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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람을 찾아서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2.25
 학교 급식을 받고 있는 어린이들.png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로 받은  밀로 만든 빵 급식을 받고 있는 어린이들.

 

오천 년 역사에서 일제에 맞선 조선의 ‘3·1혁명’과 한국의 ‘4·19혁명’ 그리고 박근혜 탄핵의 ‘촛불혁명’은 전 세계의 인민에게 저항과 투쟁 그리고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이제 또 하나의 세계가 놀랄 역사가 추가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내란수괴 윤석열 탄핵의 ‘빛의 혁명’이다. 

 

윤석열의 위헌 위법한 12·3 비상계엄을 주권자 민(民)의 강력한 저항과 국회의 신속한 조치 속에서 해제되고, ‘내란수괴’는 탄핵을 당하여 그 심판 절차가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일 ‘내란수괴’ 윤석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증인 심문이 10차로 마지막 변론을 끝내고, 25일 최종진술 변론으로 종결한다고 한다.

 

특히 다시는 민(民)이 부여한 군 통수권을 악용해, 용납 못 할 동족 간의 전쟁 범죄를 모의 시행한 ‘내란수괴’ 윤석열을, 헌법재판소는 신속히 파면하여 세계 인민에게 정의와 승리 그리고 희망을 주어야 한다. 

 

ㅡ  조선의 ‘3·1혁명’과 한국의 ‘4·19혁명’이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

 

20세기 밀려오는 외세와 열강의 서세동점(西勢東漸) 침략 전쟁역사에서 1919년 ‘3·1혁명’의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 “조선 독립 만세!”는 일제와 중국 등에 충격을 주었다. 또한, 지역으로 확산한 ‘3·1혁명’은 초기 지도부의 비폭력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전’하면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특히 ‘3·1혁명’은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5.4운동.png
중국의  5·4운동

 

중국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집된 1921년 4월 21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서, 일본이 정령하고 있는 산둥반도 반환을 요구했으나 얻어내지 못한다. 당시 산둥반도는 1897년 독일이 공격해 빼앗은 점령지였는데, 패전국이 된 독일의 점령지를 일본이 승계한 것이다. 

 

이에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들 중심으로 칭다오(靑島) 반환과 산둥 지역 이권 회수 등을 요구하며 항일,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시위를 벌였다.​ 

 

원래 베이징대학은 서울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출세와 고급관료 양성소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3~1940)가 교장이 되면서 천두슈(陳獨秀, 1879~1942)와 후스(胡適, 1891~1962) 등을 초빙하여 동서양의 사상이 자유롭게 논의하는 개혁진보 대학이 된다. 이때 5·4운동을 주도한 베이징대 학생 푸쓰녠(傅斯年)은 ‘3·1혁명’에 대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한 혁명이었다. 그래서 정의의 결정체다”라고 평가했다.

 

마찬가지로 ‘4·19혁명’은 ‘3·1혁명’이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4·19혁명’도 터키와 일본의 학생운동 등에 영향을 미친다. 

 

서울 수유리 4·19묘지의 「4·19 혁명기념관」에 전시된 ‘4·19혁명이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 내용이다.

 

터키(현 튀르키예)
“1950년대 터키의 맨델레스 정권은 공업화 정책이라는 개발독재로 경제파탄을 초래하고 정치·언론 탄압을 일삼았다. 
이에 반발해 1960년 4월 28일 터키의 앙카라,
이스탄불 대학생들은 ”한국 학생을 본받자“며 시위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마침내 맨델레스 철권정치는 막을 내렸다.”

 

일본
“1960년 미·일안보조약 인준 문제가 일부
반발에 부딪히자 일본 자민당 정부는 이를 
변칙적으로 통과시켰다.
일본 대학생들은 ”한국 학생을 본받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고,
경찰과 충돌하여 1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사일구혁명 영향.jpg

 

ㅡ  4월혁명 공간, 날로 늘어 나는 절량농가(絕糧農家) 

 

서울로 올라온 황금수는 자동차 운전수를 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파국을 향한 질주를 보게된다.

