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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대학교의 명예 역사 교수인 필립 M. H. 벨은 『12 전환점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까치, 2012)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크게 2개의 시기로 나누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크게 보아 2개의 분명한 시기로 구분된다. 하나는 1939년부터 1942년 후반까지 추축국이 초반의 승리를 거두던 시기이고, 또 하나는 1942년 후반부터 1945년까지 대연합세력이 승리한 시기이다.
앞의 시기에 독일과 일본은 경제적으로 우월한 나라들을 상대로 충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기습과 속도, 전투력으로 최종적 승리 직전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추축국은 최종 승리를 움켜쥐는 데는 실패했고, 전쟁의 후반기에 연합국은 먼저 전투태세를 정비한 후에 그들의 엄청난 자원을 투입해서 압도적인 효과를 발생시켰다. 생산과 자원의 전투의 전환점은 이 두 시기 사이, 그러니까 1942년 말과 1943년 초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필립 M. H. 벨이 구분한 대로 1942년 말부터 1943년 초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가 추축국(독일·이탈리아·일본)에서 연합국(미국·영국·소련 등)으로 완전히 뒤바뀐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주요 전투의 패배로 추축국의 확장세가 멈추고 방어 태세로 전환된다.
핵심 전환점 주요 사건은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년 11월 ~ 1943년 2월)의 승리였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을 포위 섬멸하며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왔다. 이는 독일군의 첫 대규모 패배로, 전쟁 전체의 향방을 가른 가장 결정적인 전투였다.
동부전선,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
필립 M. H. 벨은 『12 전환점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동부전선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에 대한 여러 신문 기사를 인용했다.
“‘… … 진짜 유럽이 아시아의 황야로 사라지는 변방인 이곳에서 전 러시아의 피 흘리는 강력한 심장이 된 몇 개의 정규 경비사단과 이 지역의 지방경비대가 대륙 문명,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아마도 우리 영국을 구원했다.’ 건전한 보수당계 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래프」지의 1943년 1월 18일자 스탈린그라드발 기사는 이렇게 공표했다.
3주일 후, 역시 건전한 노동당계 신문인 「데일리 헤럴드」지가 ‘전 세계의 어린이들은 앞으로 몇백 년 동안 스탈린그라드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기사를 실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모스크바 주재 터키 영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독일인들이 그들의 삶의 공간이라고 점찍었던 땅이 그들의 죽음의 공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중략)
동부전선에서의 다른 전투 – 예를 들면 1941년의 모스크바 전투나 1943년의 쿠르스크 전 - 도 똑같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전투는 없었다.”
독소전쟁에서 수세에 몰렸던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앞의 저서에서 필립 M. H. 벨은 독일군과 동맹군의 끔찍한 전쟁 패배내용을 기록했다.
“1942년 11월 제6군이 고립된 이후로 전사한 독일군의 수는 6만에서 10만 사이일 것으로 추산된다. 남은 독일군이 항복하던 날, 「데일리 헤럴드」의 종군기자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독일군이 당한 역사상 가장 큰 패배였다.’ 그로부터 약 60년 후, 역사가 에반 모즐리는 ‘그 재난은 독일군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판정했다. 기자들과 역사가들이 보는 시각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와 같은 거의 동일한 판단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다.
이 엄청난 패배는 독일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전투에서 전사한 독일군과 그 동맹국 군인의 수는 50만 명에 달했다. 이 엄청난 손실은 괴벨스의 선전기계도 감출 수 없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대개 부상을 입고 동상이나 병에 시달리는 이들의 이야기 또한 막을 수가 없었다. 전선에서 보내오는 편지들 또한 똑같이 끔찍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런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이후 독소전쟁 승리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1년 6월 30일부터 1945년 9월 4일까지 기존의 정부 기구 대신 스탈린 중심의 국가방위위원회가 전권을 행사하는 '전시 내각' 덕분이었다.
