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ㅡ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2.18
산미증식계획에 의한 쌀 공출.png
산미증식계획에 의해 쌀을 공출하는 일제.

 

신동숙은 일제강점하 1930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1910년 8월 29일 월요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강제 병합되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을 지배 수탈하기 위해 최고 통치기구이자 수탈기구로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부 최고 수장으로 조선을 직접 관할하는 총독은 일본 ‘일왕’이 직접 육·해군 대장 중에서 발탁했다. ‘일왕’의 직속으로 다른 기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 조선의 실질적인 통치권자이자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1930년 신동숙이 태어난 당시의 조선 총독은 해군 출신 제5대 사이토 마고토로 1929년 8월부터 1931년 6월까지였다. 사이토는 제3대도(1919.8.12.~1927.12.10.) 역임했다. 

 

사이토는 1919년 3·1혁명 직후 제3대 총독으로 9월 2일 부임하러 남대문 역(1923년 경성역, 1947년 서울역으로 역명 변경)에서 내리다가 강우규(姜宇奎, 1859~1920)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를 받았으나 살아남았다. 당시 66세인 강우규 의사의 나이는 요즈음과 도저히 비교가 불가한 초고령이었다. 강우규 의사는 당시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지린성(吉林省) 지부장이었다. 

 

강우규 의사는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이후, 곁에 있던 아들 강중근에게 뜨거운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강우규 의사의 유언대로 강우규의 폭탄 투척 의거는 청년들에게 충격과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3·1혁명 직후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인 의열단 투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강우규 의사와 서울역 앞에 있는 그의 동상.png.jpg
강우규 의사와 서울역 앞에 있는 그의 동상

 

ㅡ 제3대 총독 사이토의 조선 쌀 수탈을 위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 

 

사이토는 1919년 1차 부임 후 3·1혁명 이후의 후폭풍을 우려하여 종전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 방법을 전환해 식민지 반발을 무력화하려 했다. 사이토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고, 8,000명의 헌병은 그대로 경찰이 흡수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악명높은 특별고등경찰(특고)을 만든다. 

 

‘무단통치’의 상징이었던 관리·교원의 제복을 폐지하고 대신 총독부의 신문발행 허가로 민족진영 동아일보와 친일 진영 몫인 조선일보가 창간된다.

 

당시 사이토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사업은 1920년부터 실시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었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은 총독부 이하 전 통치 조직이 나섰지만, 생산은 계획대로 증대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본의 부족 식량과 일본의 쌀값을 안정화하기 위해 쌀은 계획대로 조선에서 가져갔다. 자연히 쌀 수탈은 더욱 심화하고, 농민은 쌀을 생산하고도 일본에 고스란히 빼앗기게 되어, 정작 쌀이 없어 굶주려야 했다.

 

일제강점기 군산 선양동 말랭이에서 토막집 생활을 한 조선인들.jpg
일제강점기  토막집 생활을 하는 군산의 조선인들

 

김석원 교수는 『일본의 한국경제 침략사』(한길사, 2022)에서 ‘산미증식계획’은 엉터리 시장경제라고 질타했다.

 

“산미증식 계획은 일본의 선전과는 달리 2.7% 증산에 그쳤고, 면화 경작은 처음 시작한 해보다 오히려 줄어들 지경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켜’ 쌀 생산을 장려한 결과는 보잘것없었던 것이다. 

 

모든 개인의 이윤 추구라는 경제의 기본을 지키지 않고 일본 농장주들의 이윤 추구만 우선했던 엉터리 시장경제를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늘어난 생산량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이 일본으로 유출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계속 밥을 굶어가며 쌀을 공급하는 처지였다.” 

 

강준만은 『한국근대사 산책 8권』(인물과사상사, 2008)에서 동아일보를 인용해 당시 농촌과 경성(서울)의 식량 상황을 설명했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8일자에 따르면,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는 빈한한 농촌으로 춘궁을 당하여 초근목피까지 먹어버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뒷산에서 나오는 흰 진흙(백점토)을 파서 거기다 좁쌀 가루를 넣어 떡을 만들어 먹었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2일자에 따르면, 경성 시내에 하루 한 끼만 먹는 극빈자는 1만 7,000여 호에 10만여 명에 달했는데, 이는 경성 시내 전체 조선인의 40퍼센트를 넘는 수였다."

