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 마르크스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제4회)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등록일 : 2025.09.01

 

g4cRiv87dV8RqpsN3GGWUyBagGiid8QvfMTa5BU86koyOmUIA70GPkwZDw1GfhBa5xa9WIxvVAZJrBt1vEWuYg.jpg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


-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는 프랑스의 퓌지에테니에(Puget-Theniers)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아버지 시절까지 이탈리아 영토였고 1792년 프랑스에 병합됐다. 블랑키의 아버지는 온건한 공화주의자인 지롱드 당원이었다. 그는 1793년 잠시 감옥에 갇혔지만 석방돼 부군수로 재직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블랑키의 아버지는 관직을 잃었으며 빈곤에 시달렸다. 


블랑키는 나폴레옹을 굴복시킨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공화국 프랑스가 부르봉 왕가로 퇴보하는 것을 보면서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애국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한 열정을 품었다. 블랑키는 10살 때 파리에 가서 형이 교사로 있는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1818년부터 6년 동안 가정교사를 하면서 법학과 의학을 배웠다. 그는 1823년 17살 공화주의 봉기가 실패했을 때부터 이탈리아계 혁명조직인 카르보나리당 회원이었으며 공화주의 음모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825년~1826년에 그는 정치신문 ≪생시몽주의(Saint-Simonian)≫와 ≪생산자(Le Producteur)≫에 기고했다. 그는 2년 동안의 가정교사를 거쳐 1826년 소르본대 법대에 들어간 후 학생운동의 지도자가 됐다. 그러다 22살이 되던 해 1827년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샤를 10세의 전제주의 정치에 반대하는 공화주의 봉기를 일으켰다. 시내에는 바리케이드가 처지고 그는 라틴 지구에서 열린 봉기에 참여했으며 이 봉기기간 동안 목 부상을 포함해 세 차례 부상을 입었다. 


1830년에 그는 라 파예트 음모(La Fayette Conspiracy)로 알려진 혁명적인 공화주의 단체에 가입했다. 그는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의회 소식 등 정치문제를 다루는 신문 ≪글로브(Globe)≫의 기자였는데, 기자를 그만두고 소총과 삼색기를 들고 시가전에 참여했다. 1831년 2월 그는 모교 소르본대의 학생들을 상대로 봉기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3주 동안 수감됐다 석방됐다.


결국 혁명의 성공으로 루이 필립이 입헌군주로 옹립됐고 선거권을 일부 확대하고 의회정치를 강화시켰다. 블랑키는 혁명 참여의 공로를 인정받아 루이 필립으로부터 7월 훈장을 받았으나 혁명의 결과가 공화주의가 아니라 입헌왕정임에 실망했다. 블랑키는 ‘인민들의 공화주의 모임’(republican Societe des Amis du Peuple)'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 단체에서 블랑키는 부오나로티를 만났는데, 부오나로티는 프랑스혁명 시기 바뵈프의 옥중 동료로서 바뵈프의 혁명사상을 블랑키 시기까지 널리 전파했다. 블랑키는 부오나로티를 통해 프랑스혁명 기간 중 민중들의 무장봉기에 대해 자세히 접하게 됐고 계급투쟁과 비밀결사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블랑키는 계급투쟁 개념을 통해 부자와 압제자를 동일시하게 되었으며, 잘 훈련된 음모자들로 이루어진 비밀결사로 인민 봉기를 선동하고 시범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즉 블랑키에 따르면 바뵈프의 혁명모델을 이어받아 소수의 잘 훈련된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혁명 후 소수의 임시 독재정부(파리독재)를 구성해야 사회주의 실현이 가능하다. 


블랑키는 사유재산 폐지, 부의 재분배와 생산수단의 집단소유화(집산화)라는 사회주의에 동의했으나, 임시독재 이후 사회체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의견을 표명한 바가 없다. 그는 임시독재를 통해 각성된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원칙만 주장했다.


