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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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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풍경

 
민족사업은 스탈린의 본업이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당 안팎에서 잘 알려진 논문을 썼을 뿐만 아니라, 10월 혁명 이후 민족사무인민위원 직을 맡았다. 비록 내전과 외국 무장간섭 기간에 군사업무가 바빠서 이 방면의 사업에는 별로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지만, 내전이 끝난 후 그는 많은 정력과 시간을 민족사무 방면에 바쳤다. 1922년 4월 총서기가 된 후 민족사무위원을 겸했다.

 

스탈린이 민족문제를 다룰 때 대부분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소련) 수립에 착수했을 때 그의 대러시아주의적인 태도는 여러 방면, 특히 그의 고향인 그루지야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 내에서는 법적으로 말하면 병렬적인 소비에트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백러시아), 러시아 연방과 코카서스 지역의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가 있었다.  당시 코카서스의 이 세 소비에트 공화국은 명목상으로 느슨한 코카서스 연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병렬적 공화국은 비록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의 통일적인 정치적 지도를 받았지만, 각자는 자신의 당 조직과 중앙위원회가 있었으며, 정부조직과 기구 면에서도 완비된 편제가 있었다. 즉 소비에트대표대회, 그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그것이다. 러시아 연방은 아제르바이잔(1920년 9월), 우크라이나(1920년 12월), 아르메니아(1920년 12월), 그루지아(1921년 5월), 벨라루스(1921년)와 각각 동맹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기초 위에서 재정, 노동, 교통, 체신, 군사 등 연합 인민위원부와 국민경제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연합인민위원부는 모두 러시아 연방인민위원회 내에 설치되었고, 각 공화국에 전권대표를 파견하였다. 각 공화국은 전권대표를 파견하여 그들이 참가하는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표대회와 그 중앙집행위원회는 연합인민위원부에 대한 감독권을 행사하였다. 러시아 연방은 이러한 동맹조약을 통해서 각 공화국과 정치, 경제, 군사 등 각종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 협력을 보장하였다.

 

1922년에 이르러 단순 조약관계는 이미 많은 폐단을 드러냈다. 각 공화국과 러시아 연방은 러시아 전체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 왕왕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당시 이미 실천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국가 수립을 절실히 요구받았는데, 즉 각 소비에트 공화국을 연합하여 공화국 연방으로 만드는 일이다.

 

각 소비에트공화국을 하나의 전체로 연합하기 위하여 1922년 8월 초, 러시아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조직국에 한 위원회를 설립하여 러시아연방,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각 독립공화국들 간 연합의 원칙과 방안을 연구, 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8월 11일 위원회가 설립을 선포했다. 이 위원회에 참가한 성원은 스탈린, 쿠이비셰프, 오르조니키제, 라코프스키, 소콜리니코프와 여러 민족공화국 대표 즉 S.A. 아가말리-오그레 (아제르바이잔), 야피 미야스니코프 (아르메니아), 포구 므디와니 (그루지야), G. I. 페트로프스키 (우크라이나), Y. G. 체르비아코프(벨라루스) 등이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가 자치공화국으로서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도록 규정한 <러시아 연방과 각 독립공화국의 상호 관계>에 관한 위원회 결의안 초안을 작성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스탈린의 '자치화' 방안이다. 초안은 위원회의 토론을 거치지 않고 휴양 중인 레닌의 의견도 구하지 않은 채 각 공화국 중앙에 배포되어 토론되었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 (위원회 제1서기는 오르조니키제)가 동의를 표시한 외에 기타 공화국의 당 중앙은 모두 다른 의견을 제기했다.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9월 15일 회의에서 회의에 참석한 오르조니키제 (당시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와 북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 제1서기)와 키로프 (당시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 위원)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은 경제력 강화를 위한 연합과 총 정책의 통일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독립의 모든 특징을 보존해야 한다면서 "스탈린 동지의 요강에 따라 제안된 각 독립공화국의 자치형태로 연합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주장하며 다수표로 결정을 통과하는데 격렬하게 반대했다.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각 독립공화국 간의 조약 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은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사실상 초안 자체에 대한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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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초안은 9월 23~24일 러시아공산당 조직국 위원회 회의에서 몇 가지 비실질적인 수정과 보완을 한 후 찬성 8표, 반대 1표, 기권 1표로 통과되었다. 이 결의의 첫 번째 조항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각 소비에트 공화국과 러시아연방 사이에 그들이 정식으로 러시아연방에 가입하는 것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이다.