 

이미 정치는 부정부패로 썩을 대로 썩었고,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친일파를 등용했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은 정권 연장을 하면서 더욱 독재 체제를 강화한다. 

 

1950년대 중반에는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은 사치였고, 농민의 절반가량이 절량농가였다. 식량이 모자라 농민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했다. 

 

<민족일보> 1961년 3월 29일 자 「날로 늘어가는 절량민」 일부 기사이다.

 

“경북지구(慶北地區)의 현지보고(現地報告)

 

[경북(慶北)에서 본사 김자동(金滋東) 특파원]

 

경북일대에 있어서 절량농가는 못된 전염병과도 같이 나날이 퍼져가고 있다. 경북의 농가 47만호에 농촌인구 약 250만중 3월 중순 현재로 반수가 넘는 약 127만명이 제때 보리밥이나마 먹지 못하고 있다한다.(경북도 집계)

 

도 사회과에서는 6월까지는 150만이상이 양식이 떨어져 굶주림과 싸워야하게 될 것이라고 추산하였다. 재작년의 수해와 풍해가 있은 후 작년의 가뭄은 경북 전역에 걸쳐서 큰 타격을 준 것이다. 

 

어느 해나 보릿고개가 되면 농가의 대부분은 양식이 떨어지는 것이 상례이며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며 연명하는 것이 흔한 일이다. 그러나 지난 겨울부터의 농가 절량상태는 전보다도 훨씬 악화되어 정말 굶어죽는 사람이 생길지경이다.

 

경북도 사회과에서는 도내의 절량농가 구호용으로 오는 6월까지 50만석(石)이상의 곡식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국토건설사업에 20만석정도가 예산되었으며 구호 양곡 2만 4천석과 대여 양곡 1만 9천석 정도를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다 외국 민간단체의 구호양곡 약 2만 6천석과 실업계 등의 모금 및 모곡운동으로 8천여석을 모을 계획이다. 

 

이러한 계획이 제대로 되어도 구호용으로 확보될 수 있는 양곡은 27만여석에 지나지 않아 23만석이 부족한 것이다.”

 

민족일보.jpg
민족일보  1961년 3월 29일 자 기사

 

경제학자 박현채(1934~1995)는 『신동아』 (1973년 3월호) 「쌀의 반세기」에서 쌀의 역사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정의한다.

 

“쌀의 역사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에게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민족사 바로 그것이다.”

 

박현채는 대다수 민중이 농사에 종사했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민족경제에 해악을 끼친 것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오늘날 쌀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어버린 정책 방향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밑받침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 잉여농산물이다. 

 

PL480호에 의해 제공된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원조 자체가 의도하는 미국 농산물 시장의 확대를 위한 선행 투자로서의 무상원조의 제공이 저농산물 가격 정책의 강행을 위한 물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경제가 악화하자 정부는 더욱더 미국의 원조경제에 의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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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배급을 기다리는 아이들

 

ㅡ  미국 원조는 공짜가 아니라. 미국이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통제하는 데 이용했다.

 

미군이 이남에 진주한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은 여러 가지 형태의 원조를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미국 원조는 종류와 시기별로 ▲GARIOA(1945년~1949년) ▲ECA-SEC(1949년~1953년) ▲FOA-ICA(1953년~1961년) ▲PL480(1956년~1970년대까지)로 구분된다.

 

미국 원조는 우선 당장 곤경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지만,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미 군정과 한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점령지 구제 자금인 가리오아(GARIOA) 기금으로 소비재 중심의 구호 원조였다. 이후 한국 정부의 경제 안정을 돕는다는 구실로 ECA&SECS(경제협조처 원조) 원조를 했다.

 

그리고 6·25전쟁 시기와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국의 상호안전보장법에 따라 제공된 ICA(국제협조처 원조)원조로, 미국이 제공한 원조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늘어난 군사비 지출로 인한 한국 정부의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한 준(準)군사적 방위 원조이자 대소(對蘇) 방위 체제 구축을 목적으로 제공한 원조였다.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인 PL480호 원조 판매대금도 주로 군사비로 사용됐다.