블랑키는 1831년 7월 인민들의 공화주의 모임에 가담하여 학생위원회 선언문을 작성하고 선동한 죄로 체포돼 수감됐다. 블랑키는 1832년 1월에 열린 재판에서 자신의 직업을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한 채 노동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3천만 명의 프랑스 무산대중(프롤레타리아트)의 한명”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부르주아 특권을 폐지하고 불필요한 세금을 없애고 무산대중에게도 투표권을 인정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자신의 사회주의노선을 최초로 공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배심원단은 그의 웅변에 감동하여 무죄라고 평결했지만 법원은 투표권이 있는 시민(부르주아)을 경멸하고 증오하면서 공공의 평화를 훼손했다면서 200 프랑의 벌금과 1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블랑키는 재판 후 잔여형기를 마쳤으나 수감생활 중 병을 얻었다. 이 때문에 블랑키는 석방 후에도 요양 중이었기 때문에 1832년 6월 8일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 봉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는 1834년 8월 수년 동안 사귀어온 자신의 제자 아멜리(Amelie)와 결혼했다. 그녀는 1841년 2월 질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블랑키의 옥바라지를 했다. 루이 필립의 입헌왕정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투표권을 부정하고 정치적 자유를 탄압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비밀혁명조직인 카르보나리당이 다시 왕성하게 활동하도록 했다. 블랑키는 이에 적극 가담하면서 자신이 주도하는 혁명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 끝없는 봉기를 시도하며 37년 동안 수감생활

 

1834년 노동자들의 결사를 금지하고 언론을 허가제로 운영하는 법률이 통과됐고 이에 반발하여 파리와 리옹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블랑키는 1834년 혁명조직 가족협회(Societe des Familles)를 만들었다. 그는 1836년 가족협회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불법무기소지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8개월 동안 감옥에서 복역한 후 파리에서 추방당하고 보호관찰을 받았다. 1837년 그는 사면을 받아 파리로 돌아왔으며 이번에도 입헌왕정을 타도하기 위해 공화주의자들을 결집해 계절협회(Societe des Saisons)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계절협회는 훈련된 혁명가들만 가입할 수 있었으며, 비밀엄수와 규율준수가 강조됐다. 계절협회 내의 세포조직으로서 주간협회는 7명, 월간협회는 28명, 계절협회는 3개의 월간협회로 88명이었고 연협회는 353명으로 구성됐고 3개의 연협회가 만들어졌다. 블랑키, 바르베(Barbés), 베르나르(Bernard)가 계절협회의 최고지도부였다. 천여 명에 이르는 전체 조직원은 주간협회와 같은 세포로 분할되고 세포와 세포는 철저히 분리돼 서로가 그 신분을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구성원은 바로 위 지휘자만 알 수 있었고 그 이상의 조직에 대해 알려는 것은 금지됐다. 말단 조직원은 어떤 행사인지 알지 못한 채 세포책임자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면서 각종 투쟁에 결합했다. 전체 조직원의 봉기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됐다. 대중들을 사전에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모인 곳에서 봉기를 하고 그곳에서 선전과 선동을 통해 대중들을 그 자리에서 미리 마련한 무기로 무장시켜 혁명에 참여시켰다. 계절협회는 파리에 있는 외국인들도 포함했는데, 공산주의자동맹의 전신인 정의자동맹이 파리의 독일인지부의 성격을 지녔다. 


1839년 5월 12일 블랑키는 대중들이 모이는 파리 도심에서 학생과 노동자로 구성된 소수 정예의 혁명가들을 이끌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먼저 무기고와 총포 상점을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한 후 시내 곳곳으로 보내 대중들을 무장시키려고 했다. 블랑키는 현장에 도착한 계절협회 회원 50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파리 시청을 점거했다. 하지만 파리의 민중들은 이들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무관심으로 대응했고 정부군은 소수의 무장대를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계절협회 회원이 아니지만 현장에서 결합한 인원까지 합치면 700~800명의 반군이 참여했으며 그 중 77명이 사망하고 최소 51명이 부상했으며, 군인 중 28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당했다. 


봉기가 실패한 후 블랑키는 체포를 면한 동지들과 몇 달 동안 숨어 지냈다. 결국 블랑키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됐으며 19명과 31명으로 나눠져 두 번의 재판이 진행됐다. 1840년 1월 14일 그는 계절협회의 무장봉기 때문에 바르베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고 베르나르는 종신추방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루이 필립이 종신형으로 감형해 그들은 파리에서 추방당해 몽 샐 미셀(Mont-Saint-Michel)의 요새 감옥에 수감됐다. 


