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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닫힌 문 뒤의 정당화: '내부 기밀 누출'이라는 징계의 명분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지부가 최근 해고 징계를 둘러싼 논란과 농성 사태에 대해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간의 침묵을 깨고 내놓은 해명에서 서울지부는 자신들이 내린 해고 처분의 정당성을 강변하며, 그 핵심 사유로 ‘3년에 걸친 조직 기밀자료의 광범위한 외부 유출’을 꼽았다. 함계남 동지가 시간외수당 청구 등 자신의 정당한 노동권 보호와 권리구제를 증명하기 위해 지부 운영위원회 회의록을 포함한 내부 자료를 노동청과 법원에 제출한 행위를 두고 ‘조직의 근간을 흔드는 기밀 유출’이자 ‘반조직적 비위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대단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노동조합의 회의록을 포함한 내부 정보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어떠한 정보가 '비밀'로 부쳐져야 하며, 무엇이 전체 조합원과 대중 앞에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는가? 노동조합의 정보 공개 범위와 투명성은 단순한 행정적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운동이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깊이와 직결된 핵심 쟁점이다.
2. 레닌의 <일보 전진, 이보 후퇴>: 비밀경찰의 탄압 속에서도 왜 투명성을 고집했는가?
노동운동 역사에서 내부 논쟁과 회의 과정의 공개 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치열하고 극명한 교훈을 남긴 사례는 V. I. 레닌의 대표적 저작인 《일보 전진, 이보 후퇴》(1904)일 것이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 이후 당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심각하게 분열했다. 레닌은 당 분열의 진짜 원인과 내부의 정파적 기회주의를 밝히기 위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당대회 보고서이자 분석서인 이 책을 써냈다. 이 글에서 레닌은 당대회 현장의 상황을 가감 없이 대중 앞에 폭로했다. 누가 어떤 안건에 대해 어떤 발언과 주장을 했는지(당시 엄혹한 조건 때문에 가명을 사용하긴 했으나), 어떠한 분파적 이해관계로 표결이 나뉘었는지, 심지어 회의 쉬는 시간 복도에서 나누었던 세력 간의 밀담과 거래 내용, 그리고 회의장의 험악한 분위기와 고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극히 상세하게 기록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이 문건은 곧바로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어 전파되었다.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당초 이 글이 작성되고 유포되던 시기의 역사적 조건이다. 당시 러시아는 짜르 체제의 가혹한 전제정치 하에 있었다. 혁명가들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이 자행되었고, 짜르의 비밀경찰(오흐라나)은 지하 조직망을 적발하고 혁명가들을 체포·유배 보내기 위해 미친 듯이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당연히 당 내부의 일부 동지들은 레닌을 향해 거세게 비난을 퍼부었다. "당의 내부 분열과 은밀한 회의 내용까지 밖으로 노출하는 것은 적(짜르 비밀경찰)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는 주장이었다. 오늘날 서울지부가 함계남 동지를 향해 "사측과 공권력에 조직의 전략과 내부 정보를 넘겼다"고 비난하는 논리와 놀라울 정도로 판박이다.
그러나 레닌은 이러한 비난에 타협하지 않고 대중 공개를 강력히 고집했다. 레닌의 확고한 신념은 명확했다. 당을 지지하는 선진 노동자들과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의 '알 권리'야말로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혁명의 이익이라는 판단이었다.
누가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이익을 대변하고 있으며, 누가 말로만 혁명을 외치며 타협하는 기회주의자인가? 당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도대체 어떠한 정파적 이해관계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구체적 경과는 어떠한가? 이러한 사실을 노동자 대중에게 숨김없이 알리고, 대중 스스로가 보고 판단하도록 만드는 것만이 혁명적 노동운동을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레닌의 확신이었다. 비공개로 음험하게 이루어지는 정파적 공작을 햇빛 아래 드러내는 이점이, 짜르 비밀경찰이 이 문건에서 얻게 될 약간의 조직 정보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크다는 논리였다. 레닌은 이후에도 《이스크라》와 《프라우다》 등 당 기관지를 통해 당내 사정과 논의 과정을 가능한 한 가장 상세하게 알리는 기풍을 이어나갔다.