 

원조는 차관과 달리 공짜로 제공되지만, 원조의 본질은 대충자금(對充資金)의 사용이다. 대충자금은 미국의 원조 물자를 팔고 받은 돈을 말한다. 대충자금은 한국은행에 예치되었다가 ‘한미합동경제위원회’의 통제를 받아 정부 재정으로 활용된다. 

 

대충자금이 가장 많은 부분이 국방비였다. 

 

미국은 원조를 구실로 한국의 경제정책에 깊숙이 개입했다. 특히 1952년 한국과 유엔군 사이에 맺은 “마이어협정(대한민국과 통합사령부 간의 경제조항에 관한 협정, 미국 측 대표인 마이어의 이름을 따서 ‘마이어협정’이라 부른다)”에 의해 설치된 ‘한미합동경제위원회’는 미국의 대한 원조 업무를 통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마이어협정은 한국 경제 운영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처럼 활동했다.

 

이처럼 미국은 대충자금의 사용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통제했다. 

 

또한, 정부는 원면(原棉) 원맥(原麥) 원당(原糖) 등의 원조 물자를 대기업에 독점적으로 배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신흥 재벌을 탄생시켜 정경유착을 불러왔다. 

 

원조물자와 원조 달러에 기생하여 성장해온 재벌.png
원조물자와 원조 달러에 기생하여 성장해온 재벌

 

미국 원조는 관료들이 국가 권력을 휘둘러 매판자본, 관료 매판자본, 관료독점자본(官僚獨占資本) 등으로 부르면서, 4·19혁명 공간에서 가장 유행한 낱말 ‘매판’을 만든다.

 

‘매판’이란 제국주의에서 벗어났지만, 총독만 없을 뿐 여전히 계속되는 식민주의였다.

 

‘매판’은 원래 청대 말기 중국 용어이다. 당시 영 제국 등의 자본에 굽실대며 그들에게서 받은 연봉과 통화 감정료 등으로, 부와 이권을 챙긴  상인과 관료 등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운 사회계층을 가리키는 낱말로 ‘매판’이란 말을 사용했다.

 

김지하 시인은 1970년 6월 『사상계』에 ‘오적(五賊)’을 발표했는데, 다섯 도둑이라고 칭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매판 세력’이라 풍자했다. 

 

ㅡ 한미경제협정은 미국이 강요하는 편무적(片務的) 불평등조약이다.

 

미국 원조 ‘PL480호’에 의해 미국 잉여농산물이 대량 도입되면서 농산물 가격은 폭락한다. 농민들은 생산 의욕을 잃고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이주하지만, 태반이 실업자가 된다. 

 

그뿐 아니라 ‘PL480호’ 원조로 면화와 밀 농사가 거의 사라지게 된다. 

 

또한 농촌에 대한 비료 공급을 정부가 좌지우지하다 보니 쌀농사는 더욱 어려워진다. 자연히 한국 농업은 멍들고, 남아도는 일손 특히 소녀와 처녀들은 식모라도 하기 위해 도시로 나간다.

 

미국은 원조를 이용해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통제했다. 

 

‘한미경제반대투쟁위원회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의 호소문(1961년 2월) 일부이다.

 

“밝아오는 역사의 여명 속에 전세계 식민지 약소민족들은 저마다 영광스러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여 새로운 역사의 전진을 촉구하는 오늘 우리 조국은 아직도 외세에 의하여 분할 지배되고 있으며 갖은 굴욕과 참극을 강요당하여왔습니다.

 

그러나 조국의 내일을 걸머질 이 땅의 젊은이는 결코 언제까지나 암담한 현실을 좌관할 수 없으며, 민족적 통일독립을 촉구하기 위한 4월의 봉화를 높이 들어 우선 불의와 부정의 앞잡이 이승만 도당을 타도하였습니다.
(중략)
우리는 지금 비준을 서두르는 한미경제협정이 10여 년간의 이승만 통치가 초래한 의존적이며 파국적인 한미경제의 약점을 이용하여 미국이 강요하는 편무적 불평등조약이라는 사실을 엄숙하게 정시하여야 되겠습니다.