블랑키는 감옥에서 한 차례 탈옥을 시도하던 중 실패했다. 그는 열악한 감옥 환경으로 인해 병을 얻었으며 블랑키의 옥사를 걱정한 왕이 사면을 제안했으나 블랑키가 거부했다. 결국 그는 1847년 4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나 파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투르에서 사실상 억류돼 있었다. 1848년 2월 혁명 직후 그는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온건한 공화주의자들 역시 무정부주의자인 봉기주의자 블랑키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감시했다. 


블랑키는 임시정부의 온건함에 불만을 품고 급진주의자들을 조직하고 잡지 발행, 연설, 집회를 통해 임시정부가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도록 압박했다. 경찰들은 1839년 블랑키의 유혈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블랑키 그룹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혁명정부에 사회주의정책을 제안하면서 급진적인 중앙공화협회(Societe republicaine centrale)를 설립하고 폭력혁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블랑키는 당시 프랑스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수준에서 혁명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교육도 없이 보통선거를 하게 되면 보수파 세력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할 것이라면서 보통선거에 반대했다. 5월에 임시정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선거를 통해 제헌의회가 구성됐다. 하지만 그의 예측대로 보수파가 의회 다수를 차지했다. 파리를 제외하고 프랑스 전역에서 농민이 다수이고 왕당파들이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의회에서 혁명을 주도한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온건공화파와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5월 15일 폴란드 민중의 저항을 탄압하는 러시아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파리 시내에서 열렸다. 블랑키 그룹이 이 집회를 주도하지 못했지만 이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군중들의 불만은 자연스럽게 파리 민중이 아니라 구 지배권력을 대변하는 보수적인 제헌의회로 향했다. 블랑키 그룹은 다른 군중들과 함께 제헌의회 연단을 점거했다. 블랑키가 이 연단에서 제헌의회를 비난하는 연설을 한 후 군중들이 파리시청으로 진격하여 점거하고 혁명정부를 선언했다. 하지만 블랑키는 파리시청 점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즉흥적인 봉기는 국민방위대에 의해 진압됐고 블랑키는 5월 26일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체포돼 벵송의 감속에 수감됐다.
 

- 국제노동자협회에서 마르크스와의 협력과 긴장

 

그가 체포된 직후 1848년 6월 파리의 실업자들을 위한 국민작업장이 보수적인 신정부에 의해 폐쇄됐다. 이어 실업자들에게 징집과 파리 퇴거령이 내려지자 실업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자신이 낸 세금이 국민작업장의 실업자에게 지급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농민과 상공인들이 포함된 국민방위대는 노동자봉기를 참혹하게 진압했다. 정부는 양측 사망자가 1,460명이라고 축소 발표했다. 하지만 사상자는 2만~5만으로 추정되고 1만4천명이 투옥되고 4천명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블랑키는 감옥에서 이 봉기 소식을 들었다. 


그는 1849년 루이 블랑(Louis Blanc) 등과 함께 재판을 받았고 10년형을 선고받고 1859년까지 복역했다. 블랑키는 감옥에서 정치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고 죄수들에게 강의를 했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제자들을 조직하고 감옥 당국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도했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다른 급진주의자 파벌과의 갈등관계에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1848년 혁명 당시 공화주의자뿐만 아니라 루이 블랑과 같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유럽의 언론들은 그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순수함을 강조하는 최초의 사회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로서 평가했다.


블랑키는 이번에도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마침내 그는 1859년 감옥에서 풀려나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과 싸우기 위해 바로 파리로 갔다. 하지만 1861년 3월 10일 그는 봉기를 주장하는 팸플릿을 인쇄하려다 체포됐으며 6월 14일 "전복음모"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반역죄로 수감된 다양한 젊은 혁명가들을 만났고 그 중 일부는 블랑키의 제자가 됐다. 이들은 블랑키가 1865년 교도소 병원에서 벨기에로 탈출한 후 헌신적인 참모가 되었다. 그들 중 클레망소(Clemenceau)와 랑크(Ranc)가 대표적인 인물이며 이들은 훗날 프랑스의 급진사회당(Radical Socialist Party)의 지도부가 됐다.

