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7.24
신동숙-1.jpg
2003년 인혁당 관련 희생자 전국 순례 중  부산 영락공원 김배영 선생, 이상배 열사 묘역에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동숙 여사.


조선이 외국과 근대식 외교 관계를 맺은 이래 1880년 11월에 처음 생긴 외교공관이 일본공사관이다. 이때 공사관 수비를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조선 강점과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 사령부 설치를 위해 증파(增派)하면서 명칭이 여러 번 바뀐다.

 

먼저 1904년 러일전쟁 직후 일제는 서울에 ‘한국주차군’ 사령부를 설치한다. 그리고 1907년 의병 탄압과 중국 침략을 위해 2개 사단을 일제는 파병한다. 이후 1910년 강제 병합 후 일본군을 ‘조선주차군’으로 재편한다. 특히 1915년에 2개 정규 사단을 서울 용산(20사단)에, 함경북도 청진 나남(19사단)에 사령부를 각각 설치 배치한다. 이후 1918년 한반도에 상주한 제19, 20사단을 통합하여 ‘조선군사령부’를 만든다.

 

또한 일제는 육군뿐 아니라 해군 역시 주둔했는데, 남해 여수 부근 진남만과 동해 함경도 영흥만에 방비대를 두었다가, 1916년 4월 진해에 군항부를 두고 구축함을 배치했다. 

 

역대 한국주차군사령관은 1904년 3월 11일부터 1910년 10월 1일까지 3명이었고, 조선주차군사령관은 1910년 10월 1일부터 1918년 6월 1일까지 6명 그리고 조선군사령관은 1918년 6월 1일부터 1945년 패전까지 14명이었다.

 

일제는 전략적으로 2개 정규 사단 주둔과 무려 23명의 사령관을 교대 임명하며, 식민지 조선을 중국과 대륙침략의 교두보와 군수 기지화로 삼는다. 

 

그리고 ‘조선군’의 임무는 한반도 주둔 및 치안 확보와 만주 및 러시아 국경의 방어, 특히 간도 지역의 항일무장 독립군의 토벌이었다.

 

ㅡ 서간도와 북간도의 항일무장투쟁 단체 창설

 

3·1혁명 이후 간도 일대, 만주와 러시아의 조선인 독립운동단체는 비폭력으론 국권을 찾는 데 한계가 있고, 항일무장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앞다투어 무장 부대를 창설하기 시작한다.

 

만주는 역사적으로 고구려,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이 번갈아 주도권을 장악했다. 

 

조선 말기에는 동만(현재의 연변) 지방의 경우, 조선인들에 의해서 개척되면서 1910년대부터 조선의 독립운동기지였다. 그리고 만주는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의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의 기지였다. 

 

간도는 19세기 말부터 많은 조선 농민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했으며,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조선인 이주자가 급증해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자들이 간도를 무대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반적으로 압록강 쪽을 서간도, 두만강 쪽을 북간도라 일컬었다. 

 

먼저 서간도 일대의 독립군으로는 1919년 4월 15일 창설된 의병 계열 인사들이 복벽주의(復辟主意)를 부르짖으며 지린성 퉁화시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대한독립단을 창설한다. 이후 연호 사용을 둘러싼 갈등으로 분열되나 광복군사령부로 통합된다.

 

지린성 류허현 량종창촌에 있는 대한독립단 본부 터.png.jpg
지린성 류허현 량종창촌에 있는 대한독립단 본부 터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또한, 같은 시기 한인들의 자치조직인 한족회 산하에 군사 조직인 군정부를 설치한다. 이후 “서로군정서”로 개칭해 출범하면서, 산하에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편해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한다. 특히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사 출신으로 일본군을 탈출한 김광서(김경천, 1883~1942)와 지청천(이청천, 1888~1957) 그리고 윈난(雲南) 무관학교 출신 이범석(1900~1972) 등의 전문 군사교육을 받은 교관들이 학생을 가르쳤다.

 

그리고 함경남도 출신이 주축이 된 대한독립군비단이 지린성 바이산시 창바이현에 조직된다. 이후 태극단, 광복단 등과 함께 임시정부 산하 대한국민단으로 개편된다.

 

북간도 일대 독립군으로 대종교 계열 서일(1881~1921)·계화(1884~1928)가 조직한 중광단(重匡團)의 토대 위에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고, 김좌진이 함께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있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당시 천여 명이 넘는 대원과 기관총 7문을 비롯한 상당한 무기를 확보한 최대규모의 독립군부대였다. 나중에 1910년대 초까지 무장투쟁을 계속해온 홍범도의 제안으로 대한국민회의 직할부대인 대한국민회군과 대한군무독군부는 통합을 하고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한다. 

