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 마르크스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제3회)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등록일 : 2025.07.26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png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ㅡ 프랑스혁명으로 뛰어든 피렌체의 젊은 귀족

 

필리포 부오나로티(Filippo Buonarroti, 1761~ 1837)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대공국(1569~1859)의 주도인 피렌체의 명문귀족으로 태어났다. 그는 궁정귀족이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 피렌체의 궁전에서 살면서 토스카나의 지배자인 레오폴드 대공(1747~ 1792)의 총애를 받았다. 레오폴드 대공의 아들인 페르디난트 3세(1769~1824)를 포함하여 토스카나의 대공들은 평생 부오나로티가 위급할 때마다 도와주었다. 

 

부오나로티는 17살부터 피사대학교에서 철학, 역사, 정치, 법학을 공부해 21세에 변호사가 됐다. 그가 대학을 중간에 그만두자, 대공은 그를 기사로 임명하고 거액의 연금이 보장되는 궁전 관리직을 제안했다. 부오나로티는 루소를 지지하는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기사 작위만 받아들이고 궁전 관리직은 고사했다.

 

그는 공화주의를 추구하는 프리메이슨이나 카르보나리당과 같은 비밀조직에 가입했으며, 1787년 네덜란드의 공화주의 혁명을 찬양하는 저서를 발행했다. 이 때문에 그는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대공도 공화정을 주장하는 부오나로티를 토스카나대공국에서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부오나로티는 혁명에 기여하고자 이탈리아에서 가까운 프랑스 자치령인 코르시카로 가족들과 함께 이주했다. 

 

필리포 부오나로티(1761-1837).png
필리포 부오나로티(1761-1837)

 

당시 코르시카에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 파리의 혁명정부를 지지하는 세력, 왕당파 등이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이탈리아 출신의 살리체티(Salicetti)가 코르시카를 대표하는 제헌의원이었기 때문에 부오나로티는 친구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는 코르시카에서 ≪이탈리아 자유의 친구(UAmico della Liber td Italica)≫라는 저널을 발행해 코르시카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급진적인 공화주의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1791년 코르시카에서 리보르노로 추방됐고 거기서 체포돼 투옥됐다. 

 

ㅡ 프랑스 혁명정부의 대변자로서 국내외에서 활동

 

다행히 파리의 제헌의회와 레오폴드 대공의 개입으로 그는 코르시카로 돌아왔다. 그는 거기에서 자코뱅당에 가입했으며 재산의 평등과 재산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92년 살리체티가 제헌의회의 임기를 마치고 코르시카로 돌아와 부오나로티와 함께 활동했다. 부오나로티는 코르시카 법원의 국가위원으로 임명돼 혁명정부가 몰수한 성직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살리체티는 제헌의회의 임기가 끝난 후 1792년 국민회의 의원으로 다시 선출됐다. 살리체티는 부오나로티에게 함께 파리로 가서 혁명정부를 위해 일할 것을 제안했다. 부오나로티는 파리로 가서 그의 정치적 식견과 재능을 발휘했고 곧 능력을 인정받아 파리의 자코뱅당에 가입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정책을 지지하면서 자코뱅당의 급진파인 산악파의 일원이 됐다. 

 

마침 1792년 겨울 코르시카에서 귀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국민회의는 부오나로티를 전권위원에 임명하고 코르시카에 파견했다. 당시 코르시카에서 독립운동을 해 온 파스칼레 파올리(Pasquale di Paoli)가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코르시카의 왕당파와 연합해 권력을 잡았다.

 

코르시카섬-2.png.jpg
코르시카섬

 

부오나로티가 코르시카 섬에 도착했으나 왕당파들은 파리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협상을 거부했다. 왕당파들은 부오나로티를 죽이기 위해 한밤중에 그의 집을 급습했으나 그는 간신히 파리로 피신했다. 그는 코르시카의 분리주의자 파스칼레 파올리를 국민공회에 고발했고, 그 외 혁명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793년 5월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다. 

 

파리정부는 부오나로티에게 리옹의 반혁명 운동을 진압하는 임무를 새롭게 부과했다. 리옹의 부유한 제조업자들과 상점 주인들은 귀족들의 소비와 노동자에 대한 저임금을 통해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로베스피에르의 경제통제에 불만을 품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군주제를 복원하려고 무장봉기했다. 

 

ㅡ 무산대중의 혁명가 바뵈프와 운명적인 만남

 

부오나로티가 리옹에 가는 동안 혁명정부 편에 섰던 조셉 샬리에 (Joseph Chalier) 리옹시장은 1793년 7월 사형을 당했고, 반란군이 시청을 폐쇄하고 공화주의자들을 학살했다. 파리가 보낸 진압군보다 먼저 리옹에 도착한 부오나로티 일행은 반란군에 체포돼 지하감옥에 수감됐다. 부오나로티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파리공화국의 콜로 데르부아(Collot d'Herbois) 군대가 리옹을 점령하고 부오나로티를 구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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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2의 도시 리옹

 

부오나로티는 콜로 데르부아와 로베스피에르의 추천으로 이탈리아 니스 점령군의 군사재판관으로 임명됐으며, 피에몬테가 프랑스혁명군에 의해 점령되자 이탈리아의 점령지에서 프랑스정부를 대표하는 대사로 임명됐다. 그는 식민지를 관리하거나 프랑스와 전쟁 중에 발생한 이탈리아인 망명자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는 파리정부의 대리인으로서 관대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현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파리정부도 만족했다.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반혁명정부는 1795년 3월 당시 이탈리아에 속했던 리스의 프랑스총독인 튀로(Tureau)에게 부오나로티를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이라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파리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튀로는 부오나로티를 존경했기 때문에 10일 동안 체포하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30만 프랑스 파운드가 담긴 금고를 갖고 피신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부오나로티는 자신이 죄가 없다면서 체포에 순응하여 파리로 압송됐다. 