소련의 국가방위위원회와 전쟁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
1941년 6월 22일 소련은 독일의 침공 직후, 전쟁 수행과 관련된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국가방위위원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митет обороны, GKO)를 운영한다. 국가방위위원회는 소련 내에서 군사, 정치, 경제적 권력을 모두 행사하는 가장 강력한 기구였다. 스탈린이 의장을 맡아 운영했고, 전쟁 기간 중 공장 시설을 동쪽으로 이전하거나 생산을 국방 위주로 전환하는 등의 전시 비상조치를 취했다.
현대 러시아와 소련 역사를 연구한 호주의 역사학자인 실라 피츠패트릭은 『아주 짧은 소련사』(롤러코스터, 2023년)에서 소련의 국가방위위원회에 대해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소련은 새로 만들어진 국방위원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운영위원회의 운영국은 스탈린, 몰로토프, 베리야(보안기관 책임자), 두 명의 신임 정치국 후보위원인 미코얀과 게오르기 말렌코프로 이루어졌다.
국방위원회 내의 비공식적인 업무 배정에 따라 스탈린은 군사 업무 최고 책임자였고, 나머지 업무 조직은 전시 경제 운영에 집중했다. 전쟁 경제의 성과는 전반적으로 탁월한 것으로 평가된다.
스탈린은 직접적인 군사 지휘 경험이 없었지만 자신을 전문가로 여기고 – 내전 시기 그는 적군의 정치 담당 지도자였다 – 전쟁 수행에 대해 강력하고 실제적인 관심을 보였다.
(중략)
스탈린은 국내에서는 특이할 정도로 합의제 방식으로 일했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을 주었다. 이전에 다른 세계 지도자들과 개인적으로 만난 적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던 그는 전시 동맹국 지도자인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좋은 업무 관계를 맺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이전에 동맹국에서 악마로 취급받았던 소련 지도자의 이미지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자비로운 ‘아저씨’로 바뀌었다. 소련 여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자 – 소련 정부에 의해 조율된 것처럼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 동맹국들, 특히 미국과 루스벨트로부터 인기를 얻었다(영국인들은 영국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야 한다는 처칠의 주장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전에 스탈린을 극도로 경계하고 악마화했다. 그러나 소련이 나치 독일과 싸우는 핵심 동맹국이 되자, 미국은 참전을 독려하고 연대를 과시하기 위해 스탈린의 이미지를 친근한 이웃집 ‘조 아저씨(Uncle Joe)’로 포장했다. 파이프 담배는 부유층이 즐기는 시가에 비해 훨씬 서민적이고 사색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국제무대 공식 석상과 초상화에 파이프를 든 소비에트 연방 최고지도자 스탈린의 모습은 권위적인 지도자보다는 국가와 인민을 보살피는 자비롭고 친근한 서기장의 모습이었다.
파시즘보다도 볼셰비키 혁명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한 영국과 미국
강철 인간 스탈린은 1924년 스베르들로프 대학교에서 행한 9개의 강연을 모아 만든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제국주의 세계 전선에 대항하는 통일된 세계혁명 전선에서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동방의 식민지혁명 사이의 결합은 필연적이다”라고 ‘세계혁명 전략’을 설명했다.
스탈린의 ‘세계혁명 전략’은 영국과 미국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보다도 볼셰비키 혁명과 스탈린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강준만은 『미국사산책 6: 대공황과 뉴딜혁명』(인물과사상사, 2010)에서 영국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1869~1940) 수상이 1938년 9월 30일 뮌헨협정을 체결한 것은 유화 정책으로 독일을 공산주의 소련에 대항하는 유용한 억제력으로 이용하였다고 보았다.