 

일제는 민족성 말살을 위하여 식민지 교육, 그중에 ‘조선사 왜곡’ 작업에 중점을 둔다. 

 

ㅡ 일제의 ‘조선사 왜곡’에 맞선 민족사학자 백암(白巖) 박은식과 단재(丹齋) 신채호

 

백암 박은식 선생.png
백암 박은식 선생

 

일제는 병합 초기부터 대대적인 사료 조사, 고적 조사 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홍문관, 규장각 등에 소장된 수많은 서적을 정리 해체 작업을 했다. 그리고 1915년부터 조선총독부 산하 중추원 주도로 조선사편찬 작업을 한다. 

 

중추원은 본래 고종 때 내각의 자문을 맡은 기관이었다. 그러나 강제 병합 후 일제의 식민 통치 정당화, 친일파 관료 육성·보호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변했다. 특히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이 주요 업무가 되었다. 이 편찬 사업에는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완용이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강제 병합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한다. 

 

그리고 이후 1925년부터는 총독부 직할로 조선사 편수회를 꾸려 ‘조선반도사’ 편찬 사업을 했다. 일제가 기획한 ‘조선반도사’의 목차만 보면 일제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목차 제1편은 원시시대와 한(漢) 영도시대, 제2편은 삼국과 일본의 보호시대, 제3편은 통일 후 신라와 당 복속시대, 제4편은 고려와 원 복속시대, 제5편은 조선과 청 복속 시대, 제6편은 조선 최근세사와 일 보호시대로 되어있다. 

 

일본의 보호와 지배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일제의 의도된 편찬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자주성과 독립성이 없는, 사대와 복종의 민족으로 일제는 만들려고 했다. 일제는 이후 식민사관을 집대성한 ‘조선사’ 35책을 1938년 3월에 완간하여 퍼트렸다. 

 

그러나 조선의 민족사학은 선각자들에 의해 살아있었다.

 

바로 대표적 선각자로 박은식(朴殷植, 1859~1925)과 신채호(申采浩, 1880~1936)였다.

 

백암은 『동명성왕실기』나 『발해태조건국지』 같은 고대사와 항일 민족 영웅 『안중근전』을 저술했다. 박은식은 이미 1914년 저술한 『한국통사』 에서 ‘국혼(國魂)은 살아있다.’라고 말한다.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국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단재는 주로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 외적과 맞서 싸운 영웅들의 평전을 저술했다. 신채호는 1931년 6월 10일부터 103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조선사>의 일부분으로 『조선상고사』를 연재하면서 역사의 정의와 조선역사의 범위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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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ㅡ 식민 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에 맞선 조선 인민들의 노동 투쟁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일본의 화족(華族)제도를 모방해 <조선귀족령>(일본 황실령 제14호)을 공포하면서, 강제 병합과정에 협력하거나 순응한 조선 이씨 왕가와 고위 관료 등 매국에 앞장선 76명에게 귀족 작위를 주었다. 또한, 일제는 작위와 함께 거액의 은사금도 지급했다. 특히 작위와 은사금은 당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상속자에게도 세습되어 매국노들은 대를 이어 특권을 누리며 일본 굴종 반민족 노예 매국을 했다.

 

1931년 새해를 맞아 배하식(拜賀式)에 참석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과 조선귀족들.png
1931년 새해를 맞아 배하식(拜賀式)에 참석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과 조선귀족들

 

총독 사이토는 특히 자치론을 조장하여 조선 귀족 외에 친일파를 육성하면서 민족 분열 책동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 명망가인 이광수와 최린 그리고 최남선을 친일파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또한, 사이토는 ‘문화통치’로 참정론, 자치론, 문화운동론을 내세워 민족운동 진영을 ‘분열’시켰다. 그뿐 아니라 조선의 지주, 자본가들을 포섭하여 친일 조직의 결성을 후원했다. 특히 일제는 병합 전부터 각계의 조선인을 매수해 조선 침략에 이용하고, 병합 후엔 많은 ‘밀정’을 키워 독립운동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반면에 독립운동 세력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고 탄압 고립시켰다.

