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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인류 세계'와 '자연 세계'의 개념적 구분
인류 세계와 자연 세계는 서로 대응하는 두 개념이다. 자연 세계는 천연적 자연이라고도 한다. 시간적으로 볼 때 자연 세계는 인류 세계가 탄생하기 이전의 자연계이며, 인류 세계 탄생 이전의 선재(先在)적 세계이다. 공간적으로 볼 때 자연 세계는 인류 활동이 아직 깊이 들어가지 않은 자연계, 즉 아직 인간화되지 않은 자연계이다. 인류 세계는 인간에 속한 세계라고도 하며, 이는 인류 실천을 기반으로 형성된 "인간화된 자연"과 인류 사회의 통일체이다. 인간화된 자연이란 인간의 실천에 의해 개조되어, 인간의 목적과 의지의 흔적이 찍혀진 자연을 말한다.
자연 세계와 인류 세계는 모두 객관적 실재성을 지닌다. 사람들은 자연 세계 밖에서 인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 세계가 제공하는 재료를 기반으로 인간화된 자연, 인류 사회, 인류 세계를 건설한다. 인간의 실천은 천연 자연의 외부 형태, 내부 구조, 심지어 그 법칙이 작용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천연 자연 또는 자연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천연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은 실천을 통해 인간화된 자연, 인류 사회, 인류 세계로 확장되며, 인류 세계 객관적 현실성의 자연적 기초를 구성한다.
ㅡ 인류 세계의 형성과 실천의 역할
자연 세계와 인류 세계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즉 '자연 세계'는 인간의 활동과 독립적이거나 아직 인간 활동 범위에 포함되지 않은 자연계이다. 그 때문에 그 운동 변화는 완전히 자발적이며, 모든 것이 맹목적인 상호작용 속에 있다는 점이다. 반면 '인류 세계'와 인간의 활동은 분리될 수 없다. 인간화된 자연(즉 인류 세계)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개조된 자연으로, 인간의 필요, 목적, 의지, 본질적 힘을 체현한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인간 활동의 대상화이다. 인류 세계의 독특성은 주체의 실천 활동에 대한 의존성에 있다. 물론 인류 세계는 자연 세계를 떠날 수 없으며, 자연 세계를 자신의 존재와 발전의 전제로 삼아야만 한다. 하지만 인류 세계는 결국 자연 세계와는 다르며, 자연 세계가 자동으로 확장된 산물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인류 세계는 인간 실천 활동의 대상화이며, 인간의 대상 세계이다.
통일된 물질세계에는 원래 자연 세계와 인류 세계의 구분이 없었지만, 인간과 그 활동이 출현한 후에야 "자연의 그물"에 틈이 생기고 둘로 나뉘게 되었다. 즉, 자연 세계의 기초 위에서 그것과 대립하면서도 통일된 인류 세계가 중첩되었다. 실천은 자연 세계와 인류 세계의 분화와 통일의 기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생산 활동(실천)은 천연 자연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목적성의 요소를 주입한다. 인간의 내적 척도를 물질적 대상에 적용함으로써, 인간적 방식으로 물질 전환 활동의 방향과 과정을 규범화하고, 물질의 자체적 존재 형식을 변화시킨다. 실천 속에서 천연 자연이라는 "자연적인 것"은 점차 인간의 목적을 체현하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나를 위한 것"으로 전환된다. 그 결과 천연적 자연에서 인간화된 자연이 분화된다. "인간화된 자연"은 "인간의 현실적 자연계"이며, "인류학적 자연계"이다.
ㅡ '사회적 자연'과 '자연적 사회'의 변증법
자연의 '인간화' 과정은 동시에 인류 사회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생산 활동(실천)을 통해 자연을 개조하는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연결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 개조, 창조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없이는 인간과 자연의 현실적 관계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생산은 개인이 특정 사회 형식 속에서, 그리고 이 사회 형식을 통해 자연을 점유하는 것"(<독일이데올로기>)이다. 이는 자연의 '인간화'가 사회 밖이 아닌 사회 안에서 실현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자연계의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오직 사회 속에서만 자연계가 자신의 인간적 존재의 기초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인간의 실천 활동 속에서 생성된 인간화된 자연과 인류 사회 및 그 통일체가 인류 세계를 구성한다.
내용적으로 볼 때, 인류 세계는 자연과 사회라는 두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인류 세계는 자연계와 사회의 ‘합산’이 아니라, 실천을 기반으로 형성된 인간화된 자연과 인류 사회의 "이위일체(二位一體)" 세계이다. 인류 세계에서 자연과 사회는 서로 제약하고 서로 침투하며,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은 사회적 자연과 자연적 사회이다.
인류 세계의 자연은 인간과 분리된 자연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가공’된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를 개조할 뿐만 아니라, 실천을 통해 자신도 자연적 존재 속에 들어가 자연적 존재에 새로운 척도를 부여한다. 자연에 대한 모든 가공과 개조는 "특정한 사회 형식 속에서 그리고 이 사회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런 의미에서 인류 세계의 자연은 사회적 흔적이 찍힌 자연이다. 인류 세계에서 자연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연이 인간에게 어떤 관계를 갖는지, 인간이 자연에 대해 어떤 형식, 내용, 범위의 작용을 채택하는지 등은 모두 사회 형태의 제약을 받는다. 인류 세계의 자연을 실천의 사회적 형식에서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류 세계에서 자연은 천연의 물질적 본성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흔적이 찍혀 있으며, 객관적 실재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성도 갖는다. 인간화된 자연은 사회(역사)적 범주이다.
