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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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없이 험한 산악지대를 무사히 행군할 수 있을까? 항해 지도 없이 넓디넓은 태평양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까? 20년 전에만 해도 종이 지도책을 들고 미로 같은 목적지를 너끈하게 자동차를 운전하며 찾아갔던 사람도 지금은 네비게이터 도움 없이는 운전대를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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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규범은 국제 무대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국제 무대가 격변하고 있다. 예전에 만든 지도, 즉 국제 규범이 낡은 휴지 조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낡은 지도를 대체할 최신 네비게이터는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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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것은 사라지는데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위기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람시의 정의에 따르면, 바로 국제 사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 국제 사회를 규율해 왔던 규범은 힘을 잃고 있는데 새로운 규범은 출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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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의 법칙-충돌하는 국제사회, 재편되는 힘의 질서>(21세기북스, 이재민 지음, 2024년 3월)는 국제 사회가 어떻게 격변하고 있으며, 격변하는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국제 규범을 잘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 형성에 참가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외교관 출신으로 국제 분쟁 분야 전문가인 이재민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가 이론과 실례를 잘 섞어가며 국제 규범의 중요성을 쉽게 알려준다.

 

지배의 법칙.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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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는 2차대전 이후 작동하던 국제규범이 파편화되었고, 미중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보여주듯이 지정학적 갈등이 더해지면서 그마저 완전히 조각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기후 위기,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의 대유행, 글로벌 공급망 해체 등 인류를 위협하는 문제가 속출하는 한편에서,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의 대두와 같은 문명사적 도전이 거세게 몰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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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는 이 책에서 국제 질서의 대 격변이 일어나는 분야로, ‘신냉전’, ‘디지털 경제’, ‘극지방과 우주 개발’, ‘지구 위기’를 꼽는다. 이 네 가지 영역은 과거의 규칙으로는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시 말해 미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영역에서 새로운 규범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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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미국·유럽연합 대 중국·러시아'로 편을 갈라 싸우는 신냉전을 다룬다. 이 교수는 신냉전이 2008년 코소보 전쟁에서 싹을 튼 뒤 시진핑 중국 주석이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신형 대국 관계'를 제기하면서 본격화했다고 말했다. 신냉전 시대는 다자간 협력을 핵심으로 하는 국제연합(UN)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약화 내지 무력화하고 있다. 또 그 뒷전에서 활발하게 새로운 규범을 쓰고, 이전 규범을 자신들에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 교수는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규범의 대결, 즉 법률 전쟁이 무기보다 강력하다"면서 "국제사회에 통용되는 규범에 대한 이해와 논의를 통해 국익을 좀 더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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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는 영토 시대와 사이버 시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국가 간 이해관계의 대립의 문제를 다룬다. 애플, 구글, 메타, 넷플릭스 등 거대 정보통신 기업들이 국경을 가로지르는 영업을 하면서 발생하는 세금 문제를 예시로 들어 우리의 일상 영역에서 이미 디지털 규범 전쟁이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3부에서는 호기심과 탐험의 영역이었던 우주와 극지방이 경제 영역으로 급속하게 들어오면서 각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쟁탈전을 다룬다. 우주와 극지방이 기술의 발달과 기후변화로 개발 가능한 신천지로 변화하면서 각국이 이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미래 국제 질서와 세계 경제의 승자가 이 영역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면서, 한국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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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4부에서는 지구 온난화와 코로나19 대유행이 국제정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하며 과거의 질서로는 더 이상 지금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다자주의 체제 해체, 국제화와 반 국제화의 공존, 신냉전의 도래, 국제분쟁의 증가와 동시에 온 지구 온난화와 코로나19사태로 세계는 비상사태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면서, 한국 역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이 파고를 넘어 계속해서 성장과 번영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변방의 작은 나라로 쪼그라들 것이지 앞으로 20~30년이 결정할 것"이라면서 "지금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바꾸는 국가적 전략의 수립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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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위기, 대격변, 대전환으로 불리는 요즘 시대를 진단하는 책은 무수하게 나왔지만, 이 책은 국제규범, 법률 전쟁이라는 틀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스포츠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자질도 필요하지만 규칙을 잘 아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듯이 이 책은 격변하는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고 번영하려면 국제 규범을 잘 이해하고 그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점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딱딱하기 쉬운 내용을 실생활의 사례를 들어가며 경쾌하고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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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한편에서는 트럼프 2기 정권과 함께 온 과거 규범 철저 무시의 무법천지 국제 상황을 보면서 규범을 얘기하는 것이 가려운데 구두 밑창을 긁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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