 

이에 조선 인민은 일제 탄압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민중 해방과 민족해방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노동자는 파업으로, 식민 통치의 심장 조선총독부와 맞섰다. 

 

강준만은 『한국 근대사 산책 7권: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인물과사상사, 2008)에서 일제강점기 1928년의 노동자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의 노동자는 당시 ‘자유노동자’라고 불리던 일용노동자까지 포함하면 1928년 약 113만 6000명에 이르렀다. 이 중에서 공장 노동자는 3만 7247명, 광산노동자는 2만 2670명, 그 밖의 대부분 노동자들은 막벌이꾼 등 각종 일용노동자들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단결의 중심은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은 회보나 벽신문, 강연회, 토론회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고취하고 야유회와 운동회를 통해 단결을 도모(圖謀)했다. 특히 노동조합 건설에는, 무산계급 해방을 부르짖는 공산주의 이론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1927년 노·농이 분리되면서 노동자의 전국적 대표 조직인 조선노동총동맹도 건설됐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철저히 자본의 입장에 서서, 정치적 성격의 쟁의(爭議)와 순수 경제적 성격의 쟁의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총독부는 노조 사무실은 물론이고 노동자들이 모이는 회관이나 야학당(夜學堂) 같은 곳을 집중적으로 감시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주최하는 각종 집회, 강연회 등을 총독부는 금지했다. 또한, 파업할 경우 총독부는 노조 지도부의 해고는 기본이고 가택수색, 체포, 구속, 투옥 등으로 지도부를 와해(瓦解)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 지도부는 총독부의 기계적인 탄압 수순인 가택수색, 체포, 구속, 투옥 등에 굴복하지 않고 투쟁했다. 파업투쟁은 해를 넘길수록 참가인원과 파업 건수는 확대되고, 한 달이 넘는 장기 파업장도 있었다. 1924년 파업 44건에 6,751명이 참가한 파업 인원은 1928년 119건에 1만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특히 파업 과정에서 공장 습격과 같은 전투적 투쟁도 일어났다.

 

ㅡ 일제강점기 사상 최대 규모의 ‘원산총파업’

 

원산항 부두의 전경과 파업규찰대 모습. 동아일보(1929. 01.30) 사진.png
원산항 부두의 전경과 파업규찰대 모습. 동아일보(1929. 01.30) 사진

 

일제강점기 대표적 노동운동으로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2,200여 명이 참여한, 사상 최대 규모의 ‘원산총파업’이 있다. 

 

원산의 문평제유공장은 영국인이 경영하는 석유회사이지만, 지배인을 비롯한 주요 간부는 일본인이었다. 1928년 9월 일본인 감독관의 구타와 민족적 멸시 그리고 차별에 대해 1929년 1월 문평제유 노동자는 사전에 결정한 요구 조건인 ‘악질 감독 파면’ ‘노동조건 개선’ ‘8시간 노동제 실시’ ‘최저임금제 확립’ 등의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했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과의 전면전을 내걸며 ‘원산노련 회원은 쓰지 않는다’, ‘인천, 단둥 등지에서 새로 노동자들을 모집할 것이다’ 등으로 압박했다. 

 

그러나 원산노련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산하 2,200여 명이 총파업으로 맞섰다. 원산두량노조, 해륙노조, 결복노조, 운반노조, 제면조합, 원산중사조합, 양복직공조합, 우차부조합, 인쇄직공조합, 양화직공조합 등이 총파업에 참가했다. 언론도 ‘원산대쟁의’라 부르며 보도했다.

 

일제는 경찰을 이용하여 원산노련 간부를 구속하고 400명의 일본인 재향군인과 청년회 회원 그리고 소방대원들까지 동원했다. 그리고 일제는 함흥보병대 군인 300명을 무장 시가행진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파업은 장기화하면서 전국 각지의 노동단체, 농민단체, 청년단체의 후원이 쇄도했다. 또한, 일본, 소련, 중국, 프랑스 노동단체들의 격려가 있었지만, 1만여 파업노동자들의 가족들은 굶주림에 내몰리게 되었다.