인류 세계에서 자연이 사회에 의해 제약받는 것처럼, 반대로 사회도 자연에 의해 제약받는다. 인류 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물질 교환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해 왔으며, 인류 역사도 결국 "자연계가 인간에 대해서 생성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인류 세계에서 객체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의 법칙이 결코 그것을 점유하는 사회적 과정 속에 완전히 녹아들 수 없고, 사회는 모든 것을 녹이는 "염산 풀"이 아니다. 사회의 목적과 필요는 오직 자연 과정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 교환은 사회가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을 구성한다. 사회 발전은 순수한 자연 과정도 아니고, 자연을 초월한 초자연적 과정도 아니며, 자연 운동과 ‘유사한’ 과정이다. 자연 및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갖는 이론적, 실천적 관계를 사회(역사)에서 배제한다면, 이는 사회(역사)를 허무 위에 세우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회적 자연과 자연적 사회는 모두 인간의 대상적 활동의 산물이다. 실천은 인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와 기초이며, 인류 세계의 운동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ㅡ 실천의 동태성과 인류 세계의 발전
실천은 인류 세계의 현실적 기초이며, 실천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따라서 인류 세계는 동태적이며, 끊임없이 발전하고, 끊임없이 생성되며, 끊임없이 더 큰 규모와 더 많은 층위의 개방 체계를 형성한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포이어바흐의 세계에 대한 직관성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감성적 세계가 결코 태초부터 직접 존재하는,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산업과 사회 상태의 산물이자 역사의 산물이며, 세대를 거듭한 활동의 결과임을 보지 못했다. 각 세대는 모두 이전 세대가 도달한 기초 위에서 이전 세대의 산업과 교류를 계속 발전시키고, 필요가 변화함에 따라 사회 제도를 변화시킨다."(<포이어바흐 테제>)
현대의 실천은 마르크스의 이 관점이 진리임을 더욱 증명한다. 현대에 이르러 인류의 실천 활동은 이미 광활한 우주, 광대한 해양, 지구 심층부와 생물의 분자 구조 등에 이르렀다. 현대 저명한 과학자 허버트 A. 사이먼이 말했듯이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세계는 자연의 세계라기보다는 인공적이거나 인위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것에는 인간의 기술적 흔적이 새겨져 있다."(<인공의 과학(The Sciences of the Artificial)>)
ㅡ 생태 불균형과 인간-자연 관계의 재구성
자연 세계는 인류 세계가 존재하고 발전하는 자연적인 기초를 구성하며, 인류 세계가 형성된 후에는 반대로 천연적 자연을 제약하고 자연 세계의 경계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실천 활동에서 자연 세계와 인류 세계 이 두 측면은 분리할 수 없으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자연사와 인류사는 서로 상호 제약한다. 현대 과학의 성과는 자연사에서 가장 높은 "수렴(집결)"은 자연사가 인류사로 전환되는 시기에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이때 낮은 층위의 자연 시스템은 높은 층위의 사회, 문화 시스템의 구성 부분이 되고, 사회와 문화 시스템은 다시 자연 시스템에 ‘제약’을 가한다.
천연적 자연은 인간의 실천 활동을 통해서 인간화된 자연으로 전환되고, 인간화된 자연은 불가피하게 전체 대자연의 운동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여전히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자연 세계의 운동 과정에 합류하게 되며, 여기서 두 가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첫째, 자연 세계의 운동이 강력한 힘으로써 인간화된 자연의 흔적을 강제로 제거하고, 인간 활동의 성과가 희미해지고 사라지도록 만든다. 둘째, 인간화된 자연이 자연법칙이 작용하는 범위와 결과를 변화시켜 다양한 자연 과정, 특히 생물권(biosphere) 내의 물질과 에너지의 순환과 변환을 변화시킨다. 후자는 오늘날 발생하는 생태 불균형, "전 지구적 위기" 문제와 같이 인간에게 극히 불리한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생태 불균형과 "전 지구적 위기"는 자연 시스템 내 균형 관계의 심각한 파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과 세계 관계의 심각한 불균형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위기는 인간의 실천 활동이 자연 시스템에 개입하여 초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형상적으로 말하자면, 생태 불균형과 "전 지구적 위기"는 ‘천재(天災)’의 형태로 나타난 ‘인재(人災)’이다. 엥겔스는 일찍이 자연계가 "인간에게 보복"하는 문제와 "인류와 자연의 화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마르크스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 교환을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가장 떳떳하고 인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조건에서 이러한 물질 교환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인간과 자연의 균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원시적인 자연 생태계의 균형으로, 자연 생태계가 ‘인위적’ 파괴를 받지 않고 자체 조절을 통해서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 속에서는 인간은 자연에 의존하고 순응하는 위치에 있으며,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비교적 조화롭고 온정적이다. "꽃향기 속에서 풍년을 이야기하고, 개구리 소리를 가득 들으며"와 같은 경지에 도취된다. 다른 하나는 인공 생태계의 균형으로, 인간이 자신의 활동을 통해 자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개조하여 원시 자연 생태계의 균형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적합한 생태 균형 시스템을 창조하는 것이다.
현대의 "전 지구적 위기"의 출현은 동양 전통 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 관념이 다시 매력적인 빛을 발하게끔 한다. 실제로 이러한 "천인합일"은 원시 자연 시스템적인 생태 균형을 반영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말하는 "인류와 자연의 화해"는 인공 생태계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실천과 현대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발전 목표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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