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8.14
중릴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png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사건이 발생한  장소.

 

" 일제 조선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었다면,  박정희 군부독재는 한국 전체가 하나의 감옥"

 

1931년 9·18 사변 ‘만주사변’ 당시 중국 동북의 주인인 봉천 군벌 장쉐량(張學良, 1901~2001)은 일본군이 아무리 도발하려 해도 은인자중하며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미 일본 관동군의 도발 음모는 3개월 전 6월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郎) 사건과 7월 완바오산(萬寶山) 사건으로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동북 지역은 긴장 상태였다. (참조 : 신동숙(4회) 독일 파시즘과 일제 군국주의의 대두, 울산함성 2025/3/27,

http://www.ulham.net/culture/30604?category=8628)

 

특히 완바오산 사건은 인명 피해도 없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침략 구실을 호시탐탐 찾고 있던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선 이민자들과 중국 농민을 충돌시켜 분쟁을 일으켰다. 

 

이후 관동군은 중국의 무대응을 간파하고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여기에 난징정부를 이끌던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항전보다는 중국공산당 홍군 토벌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장제스는 ‘만주사변’의 대응책이라고 내놓는 것이, 항일투쟁보다 겨우 국제연맹에 9월 21일 정식으로 제소하는 것뿐이었다. 마침 중국은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 국제연맹 비상임이사국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관동군의 군사 침략은 그칠 줄 몰랐다. 일제는 ‘만주사변’ 발발 이후 약 4개월 반 만에 동북 3성을 강점한다. 그리고 마지막 청의 황제 ‘푸이(溥儀, 1906~1967)’를 내세워,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을 1932년 3월 1일 건국 선언을 한다. 그리고 일제는 3월에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이후 일제는 화베이(華北)를 넘보면서 전 중국을 병탄(倂呑)하려 한다.

 

그러나 항일전쟁에 나서야 하는 장제스와 국민당군은 오히려 ‘우선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외부의 우환인 일본 문제에 대응하자(安內攘外)’라는 인민에 반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중국공산당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ㅡ 마오의 「후난 농민운동 시찰보고」와 “장시 소비에트 공화국” 그리고 홍군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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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의 요람 정강산 근거지

 

1925년 중화민국 국부인 쑨원(孫文, 1866~1925)의 죽음은 국민당 내의 좌·우 노선투쟁을 격화시킨다. 그리고 국민당의 실권은 부르주아들과 지주의 지원을 받는 장제스가 장악한다. 우파의 우두머리 장제스는 국민당 군대의 지휘권을 이용하여 우익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을 장악한다.

 

이후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에서 공산당원들과 노동운동 세력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이로 인해 1924년 쑨원 때 맺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제1차 국공합작(第一次國共合作)은 붕괴하고, 심각한 내전 상황에 돌입하게 된다.

 

또한 장제스는 1929년과 1930년에 산시(山西)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군벌인 옌시산(閻錫山, 1883~1960) 등 반장제스 세력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화난(華南) 농촌 일대에 세력을 확장한 공산당 세력에 대한 소탕전도 전개한다. 이 농촌 지역은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건설한 공산당 근거지였다.

 

마오가 태어난 후난성(湖南省)과 장시성(江西省)을 비롯한 남부의 곡창지대는 1925년부터 1927년 사이에 농민반란이 활발했다. 마오는 이런 농민반란의 강한 영향으로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1927년 마오는 후난 농민운동의 현황에 대한 보고와 이에 대한 평가인 「후난 농민운동 시찰보고」를 작성해 공산당 중앙에 공식적으로 제출한다. 마오의 보고서는 중국의 농민을 부농 중농 빈농으로 나누고, 특히 빈농은 교육이나 정치 지도를 받지 않아도 자생적으로 혁명적 역량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오는 농민혁명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당시 코민테른이나 중국공산당의 공식 노선과는 차이가 있었다.