 

앞의 책에서 강준만은 ‘원산총파업’을 90여 일간의 항일투쟁으로 설명했다.

 

“강점기 노동파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1929년 1월에서 4월까지 벌어진 원산총파업이다. 이는 그 규모와 지속성, 그리고 강인성과 투쟁성이란 점에서 식민지 시기 한국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다. 

 

원산총파업은 원산항에서 하물의 하역·운반에 종사하는 부두노동자를 주축으로 조직된 원산노동연합회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1921년 설립된 원산노동회를 원산노동연합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90여 일이나 지속된 원산총파업은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일제하 대표적 민족해방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중략)
파업이 계속되면서 파업노동자 가족 1만여 명의 생계가 어려워져 하루 두 끼로 버텨야만 했다. 이게 널리 알려져 매일같이 수많은 격려 편지와 전보, 성금, 물자가 몰려들었다. 항일투쟁 양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일제는 어용노조를 동원해 노동자들을 분리시키고 이간질하는 수법까지 구사했다. 게다가 일제는 원산노련(원산노동연합회)이 공산당과 관계가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고, 결국 총파업은 4월 6일 노동자 측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원산노련 위원장 김경식은 1929년 2월7일 일경에 의해 수감되었다.png.jpg
파업지도부인 원산노련 위원장 김경식의 수감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 (1929년 2월7일)

 

ㅡ 고공 농성의 시초, 평원고무공장 파업 주도 강주룡 

 

‘원산총파업’ 이후에도 조선 전국 곳곳에서 의미 있는 파업 투쟁이 일어난다.

 

1930년 1월 부산에서 ‘조선방직’ 노동자 2,270여 명이 참가한 파업과 5월 함경남도 신흥군의 ‘장풍 탄광 파업’ 그리고 8월 평양 5개 고무신공장 1,000여 명의 동맹파업이 있었다.

 

특히 평양의 고무신공장 파업은 규모가 1,800여 명까지 불어나자, 공장주들은 신간회 등의 조정으로 타협 분위기가 조성되나, 경찰이 개입하면서 파업은 실패한다. 그리고 공장주들은 이를 계기로 임금 인하를 시도하다가, 이에 맞선 여성 노동자들이 단식 동맹을 맺어 공장을 점령하고 농성에 들어간다.

 

지붕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강주룡.png
지붕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강주룡

 

이때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한 강주룡은 일본 경찰의 탄압에 맞서 높이 12미터에 달하는 을밀대 지붕에 광목을 찢어 만든 줄을 타고 올라가 단식투쟁을 벌였다.

 

당시 강주룡의 <동광> (1931) 인터뷰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일부 내용이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 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임금 감하의 원인이 될 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300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하지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이런 일제 강점하 억압과 경제 수탈의 상황 속에 신동숙은 부친 신윤식과 모친 김태연의 2남 6녀 중 장녀로 경주에서 태어난다.

 

신동숙의 어린 시절 기억이다.

 

“제가 출생은 경주입니다. 내가 어릴 때 기억으로는 아버지가 은행에 계셨어요. 조흥은행 그때는 합동은행,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은행입니다.

 

일곱 살 초창기에 합동은행 직원이신 아버지를 따라 포항으로 이사합니다. 거기서 조선 아이들이 다니는 영일초등학교에 다닙니다, 일본인들은 포항국민학교가 있었어요.

 

저는 적령기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보통 다른 동무들은 두 살, 세 살 많았어요. 머리를 아주 길게 땋은 아이들과 공부했어요. 물론 선생은 일본인입니다.”

 

합동은행은 조선인 자본으로 설립된 대구은행과 경남은행이 1928년 7월에 합병한 지방 보통은행이다. 

 

1927년 일본이 금융공황을 맞아 총독부가 ‘신은행령’을 공포하고 보통은행에 대한 조선은행의 감독을 강화하는 등 대은행 중심 통합정책을 취함에 따라 경상합동은행(합동은행)으로 통합된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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