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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 주둔한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이라고 규정했으나 북에 주둔한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자칭했다.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에 따르면 점령의 목적이 일본 항복의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보호이며, 제2호에 따르면 점령군에 대해 반항할 경우 점령군 군율회의에서 최고 사형을 당할 수 있다(《매일신보》. 1945.9.7.).
반면 1945년 8월 25일 「치쓰챠꼬브 대장의 포고(I)」에 따르면 조선이 독립을 찾아 자유국이 되었고, 소련군이 조선에 온 목적은 조선 인민들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다.
포고문에 따르면 이를 위해 붉은군대는 조선 내에 있는 모든 반일적 민주주의적 당들과 단체들의 광범한 협동의 기본위에서 자기 민주주의적 정부를 창조함에 조선인민들에게 보조를 줄 것이다. 특히 포고문은 동유럽에서 실현된 인민해방과 독립이 조선에서도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고문은 군사재판에 의한 형벌 등을 언급하지 않은 채 조선 인민이 해방군인 붉은군대에 백방으로 방조할 것을 밝혔다(『조선중앙년감』 1950년판, 조선중앙통신사, 19~21쪽).
일본의 항복 직전 독립정부 수립은 김구의 임시정부, 여운형의 건국동맹과 조선인민공화국에 의해 추진됐다. 일본의 항복 이후에 북에 주둔한 소련군과 김일성, 남에 주둔한 미국과 이승만도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미군은 조선인의 모든 독립기구과 자치기구를 부정했고, 소련군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지원했다.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고, 8월 6일과 9일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했으며, 소련은 8월 8일 선전포고와 함께 일본을 공격했다. 결국 일본은 8월 10일 포츠담선언을 수용하고 무조건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여운형은 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해지자 1944년 8월 10일 비밀리에 좌우익을 규합하여 독립을 준비하는 건국동맹을 중앙과 지역에서 만들었다. 여운형의 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2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송진우, 안재홍, 조만식, 박헌영, 허헌 등과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자 했다.
하지만 우익 중 송진우 측은 조선총독부가 연합군에게 정권을 인도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건국논의가 어렵다는 점과 임시정부를 합의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논의 참여를 거부했다.
조선총독부는 패망 후 치안과 일본인의 무사귀환을 조선인과 협의하고자 8월 15일 오전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를 내세워 여운형과 회담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 즉시 석방, 3개월간의 식량 확보, 정치운동과 치안대 구성 보장 등을 조건으로 엔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여운형은 15일 당일 건국치안대를 발족하고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했다. 전국의 건준 지부는 8월 31일 당시 145개에 달했다.
건준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9월 6일에 개최하여 건준을 해소하고 모든 근로인민대중을 대변한다는 기치 아래 조선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9월 8일 열린 제1차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이승만을 주석으로, 여운형을 부주석으로하고,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무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을 내용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 부서가 14일 발표되었다.
9월 12일 서울시를 시작으로 도 7개, 시 13개, 군 131개에 인민위원회가 발족됐다. 여운형은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를 확대하기 위해 11월 20일 다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에게 자신을 신임하는 총선거를 제안했지만 미군정은 이러한 총선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전국 각지에서 인공과 인민위원회 인사를 체포 탄압했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8일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면서 임시정부의 대한국군준비대와 좌익의 조선국군준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인공이 미군정에 의해 사실상 해체된 후 인공 인사들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집결했다.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비상정치회의는 1946년 1월 7일 이후 좌우익으로 분열됐다. 좌익은 1946년 1월 19일 민주주의민족전선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민전은 2월 19일 미군정 지역의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등과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각종 문화단체 등이 집결하여 결성되었다. 공동의장단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의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다.
우익이 임시정부 중심의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를 출범시키고 미군정이 14일 이 회의를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으로 전환시키자, 좌익은 이에 대응하여 민전 본 조직을 서둘러 출범시킨 것이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원회가 무산된 후 미군정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좌우합작을 시도했다. 1946년 7월 25일 미군정의 제안을 받은 김규식, 여운형의 주도하에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였다. 하지만 조선정판사 사건 이후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고 좌익들이 총파업으로 대항하면서 좌우합작에서 이탈했다.
1946년 10월 7일 합의된 ‘좌우합작 7원칙’의 주요내용은 통일 임시정부 추진,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토지무상분배 및 중요산업 국유화, 친일파 청산, 좌우진영 모두 테러 중단, 입법기구 구성, 표현의 자유와 투표의 자유 보장 등이다. 하지만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은 이 원칙에 반대했다. 미군정의 민주의원, 김구는 찬성했고 이승만은 소극적이었다. 미군정은 이 원칙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히고 10월 12일 좌우합작 참여의사들을 포함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여운형 등 좌익은 미군정의 관선 입법의원을 거부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을 사실상 불법화하였다. 이에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주요 참여자들이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거나 체포되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조선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지하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미군정은 좌익들을 배제한 입법의원이 구성되자 좌우합작을 중단했다. 북의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1월 지역별로 선거를 거쳐 공식적으로 각급 인민위원회를 구성했으며,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여운형은 1946년 2월 등 수차례 밀입북하여 김일성 및 로마넨코 소련군 민정장관과 만나 인민위원회, 신탁통치, 좌우합작, 토지개혁 등을 논의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여운형은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면서 1946년 12월 민전 의장을 사퇴하고 남조선노동당을 탈당했다.
여운형은 사회노동당 창당이 성과가 없자 정계은퇴 선언을 했으나 1947년 5월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다. 여운형은 총격과 폭발 등 해방 직후 10번의 암살 시도를 당했으며 1947년 7월 19일 임시정부 계열의 테러단체 백의사와 관련 있는 한지근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여운형은 사망 당시 미군정의 입법의원과 협력을 모색했기 때문에 우익은 물론 좌익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트루먼이 대소봉쇄정책을 선언한 직후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됐지만 10월에 합의 없이 종료되고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다. 동력을 상실한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 6일 해체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이후 남북협상을 이어가지만 결국 실패했다. 북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1949년 9월 평양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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