 

ㅡ 조선 진공 작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그리고 경신참변

 

투봉오동 전투 회화(사진=나무위키).png.jpg
투봉오동 전투 장면 회화 (그림=나무위키)

 

서간도와 북간도 일대 항일무장부대는 국경을 넘어 주재소 습격 등 조선 진공 작전을 펼쳤다. 

 

강준만은 『한국근대사 산책 6권』(인물과사상사, 2008)에서 독립군의 국내 진공 작전 봉오동 전투에 대해 기술했다.

 

“가장 규모가 큰 독립운동 기지인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가 세 군데로 확대되었고,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가 조직되었다. 홍범도(1868~1943)가 이끈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여러 차례 국내 진압작전을 전개했는데, 일제 자료에 따르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24회나 있었다.

 

나남 19사단 소속 일본군은 1920년 6월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했으나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의 연합부대한테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이었고,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었다.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한국인 민간인 16명을 학살하였다. 독립군은 봉오동전투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부르면서 다음 전투를 대비하였다.”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청산리 대첩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1920년 10월 21일에 벌어진 청산리 전투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쟁이었다. 청산리는 천지에서 북동쪽으로 18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백두산 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산마을이었다.
(중략)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 2000여 명은 대포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 5000명 가운데 2000여 명을 사살, 항일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렸다. 반면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여 명, 부상자는 약220명 이었다.
박은식은 ‘우리 한국인들은 물론 중국인과 유럽인들도 환호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세계에서 미증유의 기묘한 전공이다’고 청산리 전투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 승전을 기념하는 독립군(사진=백야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png
청산리독립전쟁 승전을 기념하는 독립군(사진=백야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10월 5일부터 11월 23일까지 북간도 서간도 일대 조선인촌을 찾아다니며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는 집단학살로 보복한다.

 

강준만은 같은 책에서 일제의 보복 만행을 당시 간도에 주재한 캐나다 선교사 마틴의 기록을 인용한다.

 

“먼동이 틀 무렵 일본군 보병이 무장하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이 마을을 포위하여, 먼저 노적가리에다 불을 질러 태웠다. 곧 이어 집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무릇 남자는 노인과 어린애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하였다. 

 

채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섶에 불을 붙여 그 몸 위로 던지니, 숨이 넘어가려는 사람이 아픔을 못 견뎌 펄펄 뛰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하여 숨진 뒤에는 그슬려져 누구의 시체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처럼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면서도 사망자의 부모처자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다.”

 

ㅡ 일제의 국경수비대 강화와 자유시참변 

 

1920년대 전반 동안 매년 백수십 차례 항일무장독립군과 ‘조선군’과의 교전이 있었다. 

 

일제는 보통 한 개 군에 경찰서를 두었던 것을, 함경북도와 평안북도 국경지대는 46개 군에 63개의 경찰서, 17개의 파출소, 505개의 주재소, 138개의 출장소를 강화 배치한다. 그리고 주재소 주변에 참호와 철조망을 설치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강 주변 곳곳에 참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군’은 불법적으로 월경(越境)하여 항일무장 세력들을 공격했다.

 

1920년에 이뤄진 일제의 간도 출병으로 약 4,000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또한, ‘조선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비할 국경수비대를 편성하고, 계속 병력을 늘려 1926년에는 2,068명의 대원을 제20사단 산하 2개, 제19사단 산하 4개의 수비대를 만든다. 이는 조선인이 밀접해 있는 북간도 등지의 많은 항일무장투쟁 단체를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청산리 대첩에서 승전을 이끈 항일무장 독립군부대들은 또 다른 독립군부대와 합류해 소련 측의 지원을 받아 장기 항전을 준비하려고 자유시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동안 시베리아에 먼저 온 항일독립군 부대의 통합과정에서 주도권 싸움에 휘말려 수백 명이 죽고 포로가 되는 자유시참변을 겪는다. 

 

자유시참변에 대한 2023년 9월 19일자 『한겨레21, 1481호』 “홍범도를 위한 변명” 기사이다.

 

“1921년 초 소련 연해주 자유시(스보보드니)로 간 독립군 부대는 10여 개, 3천 명 이상이었다. 당시 이들의 과제는 전체 독립군의 통합과 붉은군대로부터 지원 받기였다. 그런데 이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두고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대립했다. 

 

애초엔 상해파 중심의 통합이 추진됐으나, 붉은군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921년 6월 붉은군대 2군단 29연대와 이르쿠츠크파의 오하묵이 이끄는 자유대대가 박일리아가 이끄는 상해파의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를 무력으로 무장해제했다. 이 충돌로 사망 36~272명, 실종 59~250명, 포로 864~917명 등 엄청난 독립군 피해가 일어났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png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

 

이후 만주 연해주에서의 항일민족해방운동은 자유시참변으로 한때 분산되고 침체한다. 그럼에도 각 단체 사이의 통합운동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간도의 항일무장투쟁과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의열투쟁도 계속되었다.