“역사가 레이몽 손타그(Raymond J. Sontag, 1897~1972)의 해석에 따르면 ‘독일이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됨에 따라 식민지를 확보한 국가로서 평등을 확보한다면, 또 독일이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독일계가 불공정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된다면, 상대하기 어려운 이웃인 독일의 신경질적이고 흥분된 감정은 가라앉게 될 것이다. 더욱이 진정된 독일은 공산주의 소련에 대한 유용한 억제력을 가진 국가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강준만은 앞의 저서에서 루스벨트 대통령도 파시즘보다 러시아 혁명처럼 자본주의에 불만을 품은 미국 민중이 사회주의혁명을 시도할 것을 경계했다.
“무솔리니를 ‘훌륭한 이탈리아 신사’라고 묘사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9년 이탈리아 파시즘을 칭찬하면서 히틀러가 파시즘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했지만, 무솔리니 파시즘과 히틀러 파시즘을 애써 구분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1937년 미 국무부의 유럽국은 무솔리니건 히틀러건 파시즘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인즉슨 ‘불만을 품은 대중이 러시아 혁명의 사례를 따라 좌경화’할 우려 때문이었다.”
강준만은 앞의 저서에서 처칠은 한술 더 떠 레닌에 대한 경계심으로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썼다.
“처칠은 전쟁 전의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는 1926년 이탈리아 방문 중 무솔리니에게 ‘내가 이탈리아인이었다면 레닌에 대한 광적인 태도와 열정에 반대하는 투쟁에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과 함께했을 것이오’라고 말했고, 1933년엔 무솔리니를 ‘로마의 천재이자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입법가’로 묘사했다.
또 처칠은 1935년 히틀러에게 쓴 글에서 ‘길을 가로막는 모든 권위와 저항에 도전하고, 반항하고, 화해하고, 극복하는 용기·인내·추진력에 찬사를 보낸다’고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평가
국제무대에서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로 그동안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악마’에서 ‘아저씨’로 바뀌었다. 하지만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 많다.
특히 스탈린이 2차 세계대전의 대연합에서 수행한 역할, 즉 군사 지도자로서 평화 중재자로서 처칠, 루스벨트, 트루먼과의 외교적 전투와 정치적 전투를 어떻게 치렀는지, 세계대전 후 왜 이 연합이 붕괴했는지에 대해 다룬 저서는 별로 없다.
다행히 스탈린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소련 군사 및 외교 정책의 역사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인 제프리 로버츠는 『스탈린의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의 서문에서 스탈린 평판에 대해 균형 있게 정리했다.
“20세기 독재자들의 만신전(萬神殿)에서 잔혹 행위와 범죄 행위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악명에 버금가는 인물은 아돌프 히틀러뿐이다.
하지만 1953년 3월 스탈린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군중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소련 전역에서는 수많은 일반인이 비통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국장을 치르는 동안 당 지도자들은 대량 학살자가 아니라 성자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세상을 떠난 수령을 칭송하기 위해 줄지어 순서를 기다렸다.
<스탈린이라는 불멸의 이름은 우리 가슴속에, 소련 인민과 모든 진보적 인간의 가슴속에 언제나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소련 외무 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주장했다. <우리 인민과 전 세계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행복을 증진하는 데 스탈린이 거둔 위업의 명성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스탈린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그의 개인 숭배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절정에 달했다. 숭배의 신화에 따르면, 스탈린은 소련의 위대한 조타수, 자신의 나라에 전시에는 승리를, 평시에는 초강대국 지위를 가져다준 정치 천재였을 뿐 아니라 <민족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구호가 보여주듯이 스탈린은 <오늘날의 레닌>이었고 이에 어울리게 스탈린의 시신은 붉은 광장에 있는 소비에트 국가 창건자의 영묘에 그와 나란히 안치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평판은 소련에서 곧바로 공격받기 시작했다. 겨우 3년 뒤인 1965년 2월 새 소련 지도자 흐루쇼프는 개인 숭배를 공산주의 원리의 왜곡이라고 비난했다. 또 스탈린을 동지들을 처형하고 많은 군사령관을 살해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라를 연이어 재앙에 빠뜨린 전제 군주로 묘사했다.”