 

마오는 근거지였던 후난 지방에서 1927년 추수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남은 동지 1,000여 명을 이끌고 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간다. 마오의 정강산 입산은 이후 중국공산당 재건의 기반이 되는 강서(江西) 소비에트의 출발점이자, 홍군의 탄생지로 “중국 혁명의 요람”이 된다. 1928년 5월에 또 다른 홍군 사령관 주더(朱德, 1886~1976)의 부대가 이곳으로 도착하여, 마오의 부대와 합류하여 마침내 홍군 제4군이 창설된다. 그리고 정강산에 들어간 지 4년 뒤인 1931년, 무려 인구가 300만 명이 되는 해방구를 건설하는데 바로 “장시 소비에트 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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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산 근거지의 마오쩌동 동상

 

그러자 장제스는 1930년부터 1934년까지 4차례 걸쳐 홍군 토벌을 위해 100만의 병력과 비행기 그리고 전차까지 동원하지만, 홍군은 게릴라 전술을 펴면서 항전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제5차 토벌 작전으로 공산당은 결국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된다.

 

ㅡ 대장정(大長征)과 “준의 회의” 그리고 “연안 정신” 

 

1934년 10월 중국공산당은 중앙근거지인 장시성 루이진(瑞金)을 포기하고, 8만여 명의 홍군은 광시(廣西), 후난성을 거쳐 서쪽으로 대장정을 한다. 구이저우성(貴州省) 준의(遵義)에서 1935년 1월 공산당은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 회의(준의 회의)를 개최하고, 대다수 참석자는 처음으로 마오의 공산당 영도(領導)를 결정한다. 마오는 당 지도부의 군사적 실책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북상항일(北上抗日)의 기치로 공산당의 임무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인민 활동과 인민 조직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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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의 전환점을 마련한 준이회의(회화)

 

이후 공산당은 무려 1년여 동안 영웅적 루딩교(瀘定橋) 전투 등 숱한 전설적 전투를 국민당과 벌이며, 기근과 혹독한 기후를 극복하고 1935년 10월 산시성 연안에 대장정을 끝내고 근거지를 구축한다. 대장정은 무려 11개의 성을 지나면서 18개의 산과 숱한 강을 건넜다. 그리고 하루 평균 1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368일간 1만 2,500㎞를 이동했다. 

 

대장정 도중 전투에서 죽은 사람 보다 굶어 죽은 사람, 얼어 죽은 사람, 빙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식량이 없으니까 구두로 삶아 먹고 혁대도 삶아 먹는다. 나중에는 그냥 앞서간 동료의 배설물을 물로 헹군 뒤 소화 안 되고 남은 곡물을 먹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 과정에서 당과 군사 지도자들은 일반 병사와 똑같이 생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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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회의가 열린 건물

 

그러나 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홍군의 철칙은 절대로 인민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약탈하지도 않았다. 이런 대(對) 인민 활동으로 홍군이 지나온 곳마다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뿌리를 내렸다. 바로 이것이 나중에 중국공산당이 인민의 절대적 신뢰를 얻어 일제를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토대가 된다. 또한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정신적 자산으로, 대장정에서 함께 한 동지들이 가진 정서와 엄격한 규율 그리고 인민과의 연대 의식은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원천이 된다. 

 

이후 공산당은 1936년부터 연안을 중심으로 공산당 재건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때를 “연안 시대”라 한다. 이때부터 마오주의가 “연안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고 중국공산당의 지배적인 노선이 된다. 연안 시대 특징은 민족주의적 경향 외에 중요한 특징은 대중노선이었다. 대중노선은 단순히 대중에게 영합하자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자발적인 혁명 역량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노선으로, 인민이 당 지도자나 당 관료와 지식인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당 관료는 대중에게 배워야 하고, 당 관료의 특권이나 지도적 지위는 부정된다. 마오의 대중노선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 지식의 차이에 따른 사회적 위계 형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특히 “연안 정신”은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위계와 분할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시즘 국제 통일전선”을 결의하자, 중국공산당은 “항일 8·1선언”을 통해 내전 정지와 일치항일(一致抗日)을 호소했다. 이후 1936년 12월 관동군에 의해 폭살당한 장쭤린(張作霖, 1875~1928))의 아들 장쉐량이 “서안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는 마지못해 제2차 국공합작을 합의하면서 내전은 정지된다. 

