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등록일 : 202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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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때 을밀대 앞에서 기념촬영. 왼쪽에서   두번 째, 김규식 선생,  세번째 김구 선생
사진 출처 : 통일뉴스
 

유엔에서 먼저 외국군을 철수하고 정부를 수립하자는 소련의 안과 정부를 수립한 후 외국군을 철수하자는 미국의 안이 대립되었으나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의 안이 찬성 43, 반대 0, 기권 6으로 통과되었다. 소련 등은 기권했으며, 결의안에 따르면 유엔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발족시켜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남북 총선을 실시해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그리고 90일 이내에 미소철군을 협의해야 한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9개국이 선임됐으나 우크라이나가 참가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38도선이 봉쇄되어 남북이 사실상 분단된 상태였다. 결국 남북 총선거를 추진하려는 한국임시위원단 방북을 1948년 1월 소련이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임시위원단의 의견도 분열됐다. 호주, 캐나다, 인도 및 시리아의 대표들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는 전 지역에서의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의 대표들은 전체 인구의 2/3가 거주하고 있는 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해도 되며 소총회 논의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프랑스는 논의 초반에 기권 의사를 밝혔다. 결국 위원단은 논의 끝에 소총회에 한반도 문제 처리에 대한 입장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이에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는 한국임시위원단의 재량으로 조선의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하는 안건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했다. 소련은 표결에 불참했다. 


소총회의 위임을 받은 한국임시위원단은 인구의 2/3가 있는 남한에서만  5월 10일 총선을 치루기로 하고 북조선의 대표로서 1/3 의원은 추후에 선출한다고 결정했다. 결정은 중국, 엘살바도르, 인도, 필리핀이 찬성했고 캐나다, 호주가 반대했으며, 프랑스, 시리아가 기권하면서 간신히 통과됐다. 특히 캐나다 대표는 남한만의 선거는 통일을 위한 논의의 실패로 보고 유엔이 선거에 참여할 토대가 사라지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이 결정을 환영했으며, 민주통일당, 민주독립당, 조선민주당은 소총회의 결의를 마지못해 수용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결정에 반발하여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좌익들은 총선반대투쟁에 돌입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 치른 결과 200석 중 무소속이 103석, 이승만의 독촉국민이 48석, 독촉농민이 2석, 한국민주당 22석, 대동청년당 9석, 조선민족청년단 6석, 기타 10석이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신익희.김동원을 부의장으로 선출하였다. 6월 초,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 헌법 초안이 제출되었다. 


헌법 초안은 모든 정파들이 동의한 의원내각제를 채택했지만 6월 15일,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고수함으로 인하여 대통령제로 최종 결정되었다.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였고 7월 20일, 제헌국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한 제1대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초대 대통령으로, 이시영 후보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8월 11일 웅기·나진·청진에 진입했다. 8월 17일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구성되었다. 소련군의 요구로 8월 27일 건준과 친소파 각 16명 씩으로 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장은 조만식이 부위원장으로는 친소파의 현준혁이 선출되었다. 소련군은 9월 초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분할점령안에 해당하는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 


소련군 진주 후 공산주의자들 주도로 각 도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고, 9월 8일 "북조선5도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소련군은 각 지역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소련군은 11월 말 민정담당 부사령관을 임명하고 이를 확대하여 ‘민정국’을 설치했다. 


김일성 소련군 대위 등 조선인 103명이 소속한 북항일연군교도려(88여단)은 9월 19일 원산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도·시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이나 고문, 지역방위 담당 등으로 배치되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이 김일성을 소개했다. 이후 김일성은 소령으로 진급해 평양주둔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으로서 고문의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공산당은 1945년 9월 11일 재건된 후 10월 3일 소비에트 민정청을 설치했다. 1945년 10월 8일과 10월 9일에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박헌영은 당의 중앙은 한 곳이어야 된다는 이유로 분국 형식으로 합의했다.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은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고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의 88국제여단에 소속된 최용건이 부당수가 됐다. 1945년 11월 19일에는 '(북조선) 5도행정국'이 출범하였다.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소련 군정은 1946년 1월 2일 이후 좌익들이 찬탁으로 돌아선 이후에도 조만식이 반탁을 고집하자,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사실상 연금했고 2월 24일 최용건이 조선민주당의 당수가 됐다.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구성돼 무상분배 토지개혁 단행, 국유화 등을 단행했다.

 

1946년 11월 북에서 각 지역별로 선거를 거쳐 공식적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됐다. 1947년 2월에 출범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단독총선거 직후 남북총선을 거쳐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 개편되었다.


김구, 김규식은 우파였지만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고 “남북정치요인회담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구와 김규식의 주도로 14개 정당과 51개의 사회단체로 구성된 민족자주연맹은 1948년 2월 서울의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제안했다. 


국제연합임시한국위원회 일부 인사들도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봤다. 하지만 2월 26일 국제연합 소총회는 미국대표의 제안에 따라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한다.”는 방안이 가결되었다. 북은 3월 25일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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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1948.4.19-4.22)
4월 19일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남측은 41개, 북측은 15개의 정당ㆍ사회단체가 참석하였고 이로부터 선출된 대표자는 695명이었다. 남조선로동당, 근로인민당 등 좌익 정당과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등 우익 정당이 총망라되어 참석한 것이었다.
출처 : 나무위키


김구는 4월 19일, 김규식은 4월 22일 입북했으며 남북연석회의는 19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됐다. 27일부터 30일까지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이극로·엄항섭·김일성·김두봉·허헌·박헌영·최용건·주영하·백남운 등 15명으로 구성된 남북요인회담이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외국군대 즉시 철거 후 전조선정치회의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 등을 결정했다. 1948년 6월 29일 평양에서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남한의 5.10 총선거로 구성된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비법적 조직체로 규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 모두의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면서 이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는 북에서 직접투표로 남에서 간접투표로 진행됐다. 즉 남에서 먼저 인민들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의 대의원 1,080명을 직접 선출하고 이 대의원들이 8월 21일 북의 해주에 모여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남을 대표하는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출했다. 북의 자료에 의하면 조선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의원 선거지도위원회 위원장 박헌영이 “유권자 8백68만 1천7백46명 중에서 77.48%가 참가했고 이승만 정부의 탄압에 의해 9백 57명이 검거 투옥되었다.”고 보고했다.


선출된 대의원들은 남북제단체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모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들로서 남조선노동당 당원 132명, 김원봉의 인민공화당 당원 68명,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회원 66명, 여운형과 홍명희가 당수를 맡았던 근로인민당 당원 62명, 홍명희가 창당한 민주독립당 당원 53명,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창당한 사회민주당원 43명, 민주한독당 당원 35명, 이용(李鏞)에 의해 창당된 중도진영의 신진당원 31명 등이다.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 김구·김규식은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1948년 7월 21일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고 UN에 남북 두 분단국가의 해체와 남북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암살되고 김규식은 한국전쟁 직후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갔으며, 바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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