 

제2조는 러시아연방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인민위원회와 노동국방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각 공화국의 상응한 기구는 반드시 집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6조는 "본 결정이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찬성을 얻으면, 공포하지 않은 채 각 민족 공화국의 당 중앙에 훈령으로 배포한다. 그리고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표대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먼저 상술한 각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혹은 소비에트 대표대회를 통해서 소비에트 절차에 따라 관철하며,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표대회가 열릴 즈음에 다시 이들 공화국의 바램으로 공표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레닌전집  2판 제43권 531-532쪽)

 

위원회가 표결할 때 므디와니(Mdiwani)는 반대표를, 우크라이나의 페트로프스키는 기권표를 던졌다. 페트로프스키는 회의에서 위원회가 통과시킨 결의를 각 공화국 내 각 지방위원회 상임위원회에 회부하여 토론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그의 제안은 부결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위원회의 기록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러시아연방과의 상호관계 문제를 토론한 적이 없다고 명기할 것을 요구했다.

 

9월 25일, 위원회의 자료 (스탈린이 작성한 초안, 위원회의 결의와 회의록,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의 포함) 는 고르크에서 요양 중인 레닌에게 보내졌다. 아울러 중앙서기처는 위원회의 결의를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들에게 배포했다.


레닌은 위원회의 자료를 읽은 후 9월 26일 스탈린을 고르크에 불러 소비에트공화국연방을 설립하는 문제에 대해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닌은 자신의 견해를 상세히 설명했다. 스탈린은 약간의 양보에 동의했으며, 레닌이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결의안을 정치국에 제출할 것에 동의했다.

 

같은 날 레닌은 카메네프와 정치국 위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레닌은 "내가 보기에 문제는 극히 중요하다. 스탈린은 좀 성급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레닌은 스탈린의 '자치화' 방안에 대해 중대한 원칙적인 수정 의견을 제시했다. 즉 '러시아연방 가입'을 '러시아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공화국과 함께 유럽과 아시아 소비에트공화국 연방을 정식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였다. 레닌은 이는 "우리는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및 기타 공화국과 동등하다고 인정하고 새로운 연합, 새로운 연방에서 그들과 동등하게 합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 구조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 예컨대 러시아연방의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에 추가하여 ‘전연방 중앙집행위원회’도 설립되어야 한다. 기타 각 조항은 어휘 사용에 있어 모두 상응하는 수정을 거쳐야 한다. 레닌은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독립주의자'를 조장하거나 (반대로-주) 그들의 독립성을 취소하지 않은 채 평등한 공화국 연방이라는 새로운 건물을 다시 짓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것들은 모두 초보적 방안이므로, 이후 다시 " '독립 소동 혐의가 있는 그루지아 공산당원' 므디와니 및 기타 동지들과 담화한 후 보충 수정을 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당시 스탈린, 오르조니키제 등은 므디와니 등을 '독립분자'로 몰아붙였는데, 여기서 레닌은 그들을 언급할 때 '독립분자', '독립 소동'에 따옴표(강조)를 붙였다.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월 27일, 레닌은 계획대로 므디와니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닌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스탈린의 '자치화' 방안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므드와니는 이 말을 듣고 고무됐다. 이틀이 지나 레닌은 다시 그루지아공산당 중앙위원 오쿠차바, 둠바제, 친차제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모두 스탈린의 방안에 반대했다. 레닌은 그들에게 " '자치화'가 좋지 않다면 '동맹'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이 몇 명의 중앙위원들은 그루지아가 러시아 연방과 평등하게 동맹에 가입할 수 있다면, 그루지아 공산주의자들도 대중 앞에서 "크게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에 빛이 날 것"이라며 매우 기뻐했다.