 

ㅡ 중일전쟁의 발발과 난징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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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장면

 

1937년 7월 7일 밤, 베이팡(北平, 현재 베이징)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군사훈련 중에 병사 한 명이 ‘실종’됐다는 것을 빌미로 완평 성에 들어가 수색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 측이 이를 거절하자 일본군은 완평 성 서쪽에 있는 류거오차오(蘆溝橋)를 공격했고 이에 중국 주둔군 제29군이 반격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중·일전쟁’의 발발은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급기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실로 중국 침략전쟁을 정당화했다.

 

‘류거오차오 사건’ 후, 일본은 파죽지세로 중국 중원 지역을 침략해 들어간다.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三光)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일본은 1937년 7월 베이징을 점령하고 12월에는 난징을 점령해 ‘난징대학살’을 일으킨다.

 

강준만은 『한국 근대사 산책 8권: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인물과사상사, 2008)에서 일제의 ‘난징대학살’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다.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 5만여 명은 다음 해 1월까지 40여 일간 무기를 들지 않은 일반 시민을 상대로 광란의 학살극을 연출했다. 무려 30만 명이 살해됐다. 총살, 난자, 생매장, 불태워 죽이기 등 살해 수법도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던 바, 중국인은 이를 대도살(大屠殺)이라고 불렀다.

 

에드가 스노(Edgar Parks Snow, 1905~1975)는 ‘적어도 여자라면 10세부터 70세까지 모두 강간당했다. 피난민은 만취한 병사에 의해 종종 총검으로 살해되었다. 대낮에 벌어지는 성폭행도 낯선 일이 아니었다’고 썼다.

 

중국계 미국인 여성 아이리스 장(Iris Shun-Ru Chang)이 쓴 『난징의 강간: 2차 대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에는 일본군의 대도살을 고발하는 목격자의 증언, 사진과 기록이 수두룩하다. 일본군은 비무장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목 베기 경쟁을 벌이고 신병들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 중국인을 총검술 표적으로 삼았다. 산 채로 매장하기와 불태우기 같은 인종청소가 벌어지기도 했다. 여성 2만 명 이상이 강간 살해당했고, 능욕한 여성의 외설 사진을 찍어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다니다 패전 후 포로가 되면서 압류당한 병사들도 있다.”

 

난징대학살. 뒷면의 일본군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png.jpg
난징대학살 한 장면. 뒷면의 일본군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1938년 8월 13일, 상하이 일본 주둔군은 ‘류거오차오 사건’에 이어 ‘홍차오 사건’을 일으켜 중국 침략을 본격화한다. 일본군은 처음에는 베이징, 톈진 등 파격 지세로 진격했지만, 광범위하고 집요한 민족 저항이 계속된다. 결국 일본의 지배는 주요 도시지역(점)과 선(철도)을 점령하는 데 그치고, 농촌에서는 항일 빨치산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전선은 대치 교착상태에 빠진다.

 

ㅡ 조선 전체가 하나의 감옥, 치안유지법 제정과 공안 통치기구 증설

 

일제는 1920년대 말 조선을 만주 등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막고 철저히 식민지화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사상범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1925년 5월 12일 법률 제46호로 발효한다. 물론 구실은 일본처럼 국체(國體)와 천황제를 반대하거나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을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치안유지법.png
치안유지법

 

조국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책세상, 2001)에서 일제의 ‘치안유지법’ 개정에 관해 설명했다.