3. '합법 대중조직' 노조의 비밀주의: 금속노조의 사례가 보여주는 경종
백여 년 전 지하 비밀 혁명조직조차 대중적 검증과 투명성을 위해 내부 사정을 솔직하게 공개했거늘, 오늘날 한국의 합법적 대중조직인 노동조합, 그것도 산별노조의 중간·하부 단위에 불과한 서울지부 운영위원회 회의록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비밀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길래 이토록 꽁꽁 싸매고 유출을 구실로 해고까지 감행한단 말인가?
기껏해야 지부 운영과 사업 보고, 집회 참석 및 조합원 동원, 일상적인 노무관리나 투쟁 일정 논의 등이 담긴 대중조직의 회의록일 뿐이다. 오히려 대중적 노동조합이라면 대표자와 간부들이 조합원들의 피땀 어린 조합비와 위임받은 권한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회의에서 어떤 논의를 거쳐 결정을 내리는지를 조합원들에게 가급적 상세하게 공개하고 알려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적 노조 운영의 기본이다.
실제로 노동운동 현장의 사례를 보라.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의 경우 최고 집행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중집) 회의록을 비롯한 주요 회의 결과를 정기적으로 자체 홈페이지에 게시하여, 조합원이라면 누구라도 로그인하여 열람할 수 있도록 엄격히 시스템화해 두고 있다.
이러한 회의록과 내부 논의 과정의 공개가 있었기에, 노조의 관료화와 한계를 날카롭게 파헤친 《금속노조 진단과 개혁 방향―지금은 금속노조 전면 개혁이 필요한 때!》(김남수·김정호 공저, 개미뉴스 연재, 2021년)와 같은 진정성 있는 노동운동 비판 문건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정직한 기록과 분석은 당시 적지 않은 금속노조 상근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에게 깊은 성찰과 자선의 기회를 제공했고, 노조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자산이 되었다. 회의록 공개는 조직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료적 매너리즘을 견제하고 조직을 경신하는 건강한 동력인 것이다.
4. 맺으며: 폐쇄성을 깨뜨려야 정파 관료주의를 청산할 수 있다
금속노조 등의 정기적인 회의록 공개 기풍에 비추어 볼 때, 의료연대 서울지부를 포함한 공공운수노조 전반의 조직문화는 대단히 폐쇄적이고 낙후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보를 독점하고 내부 논의 과정을 은폐하는 밀실주의는 필수적으로 관료주의와 정파주의를 불러온다. 상급노조와 지부의 간부들이 무엇을 논의하고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리는지 조합원들이 알 수 없을 때, 노동조합은 전체 조합원의 투쟁 기구가 아니라 소수 정파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보직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게 된다. 비밀주의야말로 갖가지 비리와 패거리 정치가 뿌리 내리는 최적의 온상이다.
의료연대 서울지부는 벼랑 끝에 몰린 채용 상근자가 자신의 정당한 노동권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할 수밖에 없었던 자료를 두고 '기밀 유출'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시도를 즉시 중단해야 한다. 억압적인 징계와 해고로 입을 막으려 할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을 계기 삼아 내부 회의자료와 지부 운영 현황을 전체 조합원에게 정정당당하게 전면 공개하는 투명한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알 권리의 보장과 정보 공개의 기풍이 공공운수노조 전체로 확산되어야만 한다. 햇빛이야말로 최고의 소독제다. 회의록을 공개하고 조직 운영을 대중 앞에 투명하게 바꿀 때 비로소 소수 정파 집단이 20여만 조합원의 공공운수노조를 사유화하고 좌지우지해 온 오랜 관료주의적 관행을 비로소 청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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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길성 (노동운동가)
2026.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