냉전시대 스탈린의 ‘대테러(Great Terror)’ 논쟁
스탈린에 대한 대표적인 부정적 평가는 ‘대테러(Great Terror)’였다.
철학자 한형식은 『맑스주의 역사 강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에서 아시아 공산주의까지』 (그린비, 2010)에서 스탈린의 ‘대테러’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했다.
“냉전 시대에는 테러의 희생자 수에 대해 논쟁이 많았습니다. 사실 끔찍한 논쟁이죠. 한 사람이라도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했다는 것 자체가 공산주의 이념으로 봤을 때 너무나 끔찍한 사건입니다. 하물며 몇 명을 죽였느냐를 놓고서 논쟁했다니, 얼마나 비극적이었겠어요? 2,000만 명 이상 죽었다는 주장부터 기껏해야 얼마 안 된다는 주장까지 의견이 다양합니다. 나중에 소련이 붕괴하고 그 문서고가 개방됩니다. 현재는 문서고의 공식 자료에 근거해 대체로 80만 명 정도라고 봅니다.
냉전이 아주 치열할 때 우파 쪽의 저널들에서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해 2,000만 명 이상이라는 말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들 통계를 보면 뚜렷한 현상이 하나 있어요. 일반 인민들은 거의 죽지 않았습니다. 군대나 행정 조직이나 당 조직에서 고위직이나 중요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살해당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숙청은 상층부에서의 문제이지, 인민들은 대테러에 대해서 공포를 그렇게 크게 느끼지 않았고 잘 알지도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중략)
역사적 관점에서 사망자의 수보다 더 중요한 의문이 있습니다. 왜 대테러가 뜬금없이 이때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역시 제일 유력한 설명은 나치의 위협입니다. 이때가 나치의 위협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스탈린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스탈린은 소련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 내부에서 저항이나 반란이 일어나면 독일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아주 강했습니다.
(중략)
거기에다 독일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동쪽 끝의 일본 역시 군국주의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고 러일 전쟁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자는 비전향장기수 신현칠(1917~2012) 선생으로부터 “스탈린은 혁명가이자 유능한 전쟁지도자였다. 스탈린은 파시즘으로부터 일국사회주의로 소련을 지키기 위해 숙청을 단행했지만, 어떻든 역사적으로 볼 때 소련공산당의 비극이었다”라고 말씀한 적이 있다.
사실 미국과 영국은 파시즘에 대항해서 전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국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물론 소련 또한 마찬가지로 파시즘으로부터 일국사회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서방과 대연합했다.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불복종자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도서출판 이후, 2002)에 나오는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진짜 이유를 정리했다.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은 파시즘의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전쟁에 뛰어든 게 아니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일본이 난징에서 중국인들을 도살할 때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고, 프랑코가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파괴할 때 그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으며, 히틀러가 유태인과 정치적 반대파들을 수용소로 보낼 때 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전쟁 동안에도 눈앞에 닥친 죽음으로부터 유태인을 구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 권력이 위협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전쟁에 뛰어들었다.
히틀러의 두 손은 추악함으로 물들었지만 미국의 손도 깨끗하지는 않았다. 우리 정부는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를 자임하는 곳에서 흑인들의 예속을 용인했으며 당시도 여전히 그러했다.”
소련과 중국의 변화를 주목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필자가 신동숙 여사를 처음 뵌 것은 아마 2002년 2월 21일 사월혁명회 민족학교 2기 수강생으로 향린교회에서 개강식 할 때인 것 같다. 당시 필자는 민족학교 교무부장으로 활동했다.
4월혁명 62주년 특집 『사월혁명회보(제64호, 2002. 4)』에 나오는 ‘민족학교’ 소식이다.