 

“1928년 여름부터 6개의 독립수비대와 사상탄압을 전문으로 하는 ‘고등계 경찰’을 설치하고, 각 재판소에 ‘사상검사’를 배치한다.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 ‘사상국난(思想國難)’의 구호 아래 대대적으로 좌파 인사들을 탄압하면서, 1928년 6월 29일 칙령 제129호로 반제운동세력에 사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치안유지법이 개정하고, 1931년 3월 27일에는 사법차관 통첩 제270호에 의해 사상전향제도를 정식으로 도입한다.”

 

1930년 신동숙이 태어난 당시의 조선 총독은 5대 사이토 마고토(齋藤 實, 1929.08.17.~ 1931.06.16., 3대 : 1919.08.12.~ 1927.04.04.)였다.

 

사이토는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전환하는 등 형식상 ‘문화통치’를 하였지만, 실제로는 감시와 탄압하면서 경찰과 헌병 그리고 감옥 등 공안통치기구를 더욱 증설했다.

 

공산주의 운동가인 안광천(1897~?)은 1929년에 쓴 「조선(朝鮮)의 정세(情勢)와 조선공산주의자(朝鮮共産主義者)의 당면임무(當面任務)」라는 글에서 “조선 전체가 하나의 감옥같이 되어 있다”라고 했다. 그 일부이다.

 

“13개소의 경찰부, 251개소의 경찰서, 기타 수천 개소의 경찰기관, 26개소의 감옥 및 그 지소(支所), 그리고 헌병대 등에 의하여 조선인의 정치적 생활은 완전히 질식되고, 각 방면의 전투적 민중 및 지도자는 박해·구타·심문·고문·투옥·치사·사형당한다. 조선 전체가 하나의 감옥같이 되어 있다. 

 

조선 혁명가에게 적용되는 치안유지법, 폭발물취체법, 제령7호, 보안법, 출판법 등이 유례없는 악법인 것은 물론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들 법률의 적용조차 형식에 불과하다.

 

그들은 혁명분자를 발견하는 대로 ‘인식검거(認識檢擧)’라 하여 무조건 체포하며, 경찰범죄 처벌규칙 혹은 기타를 적용하여 얼마든지 구류하여 두며, 심문이라는 명목으로 임의로 학살하며, 예심이라는 명목으로 몇 년이라도 감옥에 가두어둔다.”

 

일제의 악명높은 식민공안 통치수법 그대로 숭일(崇日) 친미 박정희가 한국을 18년 동안 군부 통치한다. 

 

ㅡ 박정희 군부독재, 한국 전체가 하나의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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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사독재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1945년 연합군사령부의 ‘인권지령’으로 폐기된 ‘치안유지법’을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으로 부활시킨다. 

 

이승만과 친일 친미 사대세력은 1948년 단독정부 수립 이후 미국의 압박과 여순항쟁을 구실로 1948년 12월 1일 임시조치법으로 ‘국가보안법’을 급히 제정한다. 반민족행위자 처벌 정국을 반공 정국으로 바꾸기 위해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악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임시조치법 ‘국가보안법’은 올해로 76년이고, 원법인 식민지 악법인 ‘치안유지법’은 100년이 된다.

 

그리고 이승만은 일제 공안기구인 특별고등경찰(특고) 출신 경찰과 특무대를 이용하여 장기집권한다. 특무대는 이후 중앙정보부, 안기부, 국정원으로 변신하지만 이러한 공안 통치기구의 배후는 미국이다.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돌베개, 2007)에 나오는 특별고등경찰(특고) 설명이다.

 

“1911년 정치운동을 담당하던 도쿄 경시청 고등과에서 사회운동을 전담하는 특별고등과가 분리·독립하면서 생겨나 내무성의 직접 지휘를 받았으며, 1928년 전국으로 확대 설치되었다. 육군성 소속의 헌병대, 참모본부 휘하의 특무부대와 함께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탄압하고 정치활동과 언론 및 출판의 자유를 감시하며 이른바 ‘불온사상’을 단속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불령선인’으로 불린 조선의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를 가혹하게 탄압해 악명이 높았다.