 

첫째, 동 협정에 의하면 한국은 미국에 대하여 재정, 예산, 금융통화, 무역외환, 경제계획과 경제개발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정보를 제공하여 미국기관의 감독과 지시를 받도록 규정함으로써 경제적 예속과 내정간섭을 공공연히 강요하고, 

 

둘째, 동 협정은 원조의 명목으로 미국정부가 통고하는 일절의 미국인 또는 기타 외국인은 이를 무조건 접수하고 그들을 치외법권을 누리는 외교사절단과 동일하게 대접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무제한의 조차지를 이 땅 위에 인정하여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유린하고,

 

셋째, 그들 특권적 미국인과 기타 미국인에 대하여 관세·통관세를 비롯하여 수출입세·재산취득세·소득세 등 일절의 조세를 면제케 함으로써 한국을 철저히 시장화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재정 주권을 완전히 침해하고,

 

넷째, 미국이 한국에 대하여 원조물자의 수시적이며 일방적인 중단을 감행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한국정부를 정치적으로 언제나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성문화하여 민족적 치욕을 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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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 받은 밀가루를 들고 나오는 모습

 

ㅡ 한미경제협정 협정은 식민적 불평등조약이다.

 

1961년 2월 8일 한미경제협정이 체결되자, 1960년 11월 1일 서울대 학생들이 발기한 ‘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과 청년조직인 민민청과 통민청 그리고 혁신계는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반대 투쟁을 벌였다. 

 

먼저 1961년 2월 14일 개최된 ‘전국학생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대회’의 미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일부이다.

 

“한미신경제협정 반대투젱을 일으키는 우리는 자주와 독립에의 지향을 가진 긍지있는 민족의 젊은 아들들이다. 우리는 전체의 분노한 민족의 의사를 대표하여 최근 당신들과 우리 정부간에 체결된 예속적 식민지적 불펑등협정에 결연히 반대한다.

 

당신들이 이번 협정을 체결함에 당해 제시한 전조약들은 무엇인가? 한미상호방위조약(54년 12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50년 1월), 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52년 5월) 등은 전시에 일체의 비판적인, 또한 진실한 의견이 봉쇄된 가운데 당신들과 이승만 일당이 체결한 것이다. 

 

이승만 일당과 당신들 가운데 체결된 여러 가지 협정의 내용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일당은 전체 민족의 손으로 추방되었거니와 도대체 당신들은 이 제불평등조약을 철폐할 생각은 않고 일보 강화하여 달려듦은 우리를 농락하는가? 조목조목 따질 필요가 없다. 한 마디로 말하여 이 협정은 식민적 불평등조약이다.
(중략)
미국은 전세계를 통하여 퇴조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파리한 패배를 인식해야 한다. 지금은 이미 17세기는 아니다. 지금은 이미 ‘야만인’ 아시아, ‘인종의’ 아시아는 남아 있지 않다. 전진적 세계사의 양양한 물결 속에서 아시아는 이미 반신불수는 아니며 새로이 호흡하는 기억의 힘센 인민을 포괄하는 건강한 약동체이다. 우리는 이제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식욕 돋우는 미끼는 아니다.

 

당신들이 끝까지 당신들의 왜곡되고 부당한 노선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결사적으로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회피하거나 묵살하지 말라.”

 

그리고 1961년 2월 20일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는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한미경제협정 비준거부촉구 공개장을 보낸다. 공개장 마지막 일부이다.

 

“국회의원 제공! 

 

제공은 제공 개인에 관한 어떠한 애로가 있을지라도 민족적 양심과 인민의 대변자라는 지고한 책임감을 재인식하여 이 협정의 비준을 단호히 거부할 것을 전체 민족의 이름으로 강력히 요구한다.
(중략)
제2공화국에 실망낙담한 작금의 민심동향도 4월항쟁 당시를 연상케 하는 문자 그대로 폭풍전야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으니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고 철저한 각성과 신중하고 명확한 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 제공! 