 

ㅡ 항일지사들의 의열투쟁과 몸을 던지는 불굴의 항쟁

 

3·1혁명 이전의 대표적 의열투쟁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암살한 이유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 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일 한일신협약 7개 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학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 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 죄상을 꼽았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의열투쟁은 3·1혁명 이후 주요한 투쟁방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의열단(義烈團)을 창단한다.

 

1919년 11월 9일 밤, 중국 지린성(吉林省) 밖 화성여관에서 13명의 조선 청년들에 의해 의열단이 창단된다. “의열단”의 이름은 공약 중 “천하의 정의(正義)로운 일을 맹렬(猛烈)히 실행하라”라는 “정의”의 ‘의’와 “맹렬”의 ‘렬’을 따서 지은 것이다. 단장에는 김원봉(1898~?), 부단장에는 곽재기(1893~1952)가 추대됐다.

 

의열단.png
의열단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의 정신이 된다.

 

“조선혁명선언”이자 의열단 선언 일부이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제1은 다른 민족에 의한[異族] 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다른 족속[異族] 그것이 마음대로 다스리고[專制하여] 있으니 다른 족속의 지배[異族전제]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固有的) 조선이 아니니, 고유적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다른족속의[異族] 통치를 파괴함이니라.

 

제2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적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적 조선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쳐부숨[打破함]이니라.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가 아니고 민중을 잡아먹으려는 강도의 살을 찌우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을 발전하기 위하야 경제 약탈제도를 파괴함이니라.

 

제4는 사회적 불평균(不平均)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 위에[以上에] 강자가 있고 천민 위에[賤者以上에] 귀족이[貴者가] 있어 모든 불평균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빼앗고[剝削], 서로 질투, 원수시[仇視] 하는 사회가 되야 처음에는 소수의 행복을 위하야 다수의 민중을 해치다가[殘害하다가], 끝내는[末境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해쳐서[殘害하야] 민중 전체의 행복이 필경 숫자상의 공(空)이 되고 말 뿐이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함이니라.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지금까지 전해 내려 온[遺來하던] 문화사상(思想)의 종교, 윤리, 문학, 미술, 풍속, 습관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공급하던 도구[諸具]가 아니더냐? 일반 민중을 노예로 만든[奴隷化케 하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 계급은 강자(強者)가 되고 다수 민중은 도리어 약자(弱者)가 되어 불의의 압제를 반항치 못함은 전혀 노예적 문화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니, 만일 민중적 문화를 제창하여 그 속박의 사슬을[鐵鎖를] 끊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은 권리 사상이 박약하며 자유 향상의 흥미가 모자라게 되어[缺乏하여]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輪廻]할 뿐이다.”[출처 : 『조선혁명선언』 (화다출판사, 1974)]

 

ㅡ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과 홍범도 아내 이씨 부인의 회유 협박 고문 사례

 

의열단은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독립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단체다. 의열단은 일제의 폭압에 맞선 단순한 독립운동 단체를 넘어, 의열투쟁으로 민족의 자존과 정의를 구현한 상징적 존재이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등 일제의 핵심 기관과 친일파 거물, 밀정, 토호, 열신(劣紳) 등 ‘7악’을 제거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특히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단의 대표적 거사는 1921년 9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1923년 1월 23일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의거,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의 식민수탈의 총본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등이 있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인의 항일 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과 보복 만행을 저질렀다.

 

신채호는 앞의 출처 “조선혁명선언”에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열거했다.

 

“주리 틀고[周牢]·목에 칼을 채우며[枷鎖]·단근질·채찍질·전기질·바늘로 손톱 밑, 발톱밑을 쑤시는·수족을 달아매는·콧구멍에 물붓는·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 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서 옥문에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인이[廢疾者가] 될 뿐이라.” 

 

그리고 임경석 교수의 『독립운동 열전 02』(푸른역사, 2022)에 나오는 홍범도 장군 아내에 대한 귀순 공작과 회유 협박 고문이다.

 

“홍범도의 아내 이씨 부인은 거센 압박을 받았다. 산중에 웅거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임재덕 순사대장은 아예 문안까지 일러줬다.
‘일본 천황에게 귀순하면, 당신에게 공작 작위를 하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경사스런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들도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략)


회유에 더하여 협박도 덧붙였다. 임재덕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너희 모자를 어육 내겠다고 위협했다.
(중략)


이씨 부인은 결심했다. 거절의 뜻을 단호히 표명했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중략)


이씨 부인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를 끼워 넣는 등 야만적인 폭행이 쏟아졌다. 거듭되는 고문은 이씨 부인을 반죽음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한 회상기에 따르면, 그때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고 한다.”