 

부오나로티의 체포 소식을 들은 레오폴드 대공은 대사인 코르시니 왕자를 통해 그에게 그가 피렌체로 돌아와 자신을 돕는다면 프랑스정부에게 석방을 탄원하겠다고 했으나 부오나로티는 자신은 자유와 결혼했다면서 거절했다. 부오나로티는 플레시스 감옥에서 바뵈프를 만났으며, 둘 다 평등주의적 공동체에 관심이 있었고 좀 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 

 

ㅡ 반동정부를 전복하려는 무산대중의 혁명을 추진

 

프랑스정부는 왕당파가 공화국을 전복하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자, 모든 공화주의자들을 단결시키기 위해 급진파 공화주의자들조차 사면했고 부오나로티 역시 1795년 10월 석방됐다. 그는 급진주의자 모임인 판테온 클럽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바뵈프의 글과 이론을 클럽에 소개했고, 그 결과 바뵈프는 급진주의자의 지도자로서 지위를 더욱 확립했다. 1796년 1월 반동정부에 의해 판테온 클럽은 폐쇄됐고 부오나로티는 1796년 3월 바뵈프의 비밀혁명조직인 평등주의자의 음모에 가입했다. 

 

바뵈프(1760-1797).png
바뵈프(1760-1797)

 

1796년 5월 평등주의자들의 봉기는 직전에 발각돼 부오나로티는 동지들과 함께 5월 8일 체포됐다. 1797년 5월 바뵈프와 다르테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재판에서 부오나로티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밝혔다. 레오폴드 대공이 토스카나의 법원과 당국을 통해 부오나로티에 대해 탄원을 했고, 그 결과 프랑스 밖으로 귀양가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셰르부르 감옥으로 이송됐고 코르시카 섬에서 알게 된 나폴레옹은 1800년 3월 부오나로티를 좀 더 처우가 좋은 오를레앙의 요새 감옥으로 이송시켰다. 그는 1802년 다시 알프스 지방의 수스펠로로 이송됐으며, 거기서 모범수로 가장하면서 비밀조직(Secret society)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는 수차례 탄원 끝에 1806년 석방돼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는 대신 제네바에서 정착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거기서 1808년 프리메이슨의 비밀혁명 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1812년 자코뱅 당원들이 나폴레옹 황제를 암살하고 1793년 헌법을 복원시키려고 한 말레( (Claude Francois de Malet) 장군의 음모에 연루됐다. 이 사건으로 부오나로티의 비밀조직(Secret society)이 해산 당했다. 보오나로티는 2년 동안 제네바에서 추방당했으나 다시 돌아왔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 온 이후에 자신의 비밀조직(Secret society)을 재건시켰다. 비밀조직은 전반적으로 자율적으로 활동하였으나 중앙지도부의 경우 그 신분이 비밀이며, 광범위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규율은 블랑키를 거쳐 공산주의자동맹에게까지 전해졌다. 

 

ㅡ 바뵈프의 무산대중혁명을 블랑키와 마르크스에게 전수

 

그는 카르보나리당 활동에 관여하였으며, 1818년에 이르러 제네바뿐만 아니라 스위스, 프랑스와 자신의 고향인 토스카니 지방의 카르보나리당 활동에도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 1823년 이탈리아에서 부오나로티의 조직원이 체포됐으며, 제네바에서도 조직이 발각돼 부오나로티는 브뤼셀로 추방당했다. 

 

부오나로티는 그곳에서 혁명활동을 계속하다가 1828년 바뵈프의 저서로 알려진 『평등을 위한 음모의 역사(History of the Conspiracy for the Equality)』를 출판했다. 이 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는 혁명가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이 책은 1836년 영국에서도 영어로 출판돼 큰 인기를 얻었다. 두 사람 모두 책에 언급된 사람들의 체포를 우려해 가명이나 약명을 사용했다.

 

그는 1830년 7월 혁명이 성공한 후 루이 필립의 입헌군주정이 성립되자 파리로 귀환했다. 부오나로티는 파리에서도 블랑키, 루이블랑 등 입헌군주정에 반대하는 공화주의 급진파들을 지도했다. 1833년 72세의 나이로 마지막으로 루이 필립에 의해 체포됐으나 수 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후 반체제운동을 하지 않을 조건으로 석방됐다. 

 

≪타임즈≫ 등 자유주의신문들은 70대 노인에 대한 탄압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이후 부오나로티의 과격한 혁명 전력이 공개되면서 그의 체포에 대한 논란이 거세졌다. 하지만 루이 필립은 감시만 할 뿐 더 이상 체포하지 않았다. 그는 1837년에 가난과 맹인으로 시달리다가 사망할 때까지 혁명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루이블랑에 따르면 부오나로티는 죽기 전에 혁명의 성공을 보고 싶다면서 혁명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천여 명의 프랑스 지지자들과 이탈리아 망명자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를 평등사상의 옹호자, 위대한 시민으로 부르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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