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 한미동맹 재검토를 향하여 (2) -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1.26
영화 ',그래비티',(2013년)의 한 장면.png
영화 <그래비티>(2013년)의 한 장면.

 

소설 「궤도」(Orbital)는 2024년 부커상(Booker Prize)을 받은 명작이다. 지상 400km 고도의 우주를 도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근무하는 여섯 명 우주인들의 사유를 추적한다. ISS는 약 51.6°의 경사각을 유지하면서 시속 약 27,000km로 북위 51.6° ~ 남위 51.6° 사이의 지구를 하루에 16바퀴 돈다. 한 바퀴에 90분씩이다. 한 시간 반마다 해가 뜨고 해가 진다. 하루에 열여섯 번 일출과 일몰이 반복되는 것이다. ISS는 하나의 “고정된 원” 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 자전 때문에 매 바퀴마다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하는 동일한 궤도면을 반복한다.

 

궤도는 같지만 “보이는 지구”는 매번 다르다. 지구가 자전하고 있고, 구름, 날씨, 빛, 계절이 끊임없이 변하며, 인간의 시선과 기억 또한 매 순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같은 바퀴를 도는데도 매번 다른 대륙, 다른 바다, 다른 도시의 불빛이 나타나고 그에 따라 우주인들의 생각과 감정도 달라진다. 인간의 삶은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그 안에서 기억, 상실, 사랑, 두려움은 계속 변한다. 문명 역시 같은 행성을 돌며 살지만 결코 같은 순간을 살지 않는다. 저 아래 한반도가 보인다. 한국인 우주인이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실제로 ‘38기 실험대원’(Expedition 38)인 미국의 마이클 홉킨스가 2014년 1월에 촬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이 있다. NASA 공식 채널을 통해 공개되었다. 불야성을 이룬 남한의 도시들과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북한의 대비는 ‘문명과 야만’ 혹은 ‘성공과 실패’의 상징처럼 회자되어 왔다. 미국 정치인들은 이 극명한 대비를 가리키며 자신들이 일구어낸 한국의 번영을 대견해했고, 한국은 이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오만한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우리의 외교관들은 그 시선 앞에서 기꺼이 고개를 조아려 왔다.

 

2013년에 나온 <그래비티>(Gravity)는 지구 표면에서 수직으로 600킬로미터 떨어진 우주에서 벌어지는 얘기다. 주인공 스톤 박사가 수리 작업을 하는 허블 우주 망원경 저 아래 북아메리카 대륙도 보이고 태평양 바다도 보인다. 사건이 발생한다. 허블 망원경은 물론 스톤 박사 팀이 타고 온 우주선까지 파괴해 버린다. 영화는 이제부터다. 스톤은 과연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스톤은 개인 우주유영 장치로 1500킬로미터 떨어진 ISS로 날아가 그곳 우주인들이 남긴 소유즈 선 안에 안착하지만 연료가 바닥난 상태다.

 

소유즈 조종석에서 통신 기기를 조작하던 스톤의 귀에 지구인의 말소리가 잡힌다. 개 짖는 소리도 들리고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아닌강(Aningaaq)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다. 그린란드 피오르드에 사는 이누이트 원주민이다. 둘은 말은 안 통하지만 개와 아기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톤은 중국전용 우주정거장으로 이동해 남겨진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귀환한다. 누구의 우주선이냐가 본질이 아니라 궤도를 벗어나 ‘본래의 자리’로 귀환하는 것이 요지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 무중력에서 중력으로, 부유하는 존재에서 발을 딛고 서는 주체로의 복귀다.

 

한국의 주체성을 고민하는 예술가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한국 우주인 소담 박사의 캡슐이 착수하는 지점은 한반도 연안의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ISS에서 한반도의 야경을 보면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ISS란 단순히 우주정거장이 아니라 냉전 이후 한국이 편입된 안보 궤도, 즉 한미동맹 체제를 상징한다고 느낄 법도 하다. 이제 그 구조가 어떤 요인으로든 붕괴하고 있다면 과감히 궤도를 이탈해야 한다. 동맹으로부터의 이탈은 추락이나 무질서가 아니다. 국가의 본래 자리로 돌아오는 ‘중력의 회복’이다.

 

2014년의 <인터스텔라>(Interstellar)에서 쿠퍼는 지구 시간으로 23년을 우주에서 탐험하던 끝에 중력특이점(gravitational singularity)에 관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블랙홀에 홀연히 뛰어든다. 그곳 블랙홀 테써랙트(tesseract)에서 그는 23년 전 자기와 딸의 이별장면을 바라본다. 어린 딸 머피가 아빠한테 가지 말라고 애원한다. 과학 신동 머피가 “그들”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해독한 결과 아빠는 우주로 떠나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23년 후의 쿠퍼 자신이다.