 

9월 27일, 스탈린은 레닌에게 답장을 쓰고 동시에 그것을 다른 정치국 위원들에게도 보냈다. 답장에서 그는 레닌의 제1조에 대한 수정 의견에 동의하고, 이렇게 서술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각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이 러시아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공화국과 정식으로 연합하여 유럽과 아시아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되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제2조에 대한 개정 의견에 대해선 "모스크바에 두 개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채택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대략 '하원'이 되고, 다른 하나는 '상원'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충돌과 마찰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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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연방

 

그는 러시아연방 중앙집행위원회를 전 연방의 중앙집행위원회로 바꿀 것을 제안했는데, 그 결의는 연방에 가입한 각 공화국 중앙기관에 대해서 구속력을 갖는다. 레닌의 기타 수정 부분에 대해선 스탈린은 편지에서 레닌이 "시기상조", "쓸데없는" 또는 "순전히 문자적 성격"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레닌이 "너무 조급하다"고 비판하고 "이런 ‘너무 조급한’ 방법은 ‘독립분자를 고무’시켜 레닌 동지의 민족자유주의를 손상시키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스탈린의 전문은  <맑스레닌주의 편역자료> 제13집, 인민출판사 1981년판, 5~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지 않고 레닌의 제안에 따라 위원회의 결의안을 수정했다. 수정된 결의안은 스탈린, 오르조니키제, 미야스니코프, 몰로토프가 서명해 전체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들에게 배포됐다. 그러나 수정된 결의 제1조는 표현에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코카서스 공화국연방과 러시아연방 사이에 '사회주의 소비에트공화국연방'으로 연합하는 동시에 모든 공화국을 위해 '연방'에서 자유롭게 탈퇴할 권리를 보유하는 조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로 변경되었다. 이 수정은 이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0월 6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연방문제에 관해 토론했다. 레닌은 병으로 참석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카메네프에게 "대러시아 쇼비니즘과 사생결단을 선포해야한다"는 메모를 전달하면서, "연방중앙집행위원회에서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루지야인 등이 윤번으로 의장직을 담임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견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체회의는 레닌의 제안에 따라 위원회가 수정한 신결의안을 채택하고, 이를 중앙위원회의 지침으로 삼았다. 스탈린이 이끄는 새 위원회에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의 설립에 관한 법령 초안을 작성하여 소비에트대표대회 토론에 회부토록 위임했다.

 

전체회의 이후 스탈린과 오르제니키제가 이끄는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코카서스 연방을 통해 곧 설립될 소련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세 공화국이 직접 소련에 가입하는 것이 아닌 코카서스 연방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평등한 공화국이 아니라 한 단계 강등된 것과 같다. 이 점은 므드와니를 비롯한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 지도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소련에 직접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르제니키제는 이 요구에 대해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10월 20일,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오르제니키제는 회의에서 "그루지아 당 중앙 상층부는 쇼비니즘(국수주의) 쓰레기이므로 즉각 버려져야 한다"고 질책했다. 전체회의는 그루지아공산당 중앙지도자 오쿠차와, 친차제, 마하라제에게 당내 경고처분을 주고, 오쿠차와의 그루지아공산당 중앙서기와 상임위원회 위원직을 해임키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루지야 공산당의 친차제, 카프타라제, 마하라제 지도자들은 21일 새벽 모스크바에 전화를 걸어 카메네프, 부할린 또는 예누키제 (당시 상임위원회 위원 겸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에게 전화를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예누키제였다. 그들은 그루지야 상황과 오르제니키제의 행동을 보고하고 예누키제는 그것을 메모했다. 메모는 그날 레닌과 스탈린에게 보내졌다. 레닌은 같은 날 친차제와 카프타라제에게 전보를 보냈다. 레닌은 이때 분명 10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이미 '자치화'의 오류를 바로잡았고, 모든 이견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친차제 등이 발송한 직통 전보의 어조가 무례하다"면서 놀라와 했다. 그러면서 “오르드니키제에 대한 욕설을 단호히 규탄한다"면서 "적절하고 예의 바른 말투로 러시아 공산당 중앙서기처에 제출해 충돌을 해결하자"라고 주장했다.