 
노동자협회.jpg
1864.9.28  런던의  성마틴 홀에서 열린  제1인터내셔날(국제노동자협회)창립대회
사진출처 : 사회주의자


블랑키는 마르크스와 만난 적이 없었지만 1848년 혁명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국제노동자협회에 참가하여 초기에 마르크스와 협력했으나 마르크스가 노동조합 설립을 주장하고 경제투쟁을 일부 인정하고 대신 봉기주의를 비판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마르크스가 런던본부를 중앙집권적인 지도부로 만들려고 할 때 블랑키는 제자들에게 국제노동협회에서 탈퇴하라고 요구했다. 1866년 파리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러 모인 블랑키주의자들의 모임이 경찰의 급습을 받아 41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결국 일부 제자들은 봉기주의자인 바쿠닌과 대립하면서 마르크스의 중앙집권화에 동조했다. 블랑키는 국제노동자협회와 관계를 끊고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제자들을 블랑키 조직에서 제명했다. 


블랑키는 망명지 벨기에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블랑키주의 아래 하나의 혁명조직으로 규합시켰다. 이때 결합한 외드(Eudes), 트리돈(Tridon), 페레(Ferre),  리고(Rigault) 등은 나중에 파리코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 즈음 파리에는 블랑키주의자 그룹들이 2천여 명에 달했으며, 블랑키는 가끔 파리로 몰래 들어가 이들과 회합했다. 


그는 1869년 일반사면을 통해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부터 블랑키스트 정당들이 탄생하고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사회당의 창당을 주도한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 샤를 롱게, 조르주 클레망소와 같은 제자들이 활약했다.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통해 프로이센과 전쟁에 돌입했지만 나폴레옹 3세의 군대는 패배를 거듭했다. 파리의 민심이 나폴레옹 3세로부터 멀어지자, 1870년 8월 13일 블랑키 세력은 봉기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블랑키는 전쟁 중에 봉기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블랑키의 제자들이 봉기를 일으키자고 고집했으며, 블랑키는 결국 제자들과 함께 파리에서 봉기했다. 하지만 봉기는 전쟁 중에 조국의 등에 칼을 꽂는다는 식의 비난을 받으며 실패했다. 봉기하기로 약속한 현장에는 소수의 블랑키주의자들만 모였고 파리 시민들은 동조하지 않았다. 


1870년 9월 2일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혀 항복하면서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9월 4일 제3제정이 무너지고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공화정이 출범했다. 블랑키는 공화주의를 탄생시킨 이 봉기에 참여했고 초기에 공화정을 지지했다. 하지만 공화정이 프로이센에 항복하고 급진적인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온건정책을 폈기 때문에 블랑키는 공화정에 반대했다. 블랑키스트들은 1870년 10월 31일 파리시청을 점거하고 좀 더 급진적인 공화정을 세우고자 했으나 봉기는 실패했다. 역시 블랑키주의자들은 1871년 1월 22일에 임시정부 타도를 기치로 봉기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630847-150-ans-de-la-commune-de-paris-retour-sur-l-histoire-de-l-insurrection-parisienne.jpg
파리꼬뮌 :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72일 동안 파리 시민들은 정부에 반기를 들고 전례 없는 사회적 연대에 기반한 조치를 취했다. 
출처  : sortiraparis

 

- 의회 참여, 블랑키주의와 맑스주의 결합, 프랑스 사회당

 