 

ㅡ 일제 경찰의 집요한 사찰과 비열하고 악질적인 사생활 폭로 그리고 고문

 

일제의 주구 친일 경찰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에서 살아남아, 비열하고 집요한 사찰과 악질적인 고문은 박정희 정권에서 더욱 잔악해진다.

 

4·9인혁통일열사 도예종 선생의 아내 신동숙은 1964년 서부초등학교 때 1차 인혁당 사건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주위 직장 동료와 친구들 눈도 그렇고, 부모 형제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등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신동숙-2.jpg
생전의 신동숙 여사 (사진 왼쪽)

 

신동숙-3.jpg
신동숙 여사

 

특히 형사들의 집요한 감시와 부군 도예종 선생에 대한 계획적인 사생활 문제 폭로는 신동숙을 더욱 힘들게 했다. 이 증언은 신동숙이 생전에 허락하신 것으로, 공안의 비열하고 악질적인 정신적 고문을 폭로하기 위해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으면 밝혀달라고 필자에게 부탁하였다. 

 

“1963년 형사들이 남편의 도피처를 알기 위해 학교로 저를 찾아와 ‘전처에게서 남편이 아들을 하나 낳았다’라고 남편의 도피처를 알기 위해 저를 격분시킵니다. 당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학교 일직이었는데 흑판에 글씨를 쓰려고 하니 글씨가 하나도 안 보입니다. 이때부터 시력이 급급히 나빠졌습니다.

 

가족이 반대한 결혼을 힘들게 하였는데, 이렇게 남편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였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안 보였습니다. 안정을 찾을 수 없어 친정에 갔지만, 그 충격으로 실신하여 겨우 일주일여 만에 회복하여 학교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 충격으로 시 신경을 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남편과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아들 문제는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고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형사가 계획적으로 막무가내 폭로로 남편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가, 저를 이용하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저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3년 전 낳은 아들을 이제야 이야기하는 저들의 행태는 뻔한 것이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저로서는 이것으로 남편과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기로 작정할 정도로 마음의 상처는 너무나 컸습니다. 

 

저는 원래 심장이 안 좋았지만, 이때부터 구심(필자 : 일본 심장약)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먹고 약방에서 청심환을 팔 때부터는 이것도 자주 먹었어요.”

 

도예종-신동숙 부부.png
도예종-신동숙 부부

 

이런 상황에 1967년 김배영 사건으로 도예종 선생은 또다시 체포되어 물고문과 심한 구타를 당한다.

 

“남편이 인혁당사건으로 1967년 만기 출소 후, 전처와의 관계를 사과하고 부친도 용서하여 저는 마음 추스르고 재결합하였습니다. 대구 수창초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자녀 계획을 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습니다. 

 

저 또한 이런 상황에서도 자랑은 아니지마는, 허탕하게 놀지 않았고 함부로 살지 않았습니다. 더욱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다 보니,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상사 선생님들로부터 신임을 받아 학대당하고 불이익은 받지 않았어요.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개화되어 있고, 생각이 옳은 분들이라 이해를 해주셨고 저에게 배려를 많이 해주셨기 때문에 그 충격 속에서 겨우 교편생활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혁당사건으로 수배된 김배영이 1967년 10월 남파 간첩으로 체포된 후, 남편은 일주일 넘게 어디론 가에 끌려가 물고문과 모진 구타를 당하고 와, 또다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저는 ‘형 받을 것 다 받고 나왔는데 왜 또 데려가냐’고 항변을 하고 사정도 하였지만, 그 충격과 제 기구한 운명에 얼마나 상심하였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에 김배영은 일본에 밀항한 후 북에 갔다가 간첩으로 1967년 내려오지만, 남편의 지시로 일본에 간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역사

해방정국(3): 냉전의 시작과 미소공동위원회의 파국

2025.08.15

교양

[서평] '지옥 국가'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교육혁명이 필요하다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2025.08.15

연재

신동숙(9)ㅡ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 중일전쟁의 발발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08.14

역사

역사의 증인을 찾아서 ㅡ 김성민 관장의 "731부대 범죄 증거 30년 추적기"

2025.08.13

교양

[책소개] "노동자의 삶과 꿈, 그 치열한 기록"

― <금형사상공 나의 삶 나의 꿈>(정갑득 지음, 도서출판 은빛)

2025.08.12

역사

해방정국 (2) 좌익의 신탁통치 혼선과 미국의 반공반탁 공작

2025.08.08

교양

[서평] '글로벌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지배의 법칙>

2025.08.05

역사

해방정국 (1): 루스벨트의 미·소 공동 세계관리와 신탁통치

2025.08.04

역사

부오나로티ㅡ프랑스대혁명과 마르크스를 연결한 귀족 출신 혁명가

: 마르크스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제3회)

2025.07.26

연재

신동숙(8)ㅡ 일본 강점에 맞선 의열투쟁과 항일무장투쟁 …회유 협박 그리고 사찰과 고문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