 

제공 중에 누구든지 과감히 나서서 이 협정의 폐기발언이 감행되어지기를 주권자인 인민대중은 강력히 요청한다.

 

우리는 이렇게 싸우는 진정한 선량에게 전민족의 열렬한 성원과 환호를 보낼 것이며 인민대중의 뇌리에서 그 이름 석자가 결단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png.jpg
2·8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

 

ㅡ 합법 공간을 열어 더 적극적으로 운동해야 한다.

 

4·19혁명에 참가한 황금수의 증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유당 말기는 제일 큰 문제가 실업 문제였어요. 당시는 실업자에게 경제적으로 지원한다던가, 무슨 보상 한다던가 이런 것이 전혀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불만은 있는데, 불만을 토로하고 그것에 대한 어떤 대책이라던가, 어떻게 싸워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다던가, 이런 방안은 전혀 없었어요. 무척 경제적으로 어렵고 빈곤한 시대였기 때문이지요.

 

4·19가 터졌을 때, 나는 그때 일을 하다가 손을 놓고 시위대가 타고 가는 트럭을 같이 타고, 같이 외치고 했어요. 지금 시청 옆에 있는 건물, 그전에는 국회의사당 건물이었는데, 건물 앞에서 경찰이 막 사람을 보고 총질을 하고. 총에 맞은 사람들을, 주위 사람들이 들쳐 엎고 병원으로 가고 하는 그런 면면들을 보고 저녁에 집으로 가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늘 머릿속에는 그 참상의 비극이 머리에 가득했습니다.

 

4·19가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시위이기 때문에 소리는 큰데, 그 결과물은 적었어요. 그때 역시 뼈저리게 느낀 것은, 크게 우리가 기대한 결과를 얻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이 운동이 성공하고 변혁을 시켜내려면, 조직적인 운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주로 하고, 가까운 동료들하고 논의하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바로 실천적으로 구체화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나도 그때 청년이었기에, 청년들의 생각을 모으는 태동하는 역사적 단계이다,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4·19혁명으로 반민족, 외세를 숭상하는 세력을 민중의 뜻에 의해서 처리돼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결국 허정 정권은 이승만을 외부로 도피시키는 그런 반민족적, 반동 노릇을 해왔지요. 

 

이런 것을 극복하고 바로 잡기 위해서는 민중들이 통일 단결된 그런 운동 조직이 있어야 되겠다, 그것이 몇몇 사람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의 생각과 뜻을 아우르는 그런 역할을 하여야 하는 시기라고 나는 보고 있었어요. 그것을 고민하고, 그것을 염려하고, 그것을 내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런 생각들을 나는 주로 가졌어요.

 

그때 청진동, 지금은 큰 서점 교보문고 건물이 있는 옆에 그때는 큰 하천이 있었어요. 하천 옆에 여관이 있었는데, 그 여관에서 주로 모여서 의논하고 어떻게 한다던가 이런 것을 토론했습니다. 나는 그때 여관을 자주 들락거리긴 했는데, 태동 시점에 무엇을, 어떤 역할을 맡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나는 사회당 중앙당 노동부장, 민자통 노동위원장, 통민청 성원으로 활동합니다.

 

당시 우리들은 운동을 합법적인 조건을 만들어서 운동을 해야한다. 운동이 합법적인 것을 기계적이라는 표현을 썼고, 비합법적인 운동은 수공업적인 운동이라고 그랬어요. 

 

최백근 선생 같은 분은 어떻게 하든지 합법 공간을 열어서, 비록 정치 수준이 낮더라도 합법 공간을 넓혀야 한다. 더 적극적인 운동을 통일 단결해서 해야 한다. 이래서 7·29민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그 결과는 참패였지요. 

 

참패의 원인은 민중과 맥을 같이 하는 조직적 연계가 없기 때문에, 선거운동의 결과는 민주당 일색으로 가고 말았어요.”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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