 

조선인 특별고등경찰로는 독립운동가를 잔인하게 고문해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던 ‘친일경찰의 대명사’ 노덕술과 이승만 정권 때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이익흥 등 있다. 

 

패전 후 1945년 10월 4일 연합군사령부의 ‘인권지령’으로 치안유지법과 함께 폐기되었다. 이때 약 5,000명의 특별고등경찰이 파면되었으나, 1950년대 이후 상당수 간부들이 정부 요직에 복직되었다.”

 

4·19혁명으로 하와이로 도망간 이승만의 뒤를 이어, 5·16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치 사상통제의 핵심 도구로 이용했다. 

 

또한 일제의 주구 친일 경찰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단독정부에서 살아남아, 비열하고 집요한 사찰과 악질적인 고문은 박정희 정권에서 더욱 잔악해진다. 마치 일제 강점 때 “조선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었다면,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은 “한국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었다. 

 

ㅡ 신동숙의 동생 신동주의 사찰 미행 협박 고문 사례

 

필자는 4·9통일열사 도예종 선생의 아내 신동숙 가족 몇 분의 진술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신동숙의 동생 신동주(1938년 생) 진술서 일부이다.

 

”1964년 4월 20일 경 본인 하숙집에 대공 분실 직원과 정보 형사 5명이 체포영장도 없이 저의 하숙방에 들어 닫쳐 장서, 서랍, 옷장 등을 막 뒤지고 ‘도예종이 매형이냐’고 하면서 ‘도예종이 서울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여기 처남 집에 찾아올지 모르니까 회사 출근하지 말고 자기들과 같이 지내자’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사 2명은 저하고 하숙방에 있으면서 책, 가방, 편지, 서류 등을 닥치는 대로 뒤지고 다른 2명은 문밖에서 기다리면서 저를 찾아오는 직원이나 대학 동기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를 심문하면서 접촉을 못 하게 방해하였습니다. 거의 5개월을 하숙집에 감금당하면서 외출할 때는 형사들이 항상 미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천 대공분실 정보과에 하루가 멀다 하고 끌려가 도예종의 행방과 도피처 그리고 도피 자금 제공 등을 추궁하며 주먹으로 폭행하고 갖은 악랄한 고문과 협박을 당하였습니다. 한번 끌려가 구타를 당하고 오는 날이면 몸은 파김치가 되고 온 몸이 고문 흔적으로 참아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서울 홍제동 대공분실. 민가로 위장하고 있다.png
서울 홍제동 대공분실. 민가로 위장하고 있다.

 

지금도 고문에 의하여 어깨, 허리 등 통증이 있어서 진통제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1차 인혁당 사건 이후에도 빨갱이 집안이라고 사회 진출을 박탈당하였습니다. 다행히 운전면허가 있어 대구 신세계 택시 운전을 하는데도 정보 형사들이 찾아와 영업장에 항상 대기하며 영업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가친척과 심지어 형제같이 친하던 고교 동창, 대학 동창까지 빨갱이 집안이라고 외면을 받아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매형 도예종씨가 또 어떤 사건에 관련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도예종씨 행방과 도피처 그리고 도피자금 제공 등을 대라면서 협박하였습니다. 그래서 매형 도예종이 수배되는 동안은 취업은 고사하고 이러한 협박과 감시, 사찰로 생활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대구 반야월에서 먹기 살기 위하여 양계를 할 때도 형사들이 저 뿐만 아니라 어머님도 미행하였습니다. 대구 큰 누나 집에서 어머님이 저녁에 반야월로 오실 때 정보원이 미행하여 어머님이 놀라 졸도하는 등 수 차례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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