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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춘란과 함께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사회대중당 최만리 중앙당 부녀위원장은 4월혁명 공간에서 혁신정당 운동을 황금수와 함께 했다. 당시 황금수는 사회당 중앙당 노동부장,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노동위원장,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성원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4월혁명의 반동,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5·16 군사쿠데타로 급조된 군사혁명위원회는 ‘혁신계’는 바로 ‘용공 세력’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는 여순항쟁에 가담한 자신을 부정하고, 미국으로부터 사상 검증받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무자비하게 ‘혁신계’ 인사를 구속한다. 그리고 쿠데타 후 5월 16일부터 21일까지 6일 동안에 2,014명을 체포한다. 또한, 두 달 남짓한 기간에 예비 검속한 용공 혐의자도 무려 3,098명이나 된다.
황금수도 이때 체포된다.
그러나 박정희는 예비검속된 용공 혐의자가 너무 많아 「예비검속자 제헌절 출감조치에 관한 담화(1961. 7. 17)」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이 가운데 2,560명을 석방했다.
이때 황금수도 석방된다.
황금수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신분 노출로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자, 직장이었던 합승 운전기사(시청~영등포 노선)를 그만두고 연탄장수를 한다. 이후 한방 서적을 독학해 침과 뜸 그리고 한약 처방 등으로 여러 동지의 건강을 챙겨주며 자칭 ‘돌선생‘(필자 : 한의사)를 한다.
이때 황금수는 최만리의 치료 관계로 자주 만나면서 지춘란을 소개받아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지춘란의 이력이 황금수의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에 나온다.
윤석양의 양심선언과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는 양심선언을 위해 육군 이병 윤석양이 탈영 시 갖고 나온, 동향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0여 장, 개인신상카드, 개인별 동향파악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 디스켓 30여 장 등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기록이다. 윤석양은 1990년 10월 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만천하에 사찰기록을 공개했다.
사찰기록에는 여야 현직 의원 등과 종교언론·문화·예술·노동 학원가 등 주요 인사 1,600명에 대한 불법사찰 실태가 조사되어 있었다. 사찰대상자의 개인신상카드에는 가족 사항, 경력, 교우와 배후인물, 개인특성 등 모두 9개 항목 기록뿐만 아니라, 집의 담장 높이, 예상 도주로 및 은신처 등까지도 세밀히 조사되어 있었다.
또한, 주요 동향파악 대상자에게는 담당관 1명이 지정돼, 매달 말일에 한 차례씩 대상자의 발언 내용과 접촉 인물 등을 담은 ‘문제인물동향관찰보고서’를 작성토록 했다고 윤석양은 말했다.
윤석양의 양심선언은 노태우 정권에 치명타를 안겼다.
사찰기록이 폭로되자 10월 7일 보안사의 집중사찰을 받아 온 야당과 재야단체 회원 등 70여 명은 향린교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불법사찰과 관련돼 있는지가 밝혀져야 한다며, 관련이 있다면 즉시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장기집권 도구 민간인감시체제 보안사를 해체하라!’, ‘민간인 사찰을 자행하는 보안사를 박살내자!’ ‘타도 노태우!’ 등의 구호가 대학가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 10월 13일 오후 3시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야당인 평민·민주·국민연합 등 확대비상시국회의 공동주최로 ‘보안사 불법사찰 규탄과 군정청산 국민대회’가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문정현 신부, 박형규 목사 등은 노태우 정권은 부당한 권력이므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모든 민주세력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민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노태우 정부는 정국이 엄청난 회오리에 휩싸이자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을 해임하고, 보안사는 기무사로 개편된다.
이때 『월간 말』 1990년 11월호 별책부록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원본 완전수록)에 나오는 황금수 개인카드 내용이다.