프랑스의 항복과 연이든 혁명의 실패로 낙담한 블랑키는 1871년 2월에 파리를 떠나 숨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은신처에서 10월 쿠데타 시도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내전이 발발하기 전날인 3월 17일에 비밀 감금되었다. 블랑키는 감옥에서 파리 코뮌의 봉기소식을 들었다. 파리 코뮌과 대립하던 공화정은 1871년 3월 궐석재판으로 블랑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그 직후 자코뱅파와 블랑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 집단은 임시정부에 반대하면서 파리코뮌 공화국을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블랑키는 파리코뮌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지만 이미 베르사유로 피신한 공화국 정부에 의해 투옥된 상태였다. 블랑키는 파리 밖에 구금됐으나 그와 그의 동료들이 파리코뮌의 의원으로 당선됐다. 92명의 시의원 중 44명은 네오 자코뱅파와 블랑키스트들이었다. 파리 코뮌은 보수파의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블랑키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베르사유 정부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베르사유 임시정부의 수장인 티에르는 블랑키를 억류하는 것이 군단 규모의 혁명군을 무력화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파리코뮌 의회에서 블랑키주의자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이들은 무정부주의적 경향 때문에 자신들만의 정당을 만들지 않았다. 이들은 코뮌에서도 항상 더 급진적인 주장을 요구하는 집회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5월 21일 베르사유 정부가 프로이센 군대의 도움을 받아 파리코뮌을 유혈 진압하는 피의 주간(Bloody Week)에 돌입했다. 파리코뮌의 혁명세력들 일부는 전투에서 희생됐고 나머지는 런던으로 피신했다. 


블랑키주의자들은 런던에서 마르크스가 주도하는 국제노동자협회에 결합했지만 무정부주의와 엘리트 봉기주의 때문에 마르크스와 대립했다. 국제노동자협회도 마르크스, 프루동, 블랑키, 바쿠닌 등 노선 대립으로 인해 1872년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파리코뮌이 완전히 진압당한 후 블랑키는 잠시 석방됐다가 다시 체포돼 모르레(Morlaix)의 샤토 뒤 타로(Chateau du Taureau) 감옥으로 이감됐다. 그는 1872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879년 4월 옥중에서 파리에서 600킬로 떨어진 남서부 항구도시 보르도(Bordeaux) 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그의 선거는 의회에 의해 무효가 됐고 대신 블랑키는 의회의 사면을 받아 6월에 석방됐다. 1880년 11월 그는 재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그는 낙선에도 불구하고 코뮌에 대한 사면령이 의회에서 제정되는데 기여했다. 


그는 혁명사상을 전파하면서 전국을 순회했다. 그는 1880년 12월 27일 파리코뮌으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대사면을 요구하는 대중연설 직후 뇌졸중에 걸렸다. 그는 1881년 1월 사망했고 파리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엔 10만 명이 운집했다. 그는 코뮌의 동지들이 묻힌 페르 라셰즈(Pere-Lachaise)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 후, 프랑스의 블랑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힘을 합쳐 1881년 중앙혁명위원회라는 조직을 결성했고, 1898년에는 혁명사회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블랑키는 76년을 사는 동안 거의 37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블랑키 사후 블랑키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이 협력했으며 1885년 선거에서 공화주의적 기회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단일 강령을 발표했다. 블랑키주의 당원들이 계속 늘어나 1895년 3만 5천 명에 달했고 출마한 후보들은 357명이었다. 1893년에는 4명, 1898년에는 7명이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98년 블랑키주의자들은 혁명적 사회당을 창당했고 1901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통합하여 프랑스 사회당을 창당했다. 다시 4년 후 이 당은 다른 사회주의 조직들과 함께 '통합 프랑스 사회당'이라는 하나의 조직을 결성했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교양

나이지리아 영화 《블랙북》: 권력과 복수의 이면을 드러낸 놀리우드의 새로운 이정표

2025.09.07

교양

[시] 별빛 처럼

2025.09.02

역사

블랑키ㅡ무정부주의를 맑스와 연결한 영원한 혁명가

: 마르크스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제4회)

2025.09.01

역사

해방정국(7) 남북 단독정부 이후 김구와 김규식

2025.08.24

교양

[시] 낫에 찍힌 어머니의 발등

2025.08.24

교양

[시] 구세주

2025.08.24

교양

로봇이 세금 내서 인류를 부양하면, 공산주의가 정말 오는 걸까?

2025.08.21

역사

해방정국 (6) 임시정부의 비상국민회의와 미 군정의 포섭

2025.08.21

역사

해방정국(5) 맥아더의 반공노선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구상

2025.08.20

역사

해방정국(4): 여운형의 인공 수립 및 미군정과 좌우합작 협력

2025.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