“사월혁명회 민족학교가 2월 21일 향린교회에서 제2기 개강식을 갖고 총 10주 15강으로 구성된 교육과정을 시작했다. 32명이 수강 등록한 이날 교육과정 개강식에서 황건 교장은 인사말을 통해 ‘우리에게 민족은 반제 논리이며 반세계화 논리’임을 지적하고, 수강자들은 민족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식민지 과정을 겪고 나라가 분단된 ‘우리 현실에서는 인간해방은 반제, 반세계화 또는 반외세를 통해서, 다시 말해 민족해방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첫날 오종렬 전국연합 상임의장의 첫 강의(민족민주운동의 진로)로 시작된 2기 교육과정은 4월혁명 42주년 행사(4월 18일 오후 3시, 흥사단)를 겸한 한상범 교수의 특강(4월혁명과 민족정신)에 이어 같은 장소에서 졸업식을 갖게 된다.”
이후 민족학교를 수료한 신동숙 여사가 2005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활동으로 과로해 서울 동대문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동대문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당시 사월혁명회 황건 상임의장과 문병하면서 정식 인사드리고 그때부터 어머니로 모셔왔다. 이후 필자는 어머니가 인혁당사건 재심 공판과 민족민주운동단체 행사로 서울에 오시면, 동행과 여러 가지 심부름을 도와드렸다.
필자는 이후에도 어머니가 한 달에 한 번씩 대구 집으로 초청해서, 절에 요양 가신 해와 2021년 6월 요양원에 가기 전까지는 계속 정기적으로 찾아뵈었다. 주로 어머니는 도예종 선생의 삶과 활동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분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회를 만드는 문제를 필자와 논의했다. 또한 필자에게 어머니는 각종 민족민주운동 단체의 초대에 어떻게 응해야 하는지 그리고 후원은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등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의견과 자문도 구했다.
그뿐 아니라 필자는 집에 도예종 선생이 남겨 놓은 유품 정리도 함께했다. 하지만 도 선생의 유품은 결혼사진 이외 몇 장의 옛날 가족사진 그리고 국제 정세를 보도한 대중 월간지와 책 몇 권이 전부였다. 도예종 선생은 운동가답게 철저하게 자신이 쓴 글씨와 사진은 남기지 않았다.
필자는 당시는 지금과 달리 숨도 쉴 수 없는 박정희 파쇼 정권 시절이라 도 선생이 대중 월간지를 본 이유는 공안의 눈을 피해 자연스럽게 소련과 중국 등 국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보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뿐 아니라 지금은 작고하였지만, 필자는 이천재 선생 등 몇 분의 구술에서 당시 국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청(청취)’이라 하여 북의 방송을 들었다고 증언하셨다.
월간 『말』 조유식 기자의 「이재문과 남민전」(1992년 8월호) 기사이다.
“이재문은 대구로 내려가 대덕산이라는 야산 아래 조그만 전셋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뒤에 인혁당을 재건하여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한 도예종, 서도원, 여정남 등 대구지방의 의식 있는 청장년 및 학생들이 자주 들러 각종 토론으로 밤새는 줄 모르곤 했다. 그들의 토론 수준도 당시로서는 최첨단을 달리는 것이어서 중소논쟁과 전위조직논쟁 등 당시의 중요사안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특히 중소 논쟁은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관심사여서 한창 때는 모스크바방속, 북경방송까지 들어가며 어디든 모여 앉기만 하면 그 주제로 격론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이재문은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중국의 입장을 옹호했던 것과 달리 소련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것은 소련이 주장하는 긴장완화론이 한반도 통일에 유리한 정세를 조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중립적 입장으로 정리하는데, 북한에서 중소 양쪽을 다 비판하면서 ‘우리는 남의 책상에 양다리 걸치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을 민족자주적 입장이라 하여 좋게 생각했다 한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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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21) ‘대동아공영권’에 맞서 싸우는 조선과 중국 혁명가 - 예속 정권과 싸우는 민중에 기반을 둔 베트남 인민혁명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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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6
신동숙(20)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와 스탈린 국제무대 부상 - 소련과 중국의 변화를 주목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