ㅡ 황금수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의 오류와 사실 ①
황금수 개인카드 번호 494
□ 인적사항/ 생년월일 : 38.4.8 본적 : 경남 함안 칠원 유원 795
주소 : 서울 노원 상계 1048 직업직위 : 전 남민전 중앙위원
□ 학·경력(병역 포함)/ 대구국 졸 48.9 조선민주청년동맹 회원
51.10~54.5 미군병기부대 자동차수리공 61.2 민자통 회웡
77.11 남민전 중앙위원
□ 전과관계/ 50.9.20 국경법 징역 2년 54.10.16 국경법 32조위반
징역 20년 74.10 반공법 구속집행정지 78.4.26 사안법 위반 입건
80.5.2 국보법 징15 자정15년
□ 정당 및 사회단체 활동/ 48.9 조선민주청년동맹 위원 61.2 민자통 위원
77.11 남민전 중앙위원
□ 개인특성/ ※ 처 지춘란은 6·25시 인민군 간호 장교로 활동
□ 주요동향/ 48.9 조선민주청년동맹 회원 61.2 민자통 회원
77.11 남민전 조직원 김영옥에 포섭. 가입후 통혁당 방송 청취후
동조직 투쟁노손으로 채택 78.1 남민전 산하 “민주구국학생연맹” 명의
불온 유인물 500매 배포 김봉권·김홍을 포섭, 남민전에 가입
79..2 남민전의 ‘장기작전“ 등에 참가하여 총기 쟁취 및 불온유인물 살포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의 황금수에 대한 오류가 다수 있다.
먼저 황금수는 1934년 갑술년 개띠로 생년월일이 틀렸다.
민족민주 운동에서 ‘34년 개띠’는 헌신적 운동가들이 많이 나왔다. 작고한 한승헌 전 감사원장은 권력과 세상을 향해 짖던 ‘맹견(猛犬)들’이라며 ‘맹견주의’라고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말씀으로 후진들을 고무시켰다.
아마 일제 강점하에 신음하던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민족해방, 민중해방의 숙명을 지고 일제 패망 후의 해방공간과 6·25전쟁을 전후하여 몸을 던져 싸웠던 분들이었기 때문이라 본다.
황금수의 개띠 동지로 4월혁명공간에서 함께하며 생존해 있는 분으로, 사회당 당무부장이자 통민청 성원인 김영옥,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서울맹부 투쟁국장이자 민자통 청년부장인 박중기 그리고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친동생이자 기획실장인 조용준 선생이 계신다.
ㅡ 황금수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의 오류와 사실 ②
두 번째로는 황금수는 어려운 가정 형편과 호적에 나이가 늦게 등재되어 학교에 가질 못했다. 그는 국민학교에 들어갔지만 배울 것이 없어 한 달 정도 다니고 그만둔다.
황금수의 기억이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때는 일본으로 주로 탄광 같은데, 가서 일하고. 몇 푼 벌어가지고, 한 3년 내지 5년에 한 번씩 귀국해서. 아이 하나 만들어 놓고 또 떠나고. 그래서 나이 터울이 고런 정도 되었고. 그래서 구 남매를 낳았는데.
그런데 구 남매를 낳으면 면사무소에 가 호적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데, 출생신고를 안 한 거야.
동네 사람이 면에 뭐 볼일이 있어 간다 그러면, 그쪽에다 부탁해요. 가거든 우리 전수(필자 : 출생 이름) 몇 월 며칟날 났는데 출생신고 좀 해 달라 부탁했는데. 이 사람들 가서 출생신고를 바로 했으면 되는데 안 하고 그냥 잊어버리고, 술 한 잔 먹고 돌아온 거야.
나중에 내가 국민학교 가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보니 호적이 안 되어 있는 거야. 그래서 호적에 상당히 늦게 등재되는 바람에 학교는 못가고 서당으로 가게 돼.
서당에 가서 한문 공부를 했는데, 그때는 머리가 상당히 영리한 것 같애. 굉장히 나를 가르치는 선생이 이름이 나석순씨 인데. 자기가 가르친 25년간 선생 노릇을 하면서 자기가 가르친 제자 중에 내가 제일 머리가 좋다고 칭찬했어. 남들이 1년 배울 것을 나는 한 달에 다 끝내버렸거든.
그래서 내가 그 서당에 들어가는 날부터 나오는 날까지 학비를 한 푼도 받지를 않더라고. 우리 아버지 학비를 주려고 가면, 오히려 술대접만 받고 와서 기분 좋아하시는 그런 말씀 하시는 걸 들을 정도로. 어렸을 때는 무척 총명하고 가르치면 금방 알고 이랬는데."
황금수는 민족주의자인 서당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서당 선생의 사위는 몇 년에 한 번씩 오는데. 만주 쪽에서 독립운동하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이런 한문 공부가 그를 해방공간에서는 불과 10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임에도 직업적 혁명가로, 나중 1960년대 후반에는 ‘돌선생’이란 직업을 갖게 된다.
황금수는 ‘한문공부에는 문학이 있고, 철학이 있고, 역사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황금수는 해방공간 조선민주청년동맹 성원으로 활동한다.
ㅡ 해방공간 조선민주청년동맹 회원으로 활동하다.