 

10월 21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조직국은 회의를 열고 므디와니, 친차제, 카프타라제, 마하라제를 그루지야에서 전직시키기로 결정했다. 22일 오르조니키제는 그루지야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그루지야공산당 지도자들이 "멘셰비키적 성향"을 갖고 "쇼비니즘(국수주의)"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루지야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대한 ‘불신임’을 표시했다. 같은 날, 그루지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는 즉시 그루지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사직서를 받아들여 베로미나즈가 이끄는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 정부 부문에서도 대량의 간부를 경질했다. 마하라제는 그루지야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직, 카프타라제는 인민위원회 의장직, 친차제는 반혁명위원회 의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오르조니키제가 그루지아에서 이처럼 자신이 감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스탈린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10월 22일, 오르조니키제는 그날 일어난 일을 스탈린에게 전보로 알렸다. 같은 날 스탈린은 오르조니키제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우리는 그루지야의 싸움을 끝내고 그루지야 중앙위원회를 엄하게 처벌할 생각이다. 4명을 소환하는 것 외에 누구를 그루지야에서 빼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내가 보기엔 단호한 노선을 채택해 각종 민족주의 잔재를 중앙위원회에서 모두 제거해야 한다. 레닌의 전보를 받았습니까? 그는 그루지야 민족주의자들에 대해 분노와 극단적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 할만다량의 <레닌과 코카서스연방의 형성 (1921-1923)>, 예레반 1969년판, 353-354쪽.

 

그루지야 문제의 갑작스런 변화는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자들을 상당히 놀라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일부 기존 그루지아공산당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러시아공산당 중앙에 이 문제를 제소하자, 러시아공산당 중앙서기처는 조사위원회를 그루지야에 파견해 조사 처리키로 결정했다. 스탈린은 제르진스키가 이 위원회를 이끌자고 제안했다. 레닌은 예누키제가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참석을 거부했다. 11월 24일, 서기처는 마지막으로 제르진스키 (의장), 미키에비치-캅수카스, 소스노프스키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했다. 표결할 때 레닌은 기권표를 던졌다. 므디와니는 소스노프스키가 이 위원회에 참가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기에 스탈린의 동의를 거쳐 마누일스키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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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오르제니키제, 제르진스키, 칼리닌, 푸룬제

 

제르진스키 위원회 위원들은 11월 28일과 29일 트빌리시에 잇따라 도착해 업무를 시작했다. 조사를 거쳐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와 오르제니키제의 노선과 사업은 완전히 정확하며 러시아공산당 중앙의 지령에 부합되고, 사직한 그루지아공산당 중앙의 입장은 잘못되었다. 위원회는 므디와니의 '민족주의' 노선을 비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월 말 제르진스키 위원회가 트빌리시에서 조사를 벌일 때 리코프 인민위원회 부주석도 그곳에 있었다. 어느 날, 리코프는 오르제니키제의 집에서 그루지아공산당 지도자 카바시저를 만났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오르조니키제가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카바시저는 오르조니키제를 비난하면서 그가 백마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그가 말을 횡령했다는 의미). 오르제니키제는 발끈하면서 카바시저의 뺨을 때렸다. 오르제니키제가 백마 한 필을 소유한 것은 사실인데, 코카서스 산악인들이 그에게 준 것으로 코카서스의 풍습에 따라 그 선물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정부에 상납하여 혁명군사위원회의 마구간에서 사육토록 하였다. 

 

그 후 오르제니키제는 1926년 소련공산당 7월 총회에서 자기비판을 하고, 구타는 "정치적 분쟁 때문이 아니라 나에 대한 개인적 모욕 때문"이라고 말했다. 말에 관한 한 오르제니키제는 틀리지 않았지만, 그의 구타는 매우 나쁜 영향을 미쳤다.