 

영화 속 쿠퍼는 과거를 바꾸려 애쓰는 대신 이미 성립된 인과 고리를 스스로 완결함으로써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연다. 이는 단순히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과의 중심에 뛰어들어 미래를 다시 쓰는 주체적 결단을 상징한다. 시간의 궤도를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을 깨는 것이다. “한미동맹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도 동맹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논리는 시간의 궤도에 자신을 가두는 사고다. 그 궤도를 따라가지 말고 인과의 중심으로 들어가 미래를 다시 써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한미동맹이 없으면 죽는다’는 집단적 공포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 70여 년간 동맹은 우리 사고의 지평을 규정하는 거대한 중력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패권의 쇠락이다. 동맹이라는 궤도가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동적인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의 손발을 묶는 족쇄가 되고 있다면, 그 궤도를 유지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동맹에 안주하는 것은 전략적 선택이 아니다. 지적인 태만이요 국가적 자립을 포기하는 비겁한 위안일 뿐이다.

 

동맹의 그늘 아래서 누리는 가짜 자유를 자주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자주란 스스로의 힘으로 주변국과 관계를 설정하고 자신의 안보를 스스로 책임지는 고통스러운 결단에서 시작된다. 잠시의 소동은 있을 수 있어도 동맹 파기는 혼란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독자적인 외교적 레버리지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남의 힘에 의지해 서 있는 국가는 바람이 불면 쓰러진다. 그러나 스스로의 중력으로 서 있는 국가는 어떤 풍랑에도 자신의 궤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관성의 함정을 부수어야 한다. 동맹 없는 대한민국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스스로를 노예적 서사에 가두는 행위다. 쿠퍼가 블랙홀 속으로 뛰어들어 인과율을 재구성했듯, 우리도 동맹이라는 익숙한 미래를 연장하는 대신 ‘동맹 없는 자주국가’라는 새로운 인과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희망사항이 아니다. 붕괴하는 기존 질서 속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핵심적이고도 실존적인 결단이다.

 

동맹 파기는 고립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고정 궤도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다. 자주로의 귀환이다. 중력의 회복이며 자기 결정의 회복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은 단순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외주화된 안보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사유된 전략이 필요하다. 동맹이 국가를 대신해 결단해 주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 한미동맹을 파기한다는 것은 미국을 적으로 돌린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더 이상 타국의 궤도를 우리의 운명으로 오인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P.S. “한미동맹의 재검토를 향하여”라는 세 편의 시리즈(첫 편은 1.15)를 시작하며 소설과 영화라는 픽션을 빌려온 이유는 명확하다. 한미동맹이 우리가 믿는 것처럼 깊은 철학적 고찰이나 역사적 필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삶과 잠재력은 ‘한미동맹’이라는 척박하고도 협소한 궤도 안에 갇혀 있기에는 너무나 풍요롭고 광활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제 픽션의 외피를 걷어낼 것이다. 마지막 편(1.30)에서는 한미동맹이 어떻게 우리의 생존과 미래를 가로막는 굴레가 되었는지를 이론적으로 파헤치고, 우리가 당당히 걸어가야 할 ‘자주’의 길을 본격적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함성논평

[함성논평] 정보경찰 부활, 민주당은 더 이상 '민주당'이 아니다

울산함성 편집위원회

2026.02.04

오피니언

[이경렬 칼럼] 자유 이후의 자주: 동맹의 궤도와 국가의 결단

ㅡ 한미동맹 재검토를 향하여 (3)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2026.01.31

오피니언

[이경렬 칼럼] 전략적 유연성 문제, 언제까지 침묵할 것인가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2026.01.29

함성논평

[함성논평] 금속노조 "원청교섭" 요구가 여는 "산별교섭"의 새 지평

2026.01.28

오피니언

‘기아차 노조 재정난’이 드러낸 대공장 노조운동의 현주소

안길성 (노동운동가)

2026.01.27

오피니언

[이경렬 칼럼] 자유 이후의 자주: 동맹의 궤도와 국가의 결단

- 한미동맹 재검토를 향하여 (2) -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2026.01.26

오피니언

[해설] ‘검찰개혁안’ㅡ 개혁의 이름으로 포장된 '후퇴'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2026.01.25

오피니언

세 개의 포럼, 세 개의 질서 … ‘평화’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힘의 정치'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2026.01.23

오피니언

 삼성전자 영업이익 ‘100조 시대’와 헬조선의 비명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2026.01.23

오피니언

미 연방대법원이 멈춘 ‘관세 폭주’, 이제 우리가 청구서를 내밀 차례다

ㅡ 미리 예상하는 상호관세 위헌판결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2026.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