형식인 공황은 일찍부터 존재하였지만,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시작된 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부터이다. 

 

“전반적 위기에 질적 규정성을 부여한 것은 10월 혁명, 즉 양대 체제로의 세계분열이었다. 그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조건과 상태를 규정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지구상에서 ‘자본주의와 그것의 흔적을 없애고, 공산주의적 질서의 기초를 도입하는 과정’이 진행된다는 점, 단순히 그것이 존재하고 성장·발전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러한 대립적 체제와 투쟁하면서 자본주의가 자신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연구>제1분책 드라길레프 논쟁, 벼리. p290.)

 

이때부터 자본주의는 그것이 내포한 통상의 위기와는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른 위기가 시작되었다. ‘전반적 위기’가 도래하기까지의 자본주의는, “사멸하고 있으나 아직은 사멸하지 않은” 자본주의였다(위의 책). 그러나 ‘전반적 위기’가 시작된 이후의 자본주의는, 비록 그것이 부분적 일지라도 이미 ‘사멸이 진행된’ 자본주의를 뜻하게 된다. 


예컨대, 대립적인 양대 사회체제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의 세계적 분열은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주요하고도 결정적인 현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향은 단지 사회주의가 확대되고 자본주의가 점점 더 많은 나라를 잃게 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각국으로 분리된 자본주의가 그들의 궁극적인 멸망을 가깝게 하는 ‘폭발물’을 내부와 외부에서 점점 더 대량으로 축적한다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마치 물리학에서 강력한 ‘중력장’의 존재가 시공간을 일그러뜨리듯이(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현실 사회주의의 존재는 자본주의의 일상적 운동을 일그러뜨리고 모든 규칙이 왜곡되게 작동토록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과 서구 진영은 세계자본주의 질서를 재구축하기 위해 가장 위협적 요소인 중국을 반드시 제압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러시아를 먼저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두 강대국이 마치 등을 맞대고 서로를 지켜주듯 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러시아는 그중 상대적으로 약체로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과 그 서구동맹국의 ‘선 러시아 제압’ 전략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번에 우크라이나를 앞세워 러시아를 도발했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대만을 내세운 도발로 중국을 고립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중국의 거침없는 발전 기세를 무디게 만들 수 있고, 결국 제압할 수 있다는 희망을 그들은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과 그 서구동맹국은 큰 오판을 했다. 푸틴이란 결단력을 지닌 지도자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정비한 러시아는 과거 고르바초프와 옐친 시대의 호락호락한 그것이 아니었다. 위협을 감지한 두 호랑이처럼 러시아와 중국 두 초강대국의 ‘연합’은 한층 밀착되었으며, 이 둘의 역량은 미국과 나머지 서구동맹국 모두의 힘을 합쳐도 버거울 만큼 강대했다. 오히려 미국과 나토 진영 자체의 약점만 노정한 채, 이제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는 급속한 붕괴를 목전에 두고 있다.

 

3. 국내외 진보진영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고 있다. 우선 국제공산주의운동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둘로 분열했다. 마치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제2인터내셔널이 입장 차이로 붕괴했던 사건을 연상시킨다.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지난해 개최된 22차 국제 공산당•노동당 대회(IMCWP)는 그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이 대회에는 전세계 60개국에서 온 78개 공산당 및 노동당대표 145명이 참가했다. “단결한 우리는 더 강하다”라는 슬로건과는 달리 국제공산주의 진영은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그리스공산당(KKE)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집단은 러시아의 군사개입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서방 독점 기업들과의 격렬한 경쟁에서, 러시아 독점 기업들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그리스공산당이 주도한 국제성명에 서명한 세력을 기준으로 할 때, 대략 42개 공산당 및 노동당과 30개 청년 공산주의 조직이 그리스공산당과 뜻을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국제성명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본격 군사개입을 개시한 2월 24일 긴급 발표됐다.


하지만 정작 분쟁 당사자들이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공산당들은 대부분 그리스공산당과는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우크라이나공산당(KPU) 서기장인 페트로 시모넨코(Petro Symonenko)는 “이 전쟁은 미제국주의와 나토제국주의자들이 젤렌스키 파시스트 정권을 내세워서 러시아를 포위하고 돈바스 자결권을 부정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하면서 “러시아가 이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대리전에 맞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에 러시아연방공산당은 물론 브라질 공산당, 시리아통합공산당, 카탈로니아 공산당 등이 동조했다. 중국, 북한, 베트남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 대표들은 우크라이나 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평가를 회피했는데, 아마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단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4. 한국의 진보진영 또한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우선 제도권에 진출한 언론 중 다소 진보적 경향을 대변했던 한겨레와 경향신문, 그리고 정의당과 사회진보연대로 대표되는 사민주의세력이 노골적으로 미국과 그 서구동맹 진영의 편에 섰다.

 

변혁진영 내에서도 <노동자연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그룹>, <노동사회과학연구소>(약칭 노사과연) 그룹들은 그리스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을 ‘제국주의 간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양비론을 들고 나왔다. 노동당의 경우는 당 전체의 입장이 아직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21년 통합 당시 새로 합류한 구 변혁당 세력이 노동당 중앙에 포진하면서 이 같은 ‘양비론’을 확산시키고 있다. 


노정협의 백철현 동지가 잘 비판하였듯이, 이들 ‘양비론’은 결과적으로 사실상 미국 단일패권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지금 미국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일 ‘패권국가’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현대제국주의이다. 따라서 그러한 국제질서의 개혁을 요구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또 다른 제국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진보진영의 투쟁 대상을 모호하게 만들고 대응력을 약화시켜 결국 현재의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유지되는데 한몫 거들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 같은 ‘양비론’이 내재한 기회주의성은 진보와 변혁진영의 진정한 단결 역시 촉진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다극화 세계질서에 대한 평가를 놓고 서로 간에 극명한 의견 차이가 생긴 만큼, 이를 경계로 각자는 자기 정체성을 더욱 정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연히 객관적 현실로서의 세계사의 진행은 그중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를 쉽게 판가름 나게 해줄 것이다. 이는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파산선고가 가까워졌음을 뜻한다. 지금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심각한 서로 간의 차이를 애매하게 미봉한 채, 이후 이들 기회주의세력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진리 앞에서 주저함은 사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국제적으로 그리고 한국 진보•변혁진영 내에서 현대제국주의 논쟁은 이제 막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앞으로 이 논쟁은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과학적 규정과 함께, 지금의 미국 단일패권을 대체할 ‘다극체제’ 국제질서의 성격을 둘러싸고 한 단계 심화된 논쟁이 필요하다.
   
   

+1

중러가 미국 일극 신자유주의 제국주의 체제에 균열을 내고자 시도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시각에서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것인지 자국의 독점 자본계급의 이익을 위해서인지는 면밀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레닌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나토-러시아 양자의 혁명적 패전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길입니다.

2023.09.25 00:05:42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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