 

12월 12일, 제르진스키 위원회가 조사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레닌은 제르진스키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제르진스키는 레닌에게 조사 상황을 보고하였다. 오르제니키제와 스탈린을 변명키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오르제니키제의 구타에 대해선 가볍게 지나쳤다. 레닌은 제르진스키 위원회의 조사에 만족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레닌은 나중에 "코카서스에 가서 이 '사회민족주의자', '범죄' 사건을 조사한 제르진스키 동지는 이 일에서도 그의 진정한 러시아인적 정서를 두드러지게 표현했을 뿐이다 (러시아화 한 이민족은 진정한 러시아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있어 항상 과격하다는 점을 모두들 알고 있다) 그의 위원회 전체가 편파적이지 않은지 여부는 오르제니키제가 '사람을 때리는 것'에 의해 충분히 설명되었다. 나는 이런 러시아식 손찌검 행위는 어떤 도발이나 모욕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제르진스키 동지가 만회할 수 없는 잘못은 바로 그가 이런 손찌검 행위에 대해 경솔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레닌은 "제르진스키 위원회의 모든 자료에 대해 추가 조사 혹은 새로운 조사를 통해서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안에 포함된 수많은 부정확성과 불공정한 판단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했다.  (레닌전집 2판 43권 351,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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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진스키(1924년)

 

제르진스키가 이끄는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그루지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스탈린이 이끄는 위원회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헌법의 기본 조항 초안 작성에 한창이었다. ‘조문’은 11월 28일 완성되었다. 스탈린은 11월 30일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공화국연방에 관한 보고를 했다. 정치국은 스탈린의 보고를 기초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헌법 기본 조항>을 승인했다. 그런 다음 12월 5일에서 16일 사이에 스탈린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설립에 관한 선언> 초안을 작성했다. 16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스탈린이 주재하는 초안이 통과됐다. 12월 23일부터 27일까지 제10차 전러시아 소비에트대회가 열렸다. 주요 의제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설립에 관한 각 조약체결 소비에트 공화국의 제안"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회의에서 <각 소비에트공화국의 연합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했다. 대회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건립할 데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12월 30일, 러시아연방,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코카서스연방 대표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소련의 정식 설립을 논의하기 위한 제1차 전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했다. 레닌은 병으로 인해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회의 명예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은 회의에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설립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하였다. 회의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설립 선언>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설립 조약> 두 가지 문건을 토론하고 기본적으로 통과하였다. 각 가맹공화국이 심사를 요청하고 각 가맹공화국의 의견을 청취한 후, 마지막으로 전 소비에트 제2차 대표대회에서 선언과 조약을 비준키로 결정했다. 선언은 소련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기존 또는 앞으로 생겨날 모든 소비에트 공화국은 소련에 가입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약은 각 공화국의 소련 가입 수속, 소련의 조직 기구와 각 공화국의 자유로운 소련 탈퇴 권리를 규정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성립을 선언했을 때 레닌은 12월 30일과 31일 <'민족‘ 또는 '자치화' 문제에 관하여>라는 편지를 잇달아 구술했다. 레닌은 편지에서 민족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한 일련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관련자들의 오류를 비판했다.


레닌은 먼저 "나는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매우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잘 알려진 자치 문제에 대해 매우 단호하고 과감하게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주로 레닌이 자신의 병 때문에 이 문제를 토론하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어 레닌은 그루지야 문제에 관한 스탈린, 제르진스키, 오르조니키제의 오류를 비판했다.

 

레닌은 "스탈린의 조급성과 행정적 조치에 대한 선호, 유명한 '사회적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분노가 이 일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서 "스탈린과 제르진스키가 이 진정한 대러시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제르진스키위원회는 조사 때 불공정하며 한쪽을 두둔했다. 그는 "그의 진정한 러시아인의 정서를 표현했을 뿐"이라 했다.

 

"오르조니키제 동지를 처벌함으로써 일벌백계해야 한다." 그는 그루지야에서 사람을 때렸다. 만약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럼 우리가 이미 어떤 수렁에 빠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르조니키제는 코카서스의 나머지 모든 시민에게는 권력이다. 오르조니키제와 제르진스키는 비록 다른 사람에 의해 화가 폭발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가 화를 낼 권리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제해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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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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