황금수의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에서 정당 및 사회단체 활동으로 조선민주청년동맹 회원으로 나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소년이지만은. 그때 청년들이 청년운동을 동네마다 하고 그랬는데. 내가 그 청년들 모임에 참여하게 됐어.
그때 내가 참여하게 된 것은 해방 직후에 진보적인 서적이 그리 많지 않지마는. 대개 책에 한문이 많이 섞여 있어. 뭐 ‘토’라던가 이런 건 ‘국문’이고, 나머진 거의 ‘한문’이야. 근데 이게 청년들이 한문 공부 안 한 사람들은 그걸 못 읽어. 내가 읽고 설명해주고 그래서요.
그리고 청년 운동한 사람 중에 권오연이란 사람, 그 양반이 청년운동에 지도위원 정도 오르그(org)였는데. 그 양반하고 같이 뭐든지 같이 이야기하고 운반할 것이 있으면 같이하고. 그렇게 되면서 주로 그때는 심부름, 심부름만 그 위주로 했어요.
그리고 심부름이 대구 시내에서 오고 가는 심부름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그런 심부름도 했어요.”
황금수는 자연스럽게 레포(レポ)로 연락 문건을 전달하는 일과 함께 여러 기관과도 관련 사업을 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그다음에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한테 쪽지를 갖다주면 그거 보고 잠시 기다리라 그러고. 자기들 돈이 있으면 자기 돈을 주고 없으면 옆 상회 돈을 빌려서 이렇게 주는. 그때 재정 받는 심부름을 했어요. 모쁠 사업을 했지요.”
‘모쁠’은 해방공간에 당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제 지원이나 구속되었을 경우 구속자 가족 생계지원 그리고 부상 등을 당했을 때 재정 지원해주는 것으로, 일제강점하에는 ‘혁명자후원회’라 했고, 지금의 ‘양심수 후원회’ 같은 사업이다.
황금수는 모쁠 사업의 중요성에 대해 “어쨌든 재정을 지원하는 사람을 아주 귀중히 여기고, 지켜주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어요. 그래서 나는 그런 의미에서 폭넓게 일을 보고 배우고 익혔다고 생각해요.”라고 증언했다.
ㅡ 준비 없는 싸움은 진다
황금수는 1946년 대구 달성 공원에서 개최된 8·15경축 행사에 대해 증언했다.
“나는 그런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고. 그때 특징이 각 정당사회단체에서 책임자가 나가 연설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선전부를 담당하는 책임자. 말하자면 연설을 잘하고 뛰어난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선출해서 책임자를 만들어요.
이 사람들은 벌써 8.15 경축행사를 한다 그러면. 한 한 달쯤 전에 원고를 작성해서 대구에 앞산이라고 제일 큰 산인데. 당시는 요즘과 달리 등산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산꼭대기에 사람이 없어요. 꼭대기에 올라가 한 달간 연습을 해요.
그러니 청년대표, 농민대표, 노동 대표 각 여러 단체의 대표들이 나와서 연설을 하는데 정당도 그렇고. 그 힘이 그 많은 대중을 완전히 장악할 정도로 그런 힘을 가지고 그 연단에 서서 연설을 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그때 운동의 특징이 아니냐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10월인항(10월 인민항쟁). 그때는 폭동이라 했죠. 지금은 인민항쟁이지만. 그 폭동 때의 청년들이 말이지. 동네 도로 열, 십자 도로 사거리에서 사람 많이 다니는. 사거리 도로에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지금 대구 역전에서 항쟁운동 벌어지고 있다’고 말이지, 그래 전부 가자고 그런 소리를 지르는 그런 선동하는 특징이 있었지.
지금에 비하면 지금은 인터넷도 있고 방송 매체도 있고 그런데. 그때는 그게 없으니까, 오로지 목소리로.”
황금수는 해방 직후 공간 그 청년들이 외치는, 그런 힘 있는 외침의 영향을 받아서 이때까지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 청년들이 준비 없는 그런 연설을 하는 걸 보면서, 내가 늘 진보 쪽에 하는 이야기가 그런 전문적으로 선전, 선동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들을 각 조직마다 길러야 한다. 아주 전문화를 시켜야 한다.
적어도 몇만, 몇십만 명 단상에서 그 군중을 장악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능력을 길러야 한다.
운동을 크게 나누면 조직하고 선전하고 그러고 재정이야. 이 세 가지가 가장 핵심이야 운동에.”
※ 격주로 연재합니다.